3. 밀고자는 누구였을까? (필명 김자현)

사진- 한겨레 (금 자라의 섬-금오도)
사진- 한겨레 (금 자라의 섬-금오도)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미 군정이 들어오고 나서 물러가는 줄 알았던 일경이 마을마다 부활했다. 친일 골수들은 떠나간 적산가옥을 군정으로부터 헐값에 불하받았다. 미 군정은 점령지를 다스릴 궁리에 6개월이 넘지 않아 군정 명령을 내리지만 일인들이 경영관리하던 재산들은 원칙 없이 친일파와 우익쪽 인사들에게 돌아갔다. 더구나 금오도는 섬이며 경성과는 물리적으로 얼마나 먼 지역인가.

일본놈들의 소유이던 여러 대의 선박이 어느새 일본놈들과 친하던 명가네 소유가 되어버린 것 아닌가. 패망한 일본놈들이 떠나가고 나면 한 몫이라도 차지하리라, 잔뜩 욕심을 내고 있던 마을 몇몇 사람들이 명가 네가 더욱 미워 씨근거렸다.

대체 선과 악은 언제 판가름이 나는 것일까. 하늘은 무얼하고 계신지. 원수 같은 명가네는 언제나 벼락을 맞을꼬. 끼니가 걱정인 집들은 여전히 끼니가 걱정이고 이웃 주민들 등골에 빨대를 꽂아 부자가 된 놈은 어떻게 선박까지 차지했단 말인가. 하늘에 주먹질이라도 하고 싶은 금오도 주민들의 심정과는 아랑곳없이 명가네 집구석이 또 금오도에서 제일 큰 집을 짓기로 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일본에서 건축자재를 실어오는 등, 일본 최고기술자가 와서 건축설계를 했네, 대들보 지름이 어마어마 하다는둥, 마루는 대리석이 깔렸다고 듣도보도 못한 규모와 최고급의 건축자재에 마을 사람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좌우합작을 힘껏 외치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이 한지근을 비롯한 4명의 극우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총격으로 암살당하셨다는 비보가 머나먼 금오도에도 날아들었다.

우리 민족에게는 큰 손실이었다. 1886년 조선 말기에 태어난 몽양은 나라가 기우는 것을 여실히 목격했으며 매국노 무리들에 의해 어떻게 나라가 제국주의에 먹히는지 똑똑히 보며 자랐다. 대한제국의 내적인 패망의 원인을 낱낱이 진단한 몽양은 평생 민족을 위한 사회주의, 민족주의자였다.

스무 살이 되기 전,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노비를 모두 면천시키고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시대를 꿰뚫어 보는 진보주의자였으며 만인 평등주의자였는가를 여실히 나타내는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중국과 일본과 소련을 넘나들며 일제로부터 벗어 날 자주독립의 그 날을 위해, 자신이 소지한 물리적 모든 역량과 자신의 지략을 총동원, 나라를 위해 목숨이 다하는 시간까지 총체적으로 헌신한 인물이었다. 당시 61세였다. 몽양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정치권은 물론 전국을 대혼란에 빠뜨렸다. 이로 인해 여수지역의 건준도 큰 타격이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일찍이 감지하고 있던 몽양이었다. 그로 인해 조선의 해방을 점치며 준비하고 있던 그에 의해 해방 직전 1944년 8월, 지하 비밀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이 이미 결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다음 해 8월 15일이 되자마자 오전, 여운형은 일본 수뇌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와의 협약 후 건국동맹을 모체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신속히 창립할 수 있었다. 건준은 여운형 주도하에 좌우합작 및 자주국가 수립을 목표로 전국단위로 눈부시게 활약했으나 해방정국은 실로 천 갈래 만 갈래 대혼란이었다.

더구나 점령군으로 상륙한 미 군정은 이미 만연해 있는 조선공산당을 약화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좌익 언론을 통제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소련을 철저히 견제하기 위해 해방정국 초반부터 공작정치를 통해 극우의 숫자를 늘리고 테러를 방치하는 정치를 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몽양 여운형의 암살 소식을 접한 우학리 이윤기 이윤복 형제, 선생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몽양의 인격, 몽양의 활약, 그의 어록에 함몰되었던 수백 명에 이르는 금오도 건준 청년회원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라야 망하든 흥하든 제 이익에만 눈이 시뻘건 명가네는 집을 다 지었는지 사흘 도리로 병현네를 다시 괴롭히기 시작했다.

48년, 1942년 1월생인 박병현님의 딸 박경자가 만 일곱 살이 되어 마을 여남 국민학교에 입학했던 해, 그리고 6월이 다가왔다.

고리 사채놀이를 하는 명개순은 병현에게 몰매를 가하고도 천역덕스럽게 돈을 갚지 못하면 남은 전답이라도 내놓으라고 사흘 도리로 들볶았다. 자신들의 맡형이 몰매를 맞고 돌아온 날부터 아우들은 명개순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는 것을 간신히 누르고 오는 중이었다.

“형님, 저것들을 그냥 두고 볼 것입니까?”

아우들은 모이기만 하면 씨근거렸다. 마을 주민들의 피 같은 고리채를 뜯어 부를 축적하는 인간말종, 명가네를 이 김에 손을 보자는 것이다. 이제 병현네까지 명가네 돈을 썼으니 남면 유송리는 이제 모든 집이 명가의 수하에 들어간 셈이다. 한 달 이상을 일어나지 못하던 병현도 자리에서 일어나 일상이 가능해지자 화가 점점 더 치밀기 시작했다. 상스러운 것들은 애초에 상종을 말아야 하는데 일은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모두 아우들이지만 불러모은 형제들과 의논을 끝낸 병현은 다음 날 바로 명개순을 고소했다. 자신이 당한 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간 마을 주민들을 착취해오는 명가네 형제 개순과 창순의 고약한 행태의 구조와, 비위에 틀리면 무자비한 폭행을 서슴지 않는 것, 지난해 당한 자신의 일도 고발장에 낱낱이 썼다. 고소 고발을 하고 나서 병현은 한숨을 돌렸다.

치욕이었다. 가세가 기울어가는 것도 아주 깊은 우울이다. 그런데 박병현네도 명가네 돈을 썼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그뿐인가 그것을 온 마을이 다 알게 되었다는 것이 세 번째 치욕이며, 쓰는 것도 모자라 돈을 갚지 못해 몰매까지 맞은 사실이 온 마을에 퍼졌으니 병현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닌단 말인가.

그래도 금오도에서는 고등과를 나온 엘리트 집안이요 자신은 함구미 학교 선생을 했던 인물 아닌가. 대대로 정승판서가 나온 집은 아니어도 고조부가 큰 벼슬을 했다는 소리도 들었는데 자신의 대에 와서 가세가 기우는가, 라는 생각이 떠오르면 병현은 괴로웠다. 이래저래 생각할수록 끓어오르는 부화를 삭힐 수 없더니 고소장을 내고 나니 조금은 복수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꼭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일몰이 지나 들판에서 밭을 가꾸던 일꾼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물이 빠진 갯펄에서 조개류를 캐던 아낙들도 저녁을 지으러 들어갔다. 거리에도 들판에도 오가는 사람이 없고 바닷물 소리만 철썩이고 있었다.

박병현씨 댁은 막 저녁상을 받아 놓고 식사를 시작할 때였다.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바로 여러 개의 구둣발 소리가 났다. 머리가 쭈볏 서는 느낌이 들었다. 정복을 입은 순사 두 명과 사복형사 두 명이었다. 당시 금오도 인구는 6천6백 명가량이었으며 금오도 지서에는 20명가량의 경찰이 복무할 때다.

그날 밤으로 병현은 연행되었다. 금오도 유지이며 친일 골수이던 명개순에 의해 좌익 활동가요 빨갱이로 흑두건이 뒤집어 씌워졌다. 다음날 여수경찰서로 이송 수감 되었다. 명개순을 혼내주려던 박병현님 일가의 충격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찌해볼 도리가 있었을까. 남은 전답을 파는 등 급전을 구해 박씨 가문의 장남을 빼내려고 별별 애를 다 썼으나 좌익으로 몰린 병현을 빼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미 군정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은 제 비위에 틀리면 모두 빨갱이, 좌익으로 몰아 남자 15세 이상 씨를 말리려 하던 때이다. 총칼로 하는 정치야말로 정치의 꽃 아닌가. 독재자라는 정신병자들의 이상이다.

사진-한겨레에서
사진-한겨레에서

 

그러던 차, 병현 님의 누님, 박상애 님의 시집에는 경찰과 선이 닿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병현이 잠깐 병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었으나 공교롭게도 바로 48년 10월 19일 여순 항쟁이 터지고 말았다. 당연히 집에도 가지 못하고 이집 저집 전전하고 있을 때 10월 말부터 진압군이 다시 병현을 잡으러 다닌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소식이 병현을 괴롭혔다. 여순 항쟁 발발 후, 넷째 동생 창돌이 친구들과 입산했다는 소식이 그것이다.  창돌의 친구들을 수소문하며 동생의 안부를 찾아 탐문하던 중 병현은 다시 여수에서 군경에 발각 체포당했다. 여수 경찰서에서 바로 즉결 처분을 받았다.

병현은 죽으러 가는 배에 태워져 먼바다로 가게 되었다. 물론 두 손목은 포승에 묶여있었다. 캄캄한 밤이었다. 아직은 죽을 운이 아니었을까. 포승이 꼭꼭 묶이지 않았을까. 병현은 포승을 풀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살아서 고향 금오도로 돌아왔다. 군경은 바로 금오도로 병현을 찾으러 득달같이 들이닥칠 것이다.

바로 다음 날 병현은 만삭인 둘째 부인 추점례를 데리고 고흥에 아는 집이 있어 도피했으나 며칠 가지 않아 마을 사람들의 밀고로 다시 여수 경찰서에 수감 되었다. 그리고 여수 만성리 굴 앞에서 처형당하신다. 음력 49년 12월 1일, 당시 나이 30세였다.  당연히 시신을 찾지도 못했으며 역시 큰 누이 박상애 님의 시가를 통해서 처형당한 일체를 사후에 알게 되었다.

 

이 사고로 임신 중이던 추점례 님은 아기를 사산한 후 금오도로 와서 박병현님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박영배를 데리고 가출했다는데 이후 생사를 모른다, 고 한다.

병현을 처참하게 처형하고 진압군은 금오도로 다시 쳐들어 왔다. 휘발유를 뿌리고 집에 불을 질렀다. 아래채 윗채가 전소되었다. 거처가 없어 병현 님의 딸 9살 박경자 님은 몇 달간 외가(생모 우초덕 님의 친정댁-돌산)에서 살다가 친조모 김석심 님이 데리러 와 조모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자라는 동안 내내 빨갱이라고 손가락질당했으며 남의 집 농사일, 혹은 허드렛 일 등을 해주며 연명해 나갔다고 한다.

사진- 한겨레
사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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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박병현님 댁의 사연은 더 길고 기구합니다. 형제분들의 이야기까지는 너무 길어 목숨을 억울하게 잃으신 고 박병현 님의 직계 쪽 이야기만 소설적으로 구성해 보았습니다.

지금도 눈 감지 못하고 어느 구천을 떠돌고 계실까요, 고 박병현 선생님! 아직도 벗겨드리지 못한 빨갱이 두건에 대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 넘 안타까운 맘을 어떻게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공정과 상식의 마당에서 민족의 사랑을 꽃피우면 어째서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사법은 여전히 기득권 편이군요. 단 1촌의 방향도 틀어짐 없이 푸른 빛으로 빛나는 신의 사법은 언제나 이 땅에 존재할까요!

사진 -한겨레에서
사진 -한겨레에서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김승원 주주  heajo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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