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한민족 시원의 핵심 중원지역인 산서성과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개주, 현재 복양)에 있던 모든 지리지명들이 지워지고 이동되며 역사적 기록이 왜곡・훼손

역사주권 상실의 조선사편수회 100주년(6월 6일) 시점에서 동이한민족사의 시원인 환국, 배달, 조선, 북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대진(발해), 고려 등의 국통시원에 대한 고증과 지리지명 위치관련 공유하고자 한다. 향후 지속적 미래 국가발전을 위해 "국통・국혼이 바로 선 대한민국" 건설기반 조성을 목표로 추구한다. 환국배달조선 역사광복론(2025)을 바탕으로 지나왕조들의 지명이동·역사왜곡, 한반도조선의 유명조선(명의 속국 조선) 사대사관과 일제강점기 일속조선 식민사관을 넘어서서 동이한민족사 역사광복의 첫걸음으로 시작한다.

* 동이한민족 역사강역의 지리지명 이동 및 역사왜곡 경로  개요
* 동이한민족 역사강역의 지리지명 이동 및 역사왜곡 경로  개요

역사적으로 여씨춘추를 비롯한 역사, 태평어람, 사물기원, 초구문집,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어비력대통감집람등의 문헌에 의하면, 배달국 14대 자오지(치우)천왕(서기전 2748-서기전 2598)이 서기전 2706년에(조홍근, 2014) 산서성 청구(적성현, 현재 하진시 용문)로 강역을 확장해 천도한(김태영, 환단고기, 2023, 71-76) 청구시대 이래로, 주로 우리 동이한민족 시원의 핵심적 중원지역이 주례』 「직방씨를 비롯해 상서』 「우공, 여씨춘추』 「유시람등의 교차확인에 의거 4,731년 이전부터 산서성과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개주, 현재 복양)이었음을 알 수 있다(김태영, 단군조선, 2022, 2, 17, 38).

그런데 우리 동이한민족 시원의 핵심 중원지역인 산서성과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개주, 현재 복양)에 있던 모든 지리지명들이 지워지고 이동되며 역사적 기록이 왜곡・훼손되어 왔다. 주나라(서기전 1046-서기전 256) 부터 중원인 산서성과 황하북부 하남성 하내에 있던 모든 지리지명을 없애고 다른 곳으로 옮긴 대신, 춘추전국시기(서기전 770-서기전 221) 지나 동이한민족의 왕조들을 산서성과 하내에 자신들의 지리지명들을 이식했던 것이다(김태영, 지명사전, 2024, ii).

여기서, 황하란 당나라(618-907) 중기 이후부터 부르던 이름이며, 그 이전에는 하수(河⽔)를 비롯해서 대하(⼤河), 간하(簡河), 사하(沙河), 총하(蔥河), 해(海: 바다), 하(河), 구하(九河), 덕수(德⽔), 마협하(⾺頰河) 등 모두 11가지로 불렸다. 따라서 고구려・백제・신라・대진(발해)・고려 등의 역사에 나타나는 해(海) 즉, 바다란 황하(『후한서』, 『옥해』, 『사기』 「하본기 제2」 등 참조)를 가리키는 말이다(김태영, 부여, 2024, 91-92).

지리지명의 왜곡이 극심한 왕조는 고려농민 출신인 홍건적의 명나라(1368-1644)를 시작으로, 청나라(1616-1912)와 중화민국(임시정부 1912-1913, 북양정부 1913-1928, 국민정부 1928-1948, 중화민국 정부 1948-현재. 북방공정)이다(김태영, 봉천통지, 2021, 4). 이들의 대략적 지명왜곡 개요를 보면, 섬서성과 산서성 남부에 있던 지명들을 처음에는 산동성으로, 두번째로 지금의 하북성, 세번째로 지금의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 등으로 이동시켰음을 확인할 수 있다(김태영, 지명사전, 2024, ii).  

명나라 때인 1405-1421년 사이에 가장 심각하게 지명이동이 되었다. 동이족이고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고죽국은 원래 산서성 서남부 황하의 굴곡지점인 노룡에 있었는데, 명나라가 이 노룡을 현재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으로 옮겨놓고 고죽국과 관련된 지명들인 수양산・난하・갈석산・창려 등도 모두 진황도시로 옮겨놓았다. 또한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고구려 영토였던 유주, 요서군, 요동군에 있던 지명들을 역시 하북성으로 이동되었다.

명나라의 사학자인 장대(張岱: 1597-1684)는 명나라의 역사왜곡을 폭로하였다. 즉, “명(明) 일대에 국사는 진실성을 잃었고 가사(家史)는 객관성을 잃었고 야사(野史)는 억측한 바가 많으니, 280년 동안이 모두가 속임의 세계였다.”(『랑환문집』 권1 참조)라고 한 사실을 기억한다면, 명대의 역사가 얼마나 진실성이 없었는가를 잘 반영해 준다고 할 것이다.

일제와 청나라가 공모하여 또 지명을 옮기고, 1912년 손문의 중화민국 때를 거쳐 1926년부터 북방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지명이동이 본격화되었다. 따라서 명나라 때나 청나라 때 혹은 북양정부 시기에 산서성에 있던 광개토호태열제비가 길림성 집안 근처로 옮겨진 것으로 의심되지만, 김태영(2024)은 명나라 3대왕 주체 시기에 발생한 것이라 제시하고 있다. 현재의 하북성은 명나라 때에 북직례(北直隸)로 부르다가 1645년에 직례, 1669년에 직례성, 1928년 중화민국 북양정부 때 하북성이라고 고쳐졌다. 발해만도 1926년 이후에 지명 변경으로 발해만이 된 것이며 1926년 이전에는 ‘북직례만’과 ‘요동만’이었다. 지금의 요녕성도 1929년 이전에는 봉천성이라고 불렸다.

청일전쟁(1894-1895)에서 승리한 일본이 우리 영토인 간도 즉,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 그리고 한반도를 빼앗고 식민지화하기 위해 광개토호태열제의 비문내용을 훼손하였다. 『환단고기』를 엮은 계연수(1864-1923)의 ‘광개토대왕 비문해설’을 『비문징실』이라 하는데, 그 내용에 일본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1923년에 계연수를 살해하여 목은 대동강 물에, 그리고 시신은 압록강에 버렸겠는지 알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지나인이 광개토호태열제의 비를 길림성으로 옮기고 일본인이 비를 훼손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김태영, 부여, 2024, 72-73). 

현재에는 동북3성인 오늘날의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과 열하성이라는 내몽고 일부와 하북성으로 옮긴 것도 모자라서 동북공정이라는 미명 하에, 동이한민족의 왕조들을 모두 지나의 지방정권이라고 왜곡하고 있다(김태영, 지명사전, 2024, ii). 이와 같은 사유로, 동이한민족 시원의 역사강역관련 국내 연구자마다 각기 하나의 똑같은 지리지명을 전혀 다른 곳으로 고증하거나 주장하게 되는 경향이 많아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역사주권 상실・치욕의  조선사편수회 설치 100주년의 시점에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지나 왕조・국가들의 지명이동과 역사왜곡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 역사광복의 실마리로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 대한민국은 동이한민족 조상들이 살던 강역을 빼앗겼다고 할지라도 역사를 빼앗기면 안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새로운 대통령과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게 된 여건에서  하루바삐 경제대국・군사강국의 위상과 국가적 사명감에 부합해서, 지속적 미래 국가발전을 향하여 우리 동이한민족 시원의 자랑스럽고 찬란한 역사강역 다물(고토회복, 원래상태 회복 또는 역사강역 회복)이 절실하다.

 

* 필자/임기추 박사

홍익경영전략원 원장/유튜브 홍익나라 운영자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임기추 객원편집위원  tranl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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