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7일 대만은 아시아 최초로 탈핵 국가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동되던 제3핵발전소 2호기가 가동을 멈췄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대만전력공사 앞에서는 대만의 탈핵을 축하하기 위해 대만 시민들과 함께 아시아의 탈핵 활동가들이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아시아의 탈핵 활동가 중에서 눈에 들어오는 고령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이의 두 눈은 집회 내내 눈물로 젖어 있었습니다. 그이는 미토 키요코 여사입니다. 미토 키요코 여사의 남편 미토 이와오 씨는 도쿄대학 핵물리학 교수로 있으면서 탈핵 운동에 앞장섰던 선각자였습니다. 일본의 핵마피아들은 미토 이와오 씨를 대상으로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지만, 타협하지도 않았고 굴복하지도 않았습니다. 미토 이와오 씨는 일본 탈핵 운동의 상징이었습니다.

대만이 탈핵 국가가 되는 날의 집회에서 미토 키요코 여사가 대만 활동가와 함께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장영식
대만이 탈핵 국가가 되는 날의 집회에서 미토 키요코 여사가 대만 활동가와 함께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장영식

미토 이와오 교수는 약 40년 전인 1986년 12월에 쌍둥이 아들들과 함께 일본의 북알프스라고 알려진 곳으로 산행을 떠났습니다. 두 아들도 아버지의 길을 따라 물리학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산행이 생전의 마지막 여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미토 이와오 교수와 두 아들은 산행 중에 조난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미토 키요코 여사는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현장을 수습하던 당국은 추락사라고 말했지만, 미토 이와오 교수와 두 아들은 텐트 안에서 등산화를 벗은 채 숨져있었다고 합니다. 경찰은 끝내 진상 규명을 못하고, 의문사로 수사를 종결하였습니다. 언론도 단순 사고사로 보도했습니다.

졸지에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미토 키요코 여사의 방황은 1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그 모진 세월을 배낭 하나만 메고 세계를 돌아다녔습니다. 자신이 죽을 장소를 찾아서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중국의 오지 여행에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가난한 산골의 어린아이가 몇 개의 산을 넘어서 학교와 집을 오가는 것을 보고 그동안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 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미토 키요코 여사는 대만에서 열린 반핵 아시아 포럼에 따님인 미토 아키코 씨와 함께 참석했다. 미토 아키코 씨는 미술을 전공했으며,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에는 후쿠시마 어린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12명의 그림책 작가들과 함께 달력을 만들어 판매하는 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특히 미토 아키코 씨는 고통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민중과 연대하고 있다. 왼쪽은 필자. ©장영식
미토 키요코 여사는 대만에서 열린 반핵 아시아 포럼에 따님인 미토 아키코 씨와 함께 참석했다. 미토 아키코 씨는 미술을 전공했으며,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에는 후쿠시마 어린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12명의 그림책 작가들과 함께 달력을 만들어 판매하는 활동에 힘을 쏟고 있다. 특히 미토 아키코 씨는 고통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민중과 연대하고 있다. 왼쪽은 필자. ©장영식

미토 키요코 여사는 2011년 후쿠시마 핵 사고를 텔레비전에서 목격한 이후 일본으로 돌아왔습니다. 세상을 떠난 남편과 두 아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후 일본 내에서 미토 키요코 여사의 활동은 다양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핵발전소 재가동 중지를 위한 각종 소송에 참여하였습니다. 후쿠시마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지원하는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미토 키요코 여사는 한국의 부안방폐장 건설 문제로 극심한 갈등을 겪을 때도 부안을 방문해서 100만엔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했던 삼척에도 깊은 연대를 갖고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삼척의 탈핵 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여사는 2018년에 후쿠시마 청소년들과 함께 삼척의 ‘원전백지화기념탑’을 방문하고, 기념 식수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원전백지화기념탑’이 있는 곳에는 “생명의 호흡 평화의 날개”라는 작은 비석이 새겨져 있습니다.

삼척의 탈핵 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미토 키요코 여사는 2018년에 후쿠시마 청소년들과 함께 삼척의 ‘원전백지화기념탑’을 방문하고, 기념 식수를 했다. ©장영식
삼척의 탈핵 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미토 키요코 여사는 2018년에 후쿠시마 청소년들과 함께 삼척의 ‘원전백지화기념탑’을 방문하고, 기념 식수를 했다. ©장영식

일본의 탈핵을 위해 목숨을 잃은 남편과 두 아들을 위해 일본과 대만, 한국의 탈핵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미토 키요코 여사는 2024년 일본 인권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미토 키요코 여사는 탈핵을 위한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대라고 말합니다. 민중의 외침과 연대야말로 탈핵과 평화의 길을 열어 가는 유일한 힘이라고 말합니다. 미토 키요코 여사는 지금도 자신의 딸인 미토 아키코 씨와 함께 팔레스타인과 같이 전쟁이나 사회적 재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023년 한국에서 열린 반핵 아시아 포럼 참가자가 삼척 ‘원전백지화기념탑’을 방문하고, “생명의 호흡 평화의 날개”라는 작은 비석을 닦고 있는 모습. ©장영식
023년 한국에서 열린 반핵 아시아 포럼 참가자가 삼척 ‘원전백지화기념탑’을 방문하고, “생명의 호흡 평화의 날개”라는 작은 비석을 닦고 있는 모습. ©장영식
장영식 (라파엘로) 사진작가
장영식 (라파엘로) 사진작가

이 기사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s://www.catholicnews.co.kr)에도 실렸습니다.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장영식 사진작가  hani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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