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란왜란 당시의 거북선 1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헐버트 거북선
헐버트 거북선

지금까지는 4128(1795)년의 거북선에 관한 설명이었다. 그러면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어떠했을까? 3925(1592)년형의 거북선에 대해서 하나하나 풀어보자.

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크기가 결정지어져야 한다. 앞장에서 임진왜란 200여 년 후의 거북선에 관해서는 설명을 하였으니,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크기를 알아보려면 먼저 당시의 거북선에 크기와 연관성이 있는 기록들을 찾아 한데 모아서 당시의 거북선 크기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고,

3925(1592)년대와 4128(1795)년대의 배를 비교하고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거북선 크기와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자료들을 아래에 모아보았다.

O, 이분(李芬, 이순신의 조카)의 행록

이분은 행록에서 그 크기는 판옥선(板屋船)만 하며 위에는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十字) 모양으로 좁은 길을 내어 사람들이 올라가 다닐 수 있게 하고 그 나머지는 온통 칼과 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으며 앞에는 용의 머리를 만들었는데 입은 총구멍이 되고 뒤는 거북의 꽁지처럼 되었는데 그 꽁지 밑에도 총구멍이 있고 좌우에는 각각 여섯 개씩 총구멍이 있는데 대게 그 모양이 거북 형상과 같아서 이름을 거북선이라 하였다고 했다.

여기서 말도 많은 포혈의 수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좌우에 각각 6개의 포혈이 있다고 했으니 12개이고, 용의 입이 총구멍이라고 했으니 1개이고, 거북의 꼬리 밑에도 총구멍이 있다고는 했으나, 그 숫자가 없어 몇 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 기록으로 본다면 14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지붕에는 칼 송곳을 꽂았다고는 했으나 거북 무늬를 그렸다는 말은 없다. 그렇다면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에는 칼 송곳만 꽂았지 거북 무늬는 그리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북선의 크기가 판옥선만 하다고 했으니 판옥선의 크기를 먼저 알아보자. 판옥선의 크기는 수사가 타는 큰 배가 밑의 길이가 70, 다음으로 큰 배가 55, 다음 배가 47.5~50척이었다고 했다.

이 세 종류의 배를 편의상 대, , 소선으로 구분할 것이다.

그런데 이분은 그 크기가 판옥선만 하다고만 했으니, , , 소선 중 어느 크기의 배를 말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음 장에서 나오겠지만 신경준은 병선론에서 거북선의 저판이 50척이라고 했으니 판옥선의 소선에 해당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나 시대의 차이가 있어 가늠하기가 무척 어렵다.

O, 박문수가 아뢰기를

영남균세사 박문수가 왕명으로 전선을 돌아보고, 아뢰기를 전선(戰船)과 구선(龜船)의 제도를 살펴보니 개조할(만들 때마다) 때마다 점차 길어져(길이가) 운용(運用)하기가 어렵고, 귀선에 있어서 당초 체제(體制)는 몽충(艨衝)과 같이 위에 두꺼운 판자를 덮어 시석(矢石, 화살과 돌)을 피했습니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구선의 제도는 당초 몽충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몽충도 위를 판자로 덮었다고 했으니 판자로 덮은 것인지 소가죽으로 덮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고, 거북선을 타고 수전 연습을 하는 자들은 그 배를 몽충(夢衝)에다 비유하였다.

앞장에서도 말하였듯이 고려사를 보면 김방경이 삼별초를 토벌하는 과정에 김방경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양동무(楊東茂)가 몽충으로 돌격하니 적이 달아나 위험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고 했다.

연산군 5년에 적이 밤을 타서 배로 건너 우리나라 땅으로 귀역(鬼蜮)같이 잠입하므로 순라(巡羅)와 척후(斥候)를 잘 할 방법이 없습니다. 만일 몽충(蒙衝) 같은 병선을 만들어서 각 진의 경비마다 서로 바라다볼 수 있는 거리에 띄워 둔다면 적이 건너오지 못할 것이니 몽충(夢衝)과 같은 베를 만들자고 하였다.

이때가 1499년이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93년 전의 일이다.

조정에서도 이러한 배가 절실히 요구됨을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장에서도 말했듯이 거북선은 몽충의 제도에서 본뜬 것이라 했는데, 연산군 5(3832(1499) 10, 23)에 몽충과 같은 배를 만들자고 한 것은 거북선을 만들자고 하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면 무리일지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지붕을 덮어서 시석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배를 만들자고 했던 것은 그러한 전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 확실한 것은 거북선을 타고 수전 연습을 하는 자들은 모두 그 배를 몽충에 비유했다고 했으니 거북선은 몽충에서 본뜬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거북선은 이순신이 창제한 것이라고들 하고 있다. 창제(創製) 사전적 의미는 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들거나 제정함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창제란 말을 썼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당초의 거북선이 몽충의 제도에서 본뜬 것임을 이순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어서 신이(박문수) 이순신의 기록을 보았더니(4084, 1751년에 하는 말) 구선의 좌우에 각각 6개의 총 쏘는 구멍을 내었는데 지금은 각각 여덟 개의 구멍을 내었으니 거북선이 종전에 비하여 지나치게 커진 것을 알 수가 있으므로 개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박문수의 말대로 당초(3925, 1592)에는 포에 수가 좌우 각 6개였는데 159년이 지난4084(1751)년에 수영을 돌아볼 때는 각각 8개 이었고, 이충무공전서를 집필할 때는 각각 10개씩이라고 했으니 당시의 거북선에 비해 거의 배가 커졌음을 알 수가 있다.

O, 광해군 7(3948, 1615) 임진왜란 후 23) 순찰사 권분은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크기는 알 수 없으나 전선을 대, , 소선으로 정하고 그 저판장을 각각 70, 55, 47,5~50척으로 정하자고 했다. 이 치수는 판옥선의 치수와 같다.

이 기록에서 임진왜란으로부터 불과 23년이 지나서도 그 크기를 알 수 없다고 했는데, 하물며 200여 년이 지난 후의 배가 모든 거북선의 절대적인 치수라고 한다면 이건 안 될 말이다.

이러한 기록들로 볼 때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크기가 이충무공전서상의 크기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분의 행록처럼, 최유해의 행장에도 포 구멍이 용 아가리에 하나, 거북꼬리에 하나, 좌우 현측에 각각 6개씩 모두 14개라고 기록되어 있고, 입으로 포를 쏘았다는 기록이 임진장초에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비변사에서는 옛날 임진년과 정유년 사이에 이순신(李舜臣)은 기이한 꾀를 내어 왜적을 막으면서 바다를 방위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하였습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순신이 왜적을 방어하던 법식에 따라 거북선을 만들고 기계를 갖출 일을 전라 좌수사와 우수사에게 명백하게 지시하여 보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니 빨리 순신의 거북선을 만들며 무기를 수리하고 사졸들을 훈련을 시켜 착실히 변란에 대비하기를, 한결같이 순신이 한 것과 같이하도록 각별히 말해 보내라고 하였던 것을 보면 당시의 배와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가 있다.

이충무공전서에는 용의 입으로 유황염초를 피워낸다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당시에는 총을 쏘았고, 이충무공전서가 집필될 당시는 유황염초를 피웠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용머리를 나무로 만들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용의 입속에 철판을 깔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염초를 피울 때 화재로부터 안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철판을 깔았다 하더라도 긴 시간 불을 피우면 열의 전도로 인하여 나무에 불이 붙게 되는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하였을까를 생각해보면 아니라고 생각한다.

포의 구멍 숫자만으로도 임진왜란 당시의 배와 200여 년 후의 배의 크기에 차이가 있다.

두 기록을 비교해보면 구선이 점점 커져 왔음을 알 수 있다.

O, 숙종 30(4037, 1704) 금위영(禁衛營)이 수군을 변통하는 절목에서 수군의 제도는 대전(大典)을 상고하여 보니, 대맹선(大猛船) 1척에 수군 80, 중맹선에는 60, 소맹선에는 30명이라 하였는데, 대맹선은 지금의 전선(戰船)이요, 중맹선은 지금의 귀선(龜船)이고, 소맹선은 지금의 방패선(防牌船)이니, 병선(兵船)의 종류입니다.

그런데, 선제(船制)가 차츰 커져서 큰 것은 좌우 노로(櫓櫨) 사이가 혹은 24간에 이르고 노 젖는 군사가 120명이 필요하니, 고제(古制, 옛 제도)80명의 노군(櫓軍)으로는 결코 운용할 수가 없고 귀선과 방패선의 노군 역시 그 수로 기준을 삼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도 배의 길이가 얼마나 많이 길어졌는지를 알 수가 있다.

노로가 24간이라고 한 것은 한쪽의 노가 12개라는 말일 것이다.

지금의 중맹선이 귀선이라고 했고 승선 인원이 60명이라고 했다.

이는 풍천유향의 수와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판옥선의 승선 인원이 125명이라고 한 것으로 보면 승선 인원의 수로만 본다면 그 크기가 판옥선의 절반 정도일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노 젓는 군사가 120명이나 되어 옛 제도의 80명으로는 배를 운용할 수가 없다고 했다.

이렇듯 배는 점점 커져서 운용하기조차 어려운 배를 만들었음을 알 수가 있다.

O, 선조 대에 와서는 전 현령 나대용의 상소 가운데 창선을 건조하여 쓸 만한지를 시험하게 한 상소를 겸 삼도통제사(兼三道統制使) 이운룡(李雲龍)이 치계하기를, 거북선[龜船]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射手)와 격군(格軍)의 숫자가 판옥선(板屋船)125명보다 적게 수용되지 않고 활을 쏘기에도 불편하니 각 영()에 한 척씩만을 배치하고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있다.

신이 늘 격군을 줄일 방도를 생각하다가 기해 년 간에 감독할 때, 판옥선도 아니고 거북선도 아닌 다른 모양의 배를 만들었는데 칼과 창을 빽빽이 꽂았으므로 이름을 창선이라 하였다.

격군 42명을 나누어 태우고 바다에 나아가 노를 젓게 하였더니 빠르기가 나는듯하였고 활쏘기의 편리함도 판옥선보다 나았다.

즉 거북선이 특히 활쏘기에 불편하였던 점이 많았던 것 같다. 크기도 다를 수 있겠지만 구조적인 면에서 거북선과는 다른 선형의 배를 만들어서 전투하기에도 편리하고 속도도 빠르게 하였을 것이다.

이 내용에서 나대용은 격군의 수를 줄일 방안을 연구하다가 창선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42명으로도 배가 나는 듯 빠르다고 했다.

노군의 수로만 본다면 중맹선과 소맹선의 중간 정도 되는 배가 창선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노군의 수를 줄이려 했던 것은 바닷가 사람들이 아니면 노를 잘 저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고심이 많았을 것이다.

바다에서의 행동은 섬사람들이 아니면 잘못하고 섬사람들의 수는 한정이 되어있기 때문에, 부족한 수군을 육지 사람들로 충당한다 하더라도 바다에서의 행동이 서툴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거북선도 전투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이 있었음을 말한 것이라고 본다.

O, 숙종대에 무신(武臣) 이지달(李枝達)이 말하기를,

거북선은 비록 역풍(逆風)을 만날지라도 능히 앞으로 나아가니, 방패선(防牌船)을 거북선으로 만들어서 선봉(先鋒)으로 삼으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방패선도 거북선이나 판옥선과 유사한 배였을 것으로 보이며, 거북선의 크기도 이와 유사했을 것으로 본다.

역풍을 만날지라도 능히 앞으로 나아간다고 했는데, 3925(1592). 2. 23일자 난중일기의 기록에는 역풍이 불어 더 나아갈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럼 84년이 지나는 동안에 역풍 항해를 할 수 있도록 선형이 바뀌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역풍에 항해를 한다는 것이 배가 작고 빨라서 노를 저어서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고, 돛으로의 역풍항해를 말한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좌수영의 구선에는 돛이 없다.

어찌 되었든 84년 전의 배와는 많이 다른 모습의 배였음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거북선이 역풍에도 갈 수 있으니 방패선을 거북선으로 만들어 선봉을 삼자고 했다.

그렇다면 방패선은 판옥선처럼 방패가 있는 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지붕만 덮으면 거북선이 되기 때문에 방패선을 거북선으로 만들어 선봉에 세우자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말한 금위영의 기록으로 볼 때(숙종30) 소맹선이 지금의 방패선이라 했고, 승선 인원은 30명이라고 했으니 나대용의 창선이나 거북선도, 그 크기가 거의 같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편집 : 하성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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