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문학은 번창할 수 있다
'The Korean liberal arts can thrive'

한국 인문학의 발원지를 찾아서1/'홍주' 편

'오늘의 홍성, 홍주는 한국 민족문학과 민중문화의 진정한 탄생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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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가 부활하고 있다. 홍주가 돌아오고 있다. 

한때 중국과의 교류가 막히고 경부선 개통으로 교통, 경제, 문화의 중심이 대전으로 넘어갔다가 교류가 재개되고 도청을 회복함으로써 호서가 홍성을 중심으로 다시 ‘그’ 이름을 되찾고 있다. 평택에서 서천까지 홍주목사가 관할하던 홍주, 넓은洪 고을州, 홍주는 내포의 매듭, 결절점이다-'내포'란, 복잡한 해안선과 큰 조차로 인해 내륙 깊숙하게 들어와 발달한 포구, 즉 ‘안개[內浦]’가 많이 분포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임병조, [지역정체성과 제도화] 2010. 한울)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 내포지역은 가야산의 주변에 있는 홍성, 서산, 당진, 예산 등 10여 개 고을을 말한다-이 홍주를 중심으로 황해시대가 도래하먼서-'황해'라는 영화가 나오고, [황해문화]라는 계간지도 발행되고 있다-서해안 고속화도로가 개통되고, 평택-당진항이 국제무역항으로 ‘그’ 명성을 되찾고, 서해복선고속철도의 종착역이 홍성역이 된 것처럼 홍성이 다시 신-내포 문화의 허브로 ‘그' 화려한 날갯짓을 하고 있다.


나는 벌써 ‘그’를 세 번이나 썼다. 여기서 ‘그’는 화려했던 옛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기호적 표지다. 다시말해 ‘그’는 홍성이 한때 화려했던 호서문화의 주역이었음을 환기하는 기호다. 마치 르네상스가 ‘그’ 찬란했던 그리스 문명의 재생을 환기하는 기호인 것처럼, 오늘 홍성-홍성洪城은 일제가 홍주 일대의 저항의 기운을 꺾어놓기 위하여 임의대로 홍주洪州와 결성結城을 합쳐 만든 자의적 명칭이라고 한다. 이 말은 곧 홍주 못지않게 결성향교로 유명한 ‘결성’ 또한 홍주문화의 중추 역할을 한 곳임을 암시한다. 이곳, 결성 출신인 한용운은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에서 "내 고향은 충청도 홍주였다. 지금은 세월이 변하여 그 이름조차 충청남도 홍성으로 되었다.“라고 홍성의 본 이름이 홍주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홍성이 하나의 지역 이상으로, 즉 한국의 문화와 사상을 대변하는, 다시 말해 홍주가 내포, 호서지역은 물론 한국의 문화와 사상의 유전자the genes of Korean culture and thought를 대변하기 위해서는 상징성이 요구된다. 상징은 ‘고유의 특성이나 이상적 신념을 대변하는 어떤 사람이나 중요한 물건someone or something that represents a quality or idea’을 가리킨다. 우리는 민족시인 만해 한용운을 그러한 사람(someone)으로 본다.

그렇다면 한국의 문화와 사상을 대변할만한 중요한 물건(something)은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무슨 똥마려운 개새끼처럼 여기저기 쏘다니곤 했다. 내가 홍주의 시인 이정록과의 인연으로 <결성향교>에서 '논어미학강의'를 하게 된 것을 계기로 홍주를 한국의 문화와 사상의 유전자를 간직한 상징적 공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을 때, 그러나 그물의 ‘벼리’처럼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문화적 상징이 없어 무척 애를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것이 없었다면 나의 글은 허구에 그치는 것이 아닌가. 그래 한원진을 내포지역의 유교(성리학)의 ‘대장부’를 대표한 학자로, 한용운을 대승불교의 ‘보살’을 대변하는 사상가로, 김대건을 기독교(천주교)를 대변하는 ‘순교자’로 볼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이상적 신념을 대변하는 아이디얼한 '그것'이 없고서 홍주를 한국의 문화와 사상을 대변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나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기호학에서는 ‘그것을 앎으로써 다른 모든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을 기호sign라 한다. 다시말해 모든 이들의 아우성을 끝장내고 길들이게 하는 어떤 위대한 일반화, 쉽게 말해서 하나의 열쇠로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만능키’ 같은 개념도구, 이것을 찾아 나는 나를 한동안 다스려야 했다. 그러다가 나는 어둑서니 같이 눈이 어두워 등잔밑을 헤메이다가 최근 이규희의 안내를 받은 지 오랜 세월이 지나 홍성 출신의 전만성 화백의 안내를 받아 다시 홍주를 밟게 되었다. 그리하여 홍주역에 내려 다시 그 ‘조양문’을 통과하는 순간, 나는 조양문의 간판을 다시 보았다. 아침朝 볕陽 문門, 조양문은 ‘아침볕이 드는 문’이란 뜻이다. 사실 조양문은 홍주 읍성의 동문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매일같이 홍주인들이 자고 일어나 오며가며 보고 다니는 이 조양문에서 철벽처럼 가로막혔던 의문이 풀려나오는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홍주 읍성의 정문으로 조양문은 단순하지 않았다. 지방의 읍성치고는 조양문은 우람하고 당차게 거기 서 있었다. 그런데 하필 왜 사람들은 조양문이라 정했을까. 조양은 우리말로 ‘아사달’이다. 조양은 곧 아침에 해가 들어 볕이 쪼이는 곳으로 먼 옛날부터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한자말이다. 이는 결코 단순한 표현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말해 조양문은 홍주의 얼과 혼이 각인된, 중요한 어떤 것something이자 상징적 기호로, 임병조의 개념에 따르먼 바로 이것이야말로 ‘상징적 형상’이었다.

 

 

그럼 도대체 조양이 뭘 상징한다는 것인가. 잘 알다시피 [삼국유사] '기이'에 따르먼, 고조선은 아사달에 도읍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고조선의 후예가 세운 나라가 고구려이고, 이 고구려의 자손(주몽의 셋째아들 온조)이 세운 나라가 백제다. 홍주는 한성, 공주, 부여와 함께 역사적으로 마한땅이자 백제의 중심지였다. 한성, 공주, 부여가 지배문화가 발달한 도시였다먼, 홍주는 서민문화가 발달한 고장이었다. 이런 홍주는 내포의 특성상 물의 혜택을 입은 풍요의 땅이었다. 그야말로 살기 좋은 땅으로 천수만과 아산만을 아우른 내포 땅은 경제적 배경을 바탕으로 자부심이 강한 곳이었음을 알게 한다. 이런 사실은 왜 이곳에 오랑캐(청, 왜)에 대한 강한 적대감이 남아 있는지(한원진의 북벌론과 근대의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근간이 되는 호론), 왜 이곳이 저 신라의 교종(불국사)보다는 선종(수덕사)이 강한 영향을 지니고 있는지. 왜 이곳이 이보다는 기를 중시하는, 다시말해 남인보다는 서인(노론)이 득세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하나의 상징적 열쇠를 제공한다.

그러나 풍요의 고장, 홍주가 또한 수탈과 침략의 땅이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수탈과 침략의 역사를 따라 읽다보먼 거기서 우리는 저 백제와일본의 연합군이 백강에서 당과 싸우고 나당연합군과 백제군이 아산만에서 싸웠던 패배를 알게되고, 저 왕건과 싸웠던 견훤의 패배를 보게 되며, 최영의 요동정벌의 좌절을 알게 되고, 일제초기 홍주성 전투를, 그리고 우리의 주권을 놓고 벌인 청일전쟁의 포성을 이곳 내포의 입구, 아산만에서 또한 듣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풍요의 땅에서 억압을 마주한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청사)에 소개된 1943년의 조선통계연보를 보먼, 당시 도별 빈곤 순위가 나와 있다. 그중에서 지대 부분을 보자.

전북2. 경기1. 충북7. 경남4. 전남6.경북3. 강원5. 충남8

잘 알다시피, 지대란 남의 토지를 빌린 사람이 빌려준 자에게 무는 세를 말한다. 그런데 충남이 가장 지대가 높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런 사실은 왜 해방이후 “충청남도에서 강력한 인민위원회가 존재한 곳은 외진 지역에 위치한 군들-충남의 서산, 당진, 예산, 홍성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는 또 그대로 일제가 지주계급을 그들의 식민통치 지지세력으로 삼아 지주-소작관계를 온존시켜왔음을 토대로 이전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먼 왜 우리는 이 지역에서 천주교와 동학이 자생적으로 일어나고 수난과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하여 왜 민판서로 대변되는 일제시대 조선최고의 농민문학인 이기영의 [고향]과 심훈의 [상록수]-나는 몇 해 전 친구 김두환의 덜덜거리는 트럭을 일당 10만원에 빌리기로 하고 충남 내포지역의 이곳 저곳을 답사차 다녀 온 적이 있다. 거기에 이 시대의 상처가,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피딱지처럼 응고되어 잊혀져 가고 있는 참상으로서의 슬븐 역사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잘 알다시피, 충청도는 양반고을이다. 그러나 정확히 봐야 한다. 이거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양반고을 충청도 내포의 가장 노른자위는 아산, 예산, 당진, 홍성, 면천을 배경으로 하는 예당평야다. 그중에 면천은 예당평야의 배꼽이다. 이 면천지방의 현감으로 연암 박지원이 부임하고 쓴 저술이 '과농소초'이고, '한민명전의'라는 논문이다. 모두 농사와 관련된 글이다. 이 중에 '한민명전의'는 양반들이 그만 좀 쳐먹게 해야 한다는, 겸병을 제한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만큼 한양 노론들의 토지 겸병이 심각했음을 말해준다. 이것은 사실 온건한 개혁론이다. 그러나 노론이 권력의 칼자루를 쥔 나라에서 그들에게 스스로 자기 칼로 목숨을 끊으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가 너무도 불가능한 일이다.

백성들은 동학 민란에 동참하기도 하다 결국 실패하고 천주교에 눈을 돌린다. 거기서 평등의, 구원의 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니 한 집 건너 모두 천주교 신자였던 곳, 이것은 연암-박지원은 정조의 신임으로 내포 지역의 천주교 문제를 해결하라는 특임전권대사 같은 자격으로 임명되었음을 '과정록'에서 볼 수 있다- 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권력의 문제였다. 그 와중에 그래도 천주교에 우호적이었고 백성을 아꼈던 정조가 갑자기 죽자 세상은 그야말로 사악한 노론천지가 되고, 그 서슬퍼런 권력의 칼에 수천의 천주교 신자가 한양의 절두산과 내포의 해미 읍성으로 끌려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종교박해와 피의 수난을 당하였다. 

종교의 형식을 빌린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관계의 관념적 형태의 승화물이라고 마르크스 형님이 말했다. 하여 나는 왜 풍요의 땅에서 가장 억압과 수난이 심했는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왜 이데올로기 형태로서의 유교가 필요했는지, 왜 이를 더욱 강화한 남당 한원진의 기호철학이 이곳 내포에 그 자생적 뿌리를 두고 있는지, 이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이곳 당진에서 왜 한국 최초의 김대건 신부가 나오게 되었는지, 아! 나는 달달거리는 트럭을 타고 저 삽교천을 중심으로 끝도없이 펼쳐진 예당평야를 지나면서 생각해 보았다 풍요는 곧 억압이 아니냐고...

-끝도 없이 이어진 황금들녁, 예당평야, 그러나 이것은 그들 농사짓는 사람들의 땅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기름지고 풍요한 땅에서 아무 죄도 없는 수많은 백성들이 도륙당해야 했는지, 왜 이렇게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에서 조선 최고의 농민소설인 이기영(아산)의 '고향'과 심훈(당진)의 '상록수'가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이와 관련하여 나는 또한 '고향'과 '상록수'- '상록수'는 그동안 잘못 읽혀져 왔다 거기, 민족어의 수난과 관련된 조선-일제의 민족모순이 채영신을 중심으로 한 희생정신이 하나의 날줄로 얽어져 있다면, 박동혁을 중심으로 지주-소작 간의 물러설 수 없는 계급모순 또 하나의 씨줄로 엮어져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교과서도 그렇고 평론가들도 일색으로 영채의 희생정신만 강조하고 있으니, 요즘말로 '국뽕'이 이것 아닌가- 모두 지주와 소작 간의 계급모순이, 겸병의 폐해에 따른 갈등이 왜 가장 중요한 이슈로 다뤄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러나 나는 또한 여기 겸병의 폐해로 인해 수천의 동학,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 내포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갔는데 그 누구 하나 이를 소설이나 그 무슨 대중적 이야기 방식으로 다룬 서사물을 본 적이 없다-가, 이문구와 김성동이 이곳 내포에서 나왔는지를 비로소 재구할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이기영(아산)과 심훈(당진)은 카프 출신이다. 조선 민족의 해방과 인민의 자유를 위해 붓을 들었던 당대 최고의 문사들이었다. 김성동이 집안의 불운으로 승려가 되고 소설가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빨갱이의 자식'은 3불(공무원, 장교, 고시)의 덫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해방후 전국농민동맹충남지부대표로서 역할을 하다 서북청년단에 검거, 6.25전쟁 당시에 총살을 당했다. 소설가 이문구 또한 기구한 인생의 소유자로 그 또한 연좌제의 피해자였다. 아버지가 보령, 서천, 청양군의 지하당의 창설 책임자로 소신껏 살다가 처형당한 자로, 그가 어떤 자였는지는 그의 자서전에 해당하는 '유자소전' 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부친의 제사를 모실 때마다 지방을 썼다. 그러나 현고학생운운하는 통속적인 지방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

반드시 이렇게 썼다

현고 남조선노동당 홍성군당위원장 신위

이런 사실들은  일제시기는 무론 해방 이후 봉건주의 청산으로서의 토지문제가 가장 중요한 국시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곳에서 천주교와 동학은, 마르크시즘이 성행한 것이 우연이 아니다. 이곳에서 조선공산당의 영수인 박헌영이 나온 게 또한 우연-이곳, 예당평야의 쌀을 수탈할 목적으로 만든 장항선이 지나는게 우연이 아니고, 또한 그곳에 식민 관리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만든 예산농전(지금은 국립 공주대학교의 일부가 되었지만)이 또한 우연이 아니다 이들 이념이 모두 사회적 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또 보자. 즉 이곳, 기름진 황금들녁의 예당평야를 끼고 도는 홍주 지역은 한양 노론들의 땅으로 겸병이 심하였던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이자 모순의 똥구덩이였다. 다시 말해, 홍주는 풍요의 땅이자 억압을 받은 곳이다. 이런 사실은 이곳 홍주를 중심으로 한 내포지역이 민족자주세력의 얼과 혼이 깃든 곳으로, 오늘에도 여전히 한반도 주인으로서, 그러나 "대륙과 해양세력의 격전장"(강만길)에서 살아가야 할  오늘 우리의 한국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재구해야할 필자에게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홍주의 정신은 결코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홍주는 그 문화적 자부심과 함께 역사의 수난과 상처가 고스란히 배여 있는 고장이다. 외세의존세력에 저항한 오랜 역사의 고장이자 불평등이라는 계급모순에 맞서 싸운 지역으로, 자주와 평등이라는 근대적 이념의 모태로서의 홍주, 조양문에 그 상징적 의미가 아로새겨져 있다.

난 그렇게 본다.

 

객원편집위원 : 김상천

 

김상천 객원편집위원  critick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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