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른 생각들로 순서도 정오(正誤)도 없다. 오호(惡好)와 시비(是非)를 논할 수는 있지만 대상은 아니다. 중복도 있으므로 고려하면 좋겠다. 여러 차례에 걸쳐 싣는다.
1.
기후위기와 환경오염은 인간 욕망의 산물이다. 욕망에는 유형과 무형이 있다. 주된 문제를 일으키는 욕망은 소유욕의 근본인 물질이다. 분에 넘치는 소유와 과소비가 만병의 근원이다. 이는 세계 곳곳에서 이상기온으로 나타나고 있고, 지구환경이 열병으로 신음한다. 살려달라는 아우성이다. 그러나 주된 범인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은 눈과 귀를 닫는다. 알기는 알 텐데, 모른 체 하거나 책임이 없다는 태도다. 이 때문에 열대, 온대, 한대의 구분도 모호해지고 있다. 온대라는 우리 지역의 여름도 열대를 방불케 한다. 도심은 이미 열섬이 되었고, 일상적인 외출조차 주저하게 되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2.
“이 뜨거운 열기를 고도화(고도화는 어폐가 있다) 된 ESS(Energy Storage System)에 저장하여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장소에서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이 또한 부작용을 낳겠지만. 과학기술 발전은 언제나 결핍과 필요 및 공상이 그 시발이므로, 언젠가는 가능하리라 본다.
그러나 질문은 여기를 지나 그다음이다.
우리가 자부하는 과학기술이, 과연 세상 만물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목적과 목표도 모호한 그저 욕망과 실적을 위한 것에 불과한가?
우리가 진정 바라는 삶은 무엇이고, 소수의 인간은 과학기술과 현대문명을 이용해 우리를 어디로,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가려 하는가.
한 사람의 인간은 대체로 ‘전체’보다 ‘지금, 이 순간, 개체인 자신’을 우선한다.
그래서 기후 위기의 책임을 정부나 기업, 제도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살펴보면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책임자는 진정 누구인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라는.
3.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보다 미시적인 편리와 즉각적인 효용성을 우선시한다. 지구환경이라는 거시적인 안목엔 문을 닫는다. 자신에게 당장 큰 위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어컨을 켜는 대신 더위를 견디고,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일회용 플라스틱 대신 재활용 용기를 찾는 사람은 좀처럼 볼 수 없다.
이처럼 이익과 편리함을 우선시하는 습관은 기후 위기의 뿌리와 맞닿아 있지 않는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성장을 중시하는 국가 정책, 그리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대중은,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구조이므로, 기후 위기와 환경오염을 가중하고 있다.
문제는, 이 구조가 오랜 시간 걸쳐 오면서 ‘정상과 당연’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늘 높고 넓은 것을 꿈꾸는가.
현대사회는 왜 모든 것을 ‘높이, 넓이’ 기준으로 평가하고, 이게 성공적인 삶의 잣대가 되었는가.
성적, 지위, 소득, 명예, 학력, 자산, 건물, 심지어 SNS 팔로워 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더 높고 더 많은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가.
하지만 정작 불덩이가 되어버린 지구 고온과 무더위에는 무관심한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인간 자신들인데,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는가.
이 아이러니는 우리 문명의 뒤틀린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4.
그럼, 높고 넓은 것에 대한 열망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어릴 때부터 경쟁을 통해 살아남는 법을 배우는 일상생활, 남보다 앞서야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가정과 제도 교육, 외형을 중시하는 사회풍토가 그런 사고방식을 키워 오지 않았을까?
높고 넓고 많은 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연과 타인의 고통은 배제되기 십상이다.
그 결과, 우리는 오늘도 지구에 더 많은 열을 가하면서, 그 효과로 더 높고 더 넓은 어딘가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높고 빠르고 많을수록 더 좋다. 그럴수록 지구 위기와 환경오염은 심각해지는데 말이다.
이제는 이런 삶의 방식을 끝내야 한다. 삶의 기준과 가치를 바꿔야 한다. 가정과 학교에서부터 솔선해야 한다. 삶의 가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
지금의 위기는 단순히 기후나 환경의 문제만이 아니다. 만 생명의 문제인 것이다.
또한 우리가 어떤 삶을 ‘좋은 삶, 바람직한 삶’이라 여기는가에 대한 성찰의 문제이기도 하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빠르게'가 아니라
적절하게, 균형 있게, 조화롭게 공존하며 살아가는 삶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5.
우리는 성장이 필요하지만, 그보다 지속성이 더 절실하다. 편리함도 좋지만, 공존성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나 양쪽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는 없다. 어느 시점에서는 성장과 편리를 내려놓고, 부족과 불편을 감수하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하지 않고는, 사회도 국가도 변하지 않는다. 그 연결고리를 끊지 못한다면, 기후 위기 극복과 생태환경조성은 영구미제로 남을 것이다.
생명을 위한 발전과 성장, 그리고 책임 있는 성찰을 통해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과학기술을 통제하고 조절해야 한다. 이대로 두었다간 무한 질주하는 과학기술 발전과 경제성장 정책을 막을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맞을 수도 있다.
과학기술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누구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가가 문제이다.
지구의 열기를 식히고 환경오염을 개선할 해답은, 거창한 구호나 첨단 기계 기구가 아니라, 삶의 기준과 가치를 다시 세우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6.
개인의 실천이 아무 의미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는 그릇된 오판으로 가장 심각한 원인과 책임을 외면하는 행태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안일한 열외 의식이 모여 지금의 위기를 초래하였다면, 반대로 “나 혼자부터”라는 실천적 행동은 이 위기 탈출의 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사는 하나 즉, 극히 미약함에서 그 시종이 결정된다.
기후 위기는 곧 존재의 위기다. 인간뿐 아니라 만물의 생명이 달려 있다.
이제는 과학기술 발전과 경제성장보다 성찰을, 속도보다 방향을, 편리보다 생명을 중시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편집: 김태평 객원편집위원. 조형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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