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순수문학·민족 문학으로 나누고, 편을 가르는 게 우습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사랑이 어찌 밥뿐이고, 눈물뿐이겠습니까? 눈물과 밥이 뒤엉킨 복잡다단한 감정인 걸 말입니다. 스펙트럼이 다양할수록 문학이 건강해진다는 걸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2025년 9월 27일(토) 김남주 시인 생가에서 김남주 문학제가 있었습니다. 해남 살아보기를 막 시작했던 작년 8월처럼 김남주 시인의 흉상에 걸린 거미줄을 깨끗이 닦아냈습니다. 김남주 시인과는 1992년에 인연을 맺었습니다. 세 번의 수술 뒤에 실명을 선고받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고민할 때였지요. 그때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에서 시민문학강좌를 연다는 기사를 보고, 수강 신청을 했습니다. 그때 교장이 김남주 시인이었지요. 강좌가 끝날 무렵에 후속 모임을 만들어서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1993년 시월로 기억합니다. 김남주 시인에게 주례를 부탁했는데 몸이 편찮으셔서 어렵다고 했지요. 그때만 해도 췌장암으로 치료받는 줄 몰랐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를 본 건 병실에서였습니다. 황달로 눈이 노랗고, 복수에 물이 차서 호스로 뽑아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을 떠나보냈습니다. 1992년 전에도 선생님을 잠깐 뵌 적이 있기는 합니다. 손바닥만 한 민가협사무실에서였지요. 누군가 의자에 앉아서 신문을 있는 대로 펼쳐놓고 보고 있었습니다. ‘누가 이렇게 무례하게?’ 생각했는데 그가 바로 김남주 시인이었습니다. 웃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웃을 땐 유난히 이가 하얗던 김남주 시인. 해남에 김남주 문학관이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그 생각은 여전합니다 아무튼 김남주 문학제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작가들이 자신의 책을 가져와서 사인회를 했고, 마당 밖에는 배추밭을 배경으로 후배들의 헌정 시(詩)로 시화전이 열렸습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마당에서 어린 김남주가 뛰어놀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전사의 모습을 살짝 걷어내면 더없이 맑고, 개구쟁이였을 시인.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생가의 마당과 방에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문학제는 풍물패의 공연과 살풀이춤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김남주를 추모하는 후배 시인들의 시 낭송과 시 노래가 있었고,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강형철 시인의 인사말도 있었습니다. 강형철이라는 소개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기억 속의 강형철 시인은 마르고, 개그맨처럼 재미있던 분이었는데 33년의 세월이 풍채 좋은 어르신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시(詩) 노래’라는 게 생소했는데 인도에는 대학에 ‘타고르 시 노래학과’가 있으며 그의 시가 4천 5백여 편이나 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능숙하게 문학제를 이끌고, 노래도 참 잘하는 에루화헌의 박양희 선생도 그곳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끝으로 ‘바위섬’과 ‘직녀에게’로 유명한 가수 김원중의 축하 무대가 있었습니다.
김남주 시인의 동생인 김덕종 선생님의 인사말과 단체 사진으로 문학제가 마무리되었습니다. 해남을 떠나기 전에 김남주 시인의 문학제에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편집 : 오성근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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