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만의 꿈을 계승한 강호제 박사의 비전

 

한반도 남북과학기술공동체 건설을 상징하는 이미지 (출처: 김반아 - Gemini Imagen)
한반도 남북과학기술공동체 건설을 상징하는 이미지 (출처: 김반아 - Gemini Imagen)

최근 강호제 박사 (북한 과학기술사 및 과학기술정책을 전공한 과학기술 전문가)가 남북 교류협력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으며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강 박사는 남북 관계의 경색을 돌파하기 위해 정치적·이념적 접근 대신 과학기술 역량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운명공동체' 건설 비전을 제시했다. 이는 일제강점기 이종만 선생이 품었던 민족의 기술 자립 염원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의미 있는 시도로 평가된다.

강호제 박사는 북한의 과학기술 역량을 단순히 남한의 자본과 결합하는 저가 노동력 중심의 '식민지적 인식' 협력 모델을 비판하고, 상호 호혜적인 '고부가가치 협력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북한은 1950년대 말부터 컴퓨터 개발을 시작했으며, 최근에는 '전민과학기술인재화' 목표 아래 IT 및 AI 분야에서 상당한 수준의 인력을 확보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남한 사회는 이러한 북한의 현실적인 역량에 대한 '무지'와 '가상 NK' 연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다.

새로운 모델의 핵심은 북한의 첨단 과학기술 인력(IT, AI)을 핵심 자원으로 인정하고, 이를 남한의 자본력 및 마케팅 능력과 수평적이고 대등한 방식으로 결합하는 산·학·연 기반의 협력이다.

 '소브린 AI(자주권 AI)' 공동 연구 및 교육 분야는 UN 제재의 대상이 아니므로, 현재의 정치적 경색 국면을 넘어서는 전략적 의제가 될 수 있다고 강 박사는 강조했다. 이는 북한이 과거부터 일관되게 요구해 온 '과학기술 협력'의 맥락과도 일치한다.

강 박사는 완벽한 비핵화 검증이 과학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현실론을 바탕으로, 북한의 핵무력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평화 전략으로 '스핀오프' 전략을 촉구했다.

핵 개발에 집중되었던 군사 기술과 인력, 자원을 민간 부문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핵심이다. 군수 인력을 핸드폰 개발이나 공장 자동화 등 민수 분야로 돌리는 스핀오프가 실질적인 긴장 완화이자 평화적 공존 구조를 만드는 길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기술 교류와 협력 경험은 남북한이 분리할 수 없는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을 강화하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실질적인 기반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종만 선생의 '기술 자립' 염원을 현대적으로 계승

강호제 박사가 제시하는 과학기술 공동체 비전은 일제강점기 이종만 선생의 민족 과학기술 자립 염원과 깊은 연결성을 가진다.

이종만 선생은 1944년 평양에 대동공업전문학교(대동공전)를 설립하며 민족의 과학기술 자립과 부강을 염원했다. 이는 단순한 학교 설립을 넘어, 조선인이 스스로 근대적인 공업 기술과 과학 지식을 습득하여 민족 산업을 발전시키려는 뚜렷한 목표를 담고 있었다.

선생은 '일하는 사람이 다 같이 잘사는' 대동평등 사회 구현을 목표로, 영평금광 매각 대금 중 50만 원을 대동농촌사 설립에 출연하여 농민 복지 및 경제적 자립을 지원했다. 이는 식민 체제하의 압박 속에서도 민족의 미래 역량을 확보하려는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투자였다. 리승기 박사에 대한 후원도 이러한 '민족 자립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이종만 선생이 꿈꿨던 분열되지 않은 민족 전체의 주체적인 과학기술 역량 확보라는 큰 뜻은 오늘날 강 박사 등이 주장하는 상호 호혜적인 과학기술 공동체 구축을 통해 비로소 온전히 실현될 미래적 과제임을 시사한다.

이종만 선생이 리승기 박사에게 제공한 후원은 단순한 학비 지원을 넘어, 조선의 미래 산업 역량을 위한 전략적 투자였다. 이는 선생의 광범위한 민족 자립 프로젝트 중 지성 육성 부문에 해당했다. 리승기 박사가 1939년 교토 제국대학에서 시작한 폴리비닐알코올 기반 합성 섬유 연구는 당시 나일론 발명으로 경쟁이 치열했던 최첨단 분야였다. 이러한 첨단 화학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고가의 화학 재료, 특수 장비 사용료 등 일반 학비와는 차원이 다른 막대한 '연구 자금이 필수적이었다. 이종만 선생의 후원은 이러한 고비용의 연구를 장기간 뒷받침하는 '고위험 과학 벤처 투자'와 유사했으며, 이는 선생의 막대한 금광 자본과 국제적 재정 능력 덕분에 가능했다.

후원이 이루어진 1939년은 중일전쟁으로 일본이 국가 총동원 체제를 강화하며 연구 자원과 인력이 전쟁 목적으로 재편되던 시기였다. 전시 상황에서 최고 연구 기관이라도 첨단 연구를 위한 재료 및 설비 확보가 극도로 어려웠다. 리승기 박사가 비날론 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단기간에 공업화 가능성까지 입증한 결정적 배경은, 이종만 선생의 외부 자본 덕분에 희소해진 연구 자원과 안정적인 환경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종만 선생은 자신의 자본을 농민 복지(대동농촌사)와 더불어 최고 지성(리승기)의 첨단 기술 연구에 투입함으로써, 식민지 시대에 축적된 부를 이용하여 미래 산업의 핵심 기술을 조선인 스스로 확보하려는 장기적인 민족주의적 비전을 구체적으로 실천했다. 이 후원 덕분에 탄생한 비날론 기술은 해방 후 남북한 모두에게*'민족 기술'로 인식되었고, 북한에서는 '주체 경제'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는 역사적 결과를 낳았다.

강호제 박사 : 서울대학교에서 물리학 학사 및 과학사 및 과학철학 박사 학위 취득 /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 연구교수, 북한과학기술연구센터 소장 등을 역임. 북한의 과학기술과 관련된 여러 저술 활동. 

 

편집: 김반아 객원편집위원.  조형식 편집위원

김반아 객원편집위원  vanak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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