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

원교 이광사는 조선 정종대왕의 열째아들인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10세손으로 1705년 8월 28일, 부친 각리 이진검(角里李眞儉)과 모친 파평 윤씨 지상의 따님 사이의 5남1녀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부친은 1721년 겨울 노론 이이명을 탄핵한 일로 밀양에 유배되었다가 유사(宥赦)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평안도관찰사로, 1724년2월 모친의 상을 치루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예조판서가 되었다.

노론의 지나친 집권을 우려했던 영조는 소론세력을 끌어들이는 정미환국(丁未換局)을 단행하여 소론이 조정에 들어서자 백부는 근지로 이적(移謫)되었고 7월에 부친이 유사(宥赦)되었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를 비롯한 소론의 잔당이 남인 일부와 합세하여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다 무신난(戊申亂)이 일어났다.

당시 원교는 가족이 머물러있던 강화로 피신하여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난도 평정되었으나 조정의 공론이 노론 쪽으로 기울어졌고, 소론의 잔여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과거 신임사화의 주동인물에 대한 재 국문이 시작되어 1730년 4월 백부가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5월에 장폐(杖斃)되었다.

이처럼 집안이 몰락함에 따라 원교 형제들은, 큰형 무방제(無O齊) 이광태(李匡泰)부부를 부모처럼 여기고 두문단교(杜門斷交) 한 채 형제들과 내왕하면서 학문으로 즐거움을 삼고 수련에 힘썼다.

1731년5월 부인이 여 쌍둥이를 출산하다 난산으로 사망하고 모친, 부친, 백부의 연이은 사망으로 허탈감에 빠져있었다.

실의에서 벗어나려고 평소에 존경하던 하곡 정제두를 찾아가 실학(實學)의 요의(要義)를 듣게 되면서 삶의 의미를 되찾아갔다.

1733년4월 금성현(나주)의 모산(茅山)에서 문화 유씨 종환(宗桓)의 따님과 재혼하여 새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그해 9월에는 고양 선영의 선고선비(先考先O)의 묘를 장단 송남의 거창지에 개장(改葬)하였다.

1734년 봄 원교는 처가에서 서울로 돌아왔고 가을에는 고양 삼휴리에 불시출거(出居)하였다가 늦가을에 서울의 돈의문 밖에 세 들어 살았다.

1736년 아들 이긍익(李肯翊)이 태어날 즈음 장모님을 서울로 모셔와 동거하였으며 오직 학문에만 전염하였다.

영조31년(1755) 2월에 이른바 나주 벽서(괴문서, 익명으로 쓴 글)사건으로 백부 이진유(李眞儒)가 처벌을 받을 때 이에 연좌되어 의령에 유배되었으나 1762년 7월25일 진도로 유배되어 영조38년 9월5일에 강진현 신지도로 배소(죄인이 귀양살이 하던 곳)를 옮겨 신지면 금곡리 황치곤(현재 정대준 씨 댁)댁에서 유배 23년만인 1777년에 한 많은 일생을 이곳 신지도에서 마쳤다. 원교는 신지도로 옮긴 후 수북(壽北)이라 자칭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학문과 글씨를 가르쳤다. 그중 후 학인으로는 완도군 군외면 불목리 석근(錫近), 자는 공여(公厲)호는 해음(海陰)이 원교의 문화생으로 필법을 익혀 호남의 명필이란 칭호를 받았다. 또한 신지도의 선비들과도 친교를 나누었으며, 그 중에서도 황의정승의 12대손인 황치곤(黃致坤)과 절친하였으며 그의 두 아들인 황성원(黃聖元), 황성길(黃聖吉)도 원교의 제자였다.   원교는 이러한 유배 생활 중에서도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염하였으며, 원교체라고도 하는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서체를 완성 하였다. 이로서 조선의 서예 중흥에 공헌하였으며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고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작품전시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견문을 넓히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서예이론서인 원교서결(圓嶠書訣), 원교집선(圓嶠集選) 등이 있다.

이렇게 23년간의 유배생활 중 신지도 금곡리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지금도 금곡리에는 당시에 집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분이 남긴 글씨 중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 대흥사 대웅보전현판인데 이를두고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 가다 대흥사에 들러 초의를 만났다.

이때 현판을 보고 비판하면서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이광사인데그가 쓴 대웅보전의 현판을 버젓이 걸어 놓을 수 있느냐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추사의 글씨로 바꾸어 달았다.

추사가 7년3개월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초의에게 하는 말이 "옛날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지금 어디 있는가? 있거든 내 글씨를 떼고 그것을 다시 달아주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네."고 한 일이 있었다. 그렇게 유명했던 추사가 자기의 글씨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어른이 있었기에 오늘날 동국진체라는 하나의 서체가 전해지고 있다.

원교 이광사는 소론 강경파 이진검의 아들인데 영조31년(1755) 나주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위기에 처한다. 겨우 유배형으로 목숨은 건졌으나 뒤늦게 부인의 자결소식을 듣고 지은 '부인을 애도함'이란 시가 있다.

 

내가 비록 죽어 뼈가 재가 될지라도

이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내가 살아 백번을 윤회한대도

이한은 정녕 살아있으리

내한이 이와 같으니

당신한도 정녕 이러하리라

두 한이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만날 인연 있으리

 

아래의 시는 이광사가 신지도에 도착하여 지은 시다.

영회(詠懷)--유배지의 감회를 읊다

평생불속지(平生不俗志): 평생 속된 뜻 없이 살았거늘

노대위류인(老大爲流人): 늙어서 유배객이 되었다네

유몽심래도(有夢尋來道): 꿈속에 내도 재를 찾기도(친구 김광수의 서실)

미방망북진(迷方望北辰): 길 잃고 북극성을 바라보기도하였네

만형자득의(萬形自得意): 만 가지가 스스로 뜻을 얻는듯하고

고객여이신(孤客輿怡神): 외로운 객이 마음을 기쁘게도 하였네

점애문장세(漸愛文章細): 점점 문장이 지극한 것을 사랑하는데

유수명익진(唯愁命益嗔): 운명 사나워지는 것만 근심할 뿐이네.

 

아래의 시는 다산시문집4권 시  탐진풍속노래 [耽津村謠]에 실려 있는 시인데 여기에서도 이광사가 후학을 양성하였음이 보인다.

누리령 잿마루에 바위가 우뚝한데 / 樓犁嶺上石漸漸

길손이 눈물 뿌려 사시사철 젖어 있다 / 長得行人淚灑沾

월남을 향하여 월출산을 보지 마소 / 莫向月南瞻月出

봉마다 모두가 도봉산 모양이라네 / 峯峯都似道峯尖

(월출산은 강진(康津)에 있고, 도봉산은 양주(楊州)에 있음.)

동백나무 잎들은 얼어도 무성하고 / 山茶接葉泠童童

눈 속에 꽃이 피면 붉기가 학 이마 같아 / 雪裏花開鶴頂紅

갑인년 어느 날에 소금비가 내린 후로 / 一自甲寅鹽雨後

유하나무 감귤나무도 모두 말라 없어졌다네 / 朱欒黃柚盡枯叢

바닷가 왕대나무 키가 커서 백 자러니 / 海岸篔簹百尺高

지금은 낚싯배 상앗대로도 못 쓴다네 / 如今不中釣船篙

정원지기가 날마다 새 대를 가꾸어서 / 園丁日日培新笋

죽력 내내 권문세가에 바치기 때문이야 / 留作朱門竹瀝膏

성벽은 다 무너져 언덕바지 설렁한데 / 崩城敗壁枕寒丘

해가 지면 징소리만 주춧돌을 울린다네 / 鐃吹黃昏古礎頭

여러 섬에 나무들을 해마다 베어만 내지 / 諸島年年空斫木

청조루를 중건하는 사람은 통 없다네 / 無人重建聽潮樓

무논에 바람 불면 보리물결 장관이고 / 水田風起麥波長

보리타작 할 무렵에 모를 게다 꽂는다 / 麥上場時稻揷秧

배추는 눈 속에서 새로 잎이 파랗고 / 菘菜雪天新葉綠

병아리는 섣달에 솜털이 노랗다네 / 鷄雛蜡月嫩毛黃

석제원 북쪽에는 갈림길이 하 많아서 / 石梯院北路多歧

예부터 낭자들이 이별하는 곳이라네 / 終古娘娘此別離

한도 많은 문 앞의 수양버들 나무들은 / 恨殺門前楊柳樹

그통에 다 꺾이고 남은 가지 몇 개 없어 / 炎霜摧折少餘枝

눈처럼 새하얀 새로 짜낸 무명베를 / 棉布新治雪樣鮮

이방에 낼 돈이라고 졸개가 와 뺏는구나 / 黃頭來博吏房錢

누전의 조세를 성화같이 독촉하여 / 漏田督稅如星火

삼월하고 중순이면 세 실은 배를 띄운다네 / 三月中旬道發船

(왕적(王籍)에 누락된 민전(民田)이 6백 여 결(結)에 이르는데 그것을 재결(災結)로 거짓 보고하고 있으니 국가 조세가 얼마나 많이 축이 나겠는가.)

완주의 황옻칠은 맑기가 유리 같아 / 莞洲黃漆瀅琉璃

그 나무가 진기한 것 천하가 다 알고 있지 / 天下皆聞此樹奇

작년에 성상께서 세액을 견감했더니 / 聖旨前年蠲貢額

봄바람에 밑둥에서 가지가 또 났다네 / 春風髡蘖又生枝

오만족 총각인지 머리털은 더부룩한데 / 烏蠻總角髮如雲

써내는 글씨 보니 중국 문자 아니로세 / 寫出三倉法外文

자바섬이 아니면 루손섬에서 왔으렷다 / 不是瓜哇應呂宋

장미빛 옥합에서 야릇한 향내 풍기네 / 薔薇玉盒發奇芬

(이때 표류선이 제주도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음.)

백련사 누대 앞에 둥그렇게 비친 물결 / 蓮寺樓前水一規

봄이면 눈 같은 조수 문중방까지 오른다네 / 春潮如雪上門楣

유명한 절 다해봐야 두륜사가 으뜸이지 / 名藍總隷頭輪寺

서산대사 공적 기린 어제비가 있으니까 / 爲有西山御製碑

시골 애들 습자법이 어찌 그리 엉망인지 / 村童書法苦支離

점획과파 모두가 낱낱이 비뚤어져 / 點畫戈波箇箇欹

글씨방이 옛날에 신지도에 열려 있어 / 筆苑舊開新智島

아전들 모두가 이광사에게 배웠었는데 / 掾房皆祖李匡師

가시밭길 어느 때나 앞길이 트일는지 / 荊棘何年一路開

누른 띠밭 참대나무 주릿대 비슷하네 / 黃茅苦竹似珠雷

형방의 아전들이 소란 떠는 것이 / 形房小吏傳呼急

서울에서 누가 또 귀양을 왔군그래 / 知是京城謫客來

삼월이면 송지에 말시장이 열리는데 / 三月松池馬市開

오백 푼만 집어주면 천재마를 고르게 되지 / 一駒五百揀天才

(방언에 좋은 말을 일러 천재마(天才馬)라고 함.)

흰말총 체라던지 검은말총 갓이랑은 / 白騣籮子烏騣帽

그 모두가 한라산 목장에서 온 거라오 / 都自拏山牧裏來

전복이야 옛날부터 점대에서도 즐겼지만 / 自古漸臺嗜鰒魚

동백기름이 창자 훑어낸다는 것 헛말이 아니로세 / 山茶濯䐈語非虛

성 안의 아전들 들창문 안에는 / 城中小吏房櫳內

규장각 학사들의 서찰이 다 꽂혔네 / 徧挿奎瀛學士書

도독 영문 둔 지가 이백 년이 되었는데 / 都督開營二百年

부두에는 왜놈 배를 다시 매지 못했었지 / 皐夷不復繫倭船

진린의 사당 속엔 봄풀이 우북한데 / 陳璘廟裏生春草

아낙들이 돌을 던져 아들 점지 해달란다네 / 漁女時投乞子錢

 

완당집 완당전집6권 제발(題跋)에는 원교필결 뒤에 쓰다[書圓嶠筆訣後] 라는 글에는

원교(圓嶠)의 필결(筆訣)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엽 이래로 다 언필(偃筆)의 서(書)이다. 그래서 획의 위와 왼편은 호(毫) 끝이 발라가기 때문에 먹이 짙고 미끄러우며, 아래와 바른편은 호의 중심이 지나가기 때문에 먹이 묽고 까끄러움과 동시에 획은 다 편고(偏枯)가 되어 완전하지 못하다."이 설(說)이 하나의 횡획(橫畫)을 사분해서 벽파하여 세미한 데까지 분석한 것 같으나 가장 말이 되지 않는다. 위에는 단지 왼편만 있고 바른편은 없으며 아래에는 단지 바른편만 있고 왼편은 없단 말인가? 호 끝이 발라가는 것은 아래에 미치지 못하고 호 중심이 지나가는 것은 위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횡획이 이미 이와 같을진댄 수획(竪畫)은 또 어떻다는 건가. 농담(濃淡)과 활삽(滑澁)이란 본시 먹 쓰는 법에 달린 것이요 용필(用筆)의 언(偃)과 직(直)을 탓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가에는 필법이 있고 또 묵법(墨法)이 있는데 이 필결 속에는 묵법에 영향된 것이 하나도 없으니 대개 필법만 들어 논하면 이미 이것이 편고이며 필법을 논하면서 먹과 필을 나누어 놓지 아니하고 두루뭉수리로 말하여 구별한 바가 없으니 어느 것이 이 묵이며 어느 것이 이 필인지를 모를 지경인데 이러고서 말이 된다 할 수 있겠는가. 원교의 글씨를 보니 현완(懸腕)하고서 쓴 게 아니다. 무릇 글자를 쓸 때 현완하고 현완하지 않은 것은 자획의 사이를 보면 그림자도 도망갈 수 없는 것인데 어찌 속일 수 있으랴.원교에게 친히 배운 여러 사람들도 역시 다 알지 못한다. 이랬기 때문에 필결 속에는 현완에 대한 한 글자도 미치지 않은 것이니 현완을 한 연후에야 붓 쓰는 것을 말할 수 있다.현완을 안 하고서는 어떻게 붓을 씀에 있어 언(偃)이니 직(直)이니 말할 수 있으랴. 그가 깊이 언필을 책한 것도 무엇을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고려 말 이래로 우리나라 초엽에 이르러 이군해(李君侅)·공부(孔俯)·강희안(姜希顔)·성달생(成達生) 같은 여러 명공(名公)들이 용이 날고 봉이 나래하듯 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이들이 어찌 일찍이 한 파(波)나 한 점(點)의 언필이 있었으며 또 숭례문(崇禮門)·흥인지문(興仁之門)·홍화문(弘化門)·대성전(大成殿)의 편액 같은 것이 어찌 언필로써 쓸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 이른바 언필이란 어느 사람의 글씨를 지적한 것인지 모르겠다.또 이를테면 "획을 일으켜 호(毫)를 펴고 가면 아래는 날랜 칼이 가로 깎은 것 같다."는 것은 아무래도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가령 펴진 호가 날랜 칼이 가로 깎은 것같이 하려면 마땅히 일종의 필을 따로 만들어 마치 화공의 편필(匾筆)이나 도배장이의 풀비 모양 같이 돼야만 법에 맞게 할 수 있는데 지금 유행하는 조심필(棗心筆)로서는 손을 댈 수가 없을 것이다.그가 또 말한 "굳건히 붓을 다진다.[堅築筆]"라는 것은 고금 서가가 듣지 못한 비결이다. 축필(築筆)이란 것은 반드시 점을 연해 찍는 곳에 있어 긴히 다붙이는 의(義)로서 빙(冫)과 같은 것이 이것이며 횡·직·과·파(橫直戈波)의 여러 획에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심지어 붓이 먼저 가고 손은 뒤에 간다[筆先手後]는 것은 더욱 뒷사람에게 보여줄 것이 못 된다. 서가가 먼저 할 것은 현완과 현비(懸臂)에 있어 마침내는 온 몸의 힘을 다 쓰는 데까지 이르는데 지금 ‘붓이 먼저요 손은 뒤라.’ 하고 또 ‘온 몸의 힘을 다해 보낸다.’ 했으니 붓이 먼저 갔는데 어떻게 손과 몸에 의뢰할 수 있는가. 선후가 모순되어 스스로 그 예(例)를 어지럽히며 조리가 닿지 않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으리오.점의 법에 대하여 그는 말하기를 "형체는 비록 뾰족하나 호는 다 편다."라 한 것은 이 또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호를 펴는 한 법으로서 과·파·점·획에 두루 다 쓰고 싶은데 가장 점의 법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이런 견강부회(牽强附會)의 말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무릇 뾰족하다는 것은 모아서 합쳐놓은 것이요 편다는 것은 흩어놓은 것이니 뾰족한 것을 펴서 만들 수 없고 펴진 것을 뾰족하게 만들 수 없다. 뾰족하고 편 것은 형체가 달라서 서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편호로써 뾰족한 형을 만든단 말인가. 결구(結構)라는 것은 필진도(筆陣圖)에서 이를 들어 모략(謀略)이라 했다. 아무리 칼과 갑옷이 정(精)하고 날래며 성지(城池)가 굳고 튼튼할지라도 모략이 아니면 손을 놀릴 수가 없게 되므로 이 때문에 서가는 가장 결구를 중히 여긴다.종유(鍾繇)·색정(索靖)으로부터 근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서가는 일정하여 감히 바꾸지 못하는 결구법이 있으니 이를테면 왼편이 짧을 경우에는 위를 가지런히 하고 바른편이 짧을 경우에는 아래를 가지런히 하는 유로서 낱낱이 들어 말할 수 없다.그런데 지금의 이른바 결구라는 것은 전혀 착락(着落)이 없어 옛사람들이 서로 전하는 진체(眞諦)와 묘결(妙訣)은 하나도 미친 바 없으니 대개 그 글씨가 결구의 한 법에 있어서는 더욱 억견(臆見)으로서 벽을 향하여 헛되이 만든 것이라 그 추악한 것은 형용할 수 없는데 도리어 구·안(歐顔)으로서 방판(方板)의 일률(一律)이라 하여 심지어는 이들이 모두 왕우군(王右軍)을 글씨로 여기지 않은 과정을 밟았다 일렀으니 이는 어찌 무숙(武叔)이 성인을 헐뜯고 파순(波旬)이 부처를 비방한 것과 다르리오. 이는 더욱 먼저 벽파(闢破)해야 할 것이다."자상히 우군의 제첩(諸帖)에 준(準)해 보면 내 말이 근본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우군의 어느 첩을 지적한 것인지 모르겠으며, 그가 이르는 "동쪽 사람은 고루하여 고거(考据)를 모른다."는 것은 단지 필진도를 능히 분변 못한다는 말이며 우군의 제첩에 이르러는 과연 다 고거할 수가 없는 것인데 곧장 내 말이 근본이 있음을 들어 증명할 수 있으랴.시험삼아 논한다면 악의론(樂毅論)은 이미 당 나라 때부터 진모본(眞模本)은 얻기 어려웠고 황정경(黃庭經)은 우군의 글씨가 아니며 유교경(遺敎經)은 곧 당 나라 경생(經生)의 글씨요 동방삭찬(東方朔讚)과 조아비(曹娥碑)는 그것이 어느 본에서 나왔는지 모르니 서가로서 안목을 갖춘 자는 곧장 유식자는 응당 이르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순화각(淳化閣)의 제첩은 진안(眞贋)이 혼잡한 동시에 무진무진 번와(翻訛)되어 가장 표준할 것이 못 되며 하물며, 우군이 고을을 잃고 선령(先靈)에 고한 이후로는 대략 자수(自手)로 쓰지 않고 대서(代書)하는 한 사람을 두었는데 세상에서 능히 구별을 못하고서 그 느리고 이상한 것을 보면 호칭하여 만년의 글씨로 삼는데 이를 제외하고 또 우군의 어느 첩이 있어서 내 말이 근본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단 말인가.그가 한예(漢隷)를 품제(品第)하면서 예기비(禮器碑)를 들어 제일이라 했고 곽비(郭碑)를 들어 후세에 나왔다 했으니 이는 구안(具眼)이라 일컬을 만한데 갑자기 수선(受禪)을 예기와 아울러 들었고 심지어는 공화(孔龢)·공주(孔宙)·형방(衡方) 제비(諸碑)가 다 수선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으니 무엇을 근거삼아 한 말인지 모르겠다.한예는 비록 환·영(桓靈) 시대 말조(末造)라도 위예(魏隷)와는 너무도 같지 아니하여 한계를 그어 놓은 것과 같은데 수선은 바로 위예로서 순전히 방정(方整)을 취하여 이미 당예(唐隷)의 조짐을 열어 놓았으니 어찌 예기와 더불어 병칭할 수 있으며 도리어 공화·공주의 위에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아는 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아서 자못 측량을 못하겠다.아, 세상이 다 원교의 필명(筆名)에 진요(震耀)가 되어서 그의 상·좌·하·우·신호(伸毫)·필선(筆先) 제설(諸說)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며 한번 그 미혹(迷惑)의 속으로 들어가면 의혹을 타파할 수 없게 되므로 참람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큰 소리로 외쳐 심한 말을 꺼리지 않기를 이와 같이 하는 바다.그러나 이 어찌 원교의 허물이랴. 그 천품이 남달리 초월(超越)하여 그 재주는 지녔으나 그 학(學)이 없는 것이요, 또 그 허물이 아니다. 고금의 법서(法書)와 선본(善本)을 얻어 보지 못하고 또 대방가(大方家)에게 나아가 취정을 못하고 다만 초이한 천품만 가지고서 그 고답적인 오견(傲見)만 세우며 재량을 할 줄 모르니 이는 숙계(叔季) 이래의 사람으로서 면하지 못하는 바이다. 그의 ‘옛을 배우지 아니하고 정(情)에 인연하여 도를 버리는 자들에게 뜻을 전한 것’은 사뭇 자신을 두고 이른 말인 것도 같다. 만약 선본을 얻어보고 또 유도(有道)에게 나아갔던들 그 천품(天品)으로써 이에 국한되고 말았겠는가.

편집 : 박효삼 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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