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우리 것] 마광남 주주통신원

우리들은 우뭇가사리를 우무라고, 또는 천초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조10년 병오(1786,건륭 51) 5월19일(신유) 기록을 보면 국기일(國忌日)에는 하루 세 때에 공상하였다고 한다. 즉 국가의 중요한 날에는 해조류가 올라갔는데 그 품목들을 보면 분곽(粉藿 품질이 좋은 미역), 조곽(早藿 일찍 따 말린 미역), 다시마(多士麻), 감태(甘苔), 곽이(藿耳 미역귀), 세모(細毛 참가사리), 해의(海衣 김), 곤포(昆布) 등이 있었다.

세종 10년 무신(1428,선덕 3년) 1월28일(신해)의 기록을 보면 첨절제사(僉節制使) 박유(朴牖)가 선군(船軍)을 시켜 청각(靑角) 두어 말을 싸가지고 좌의정 황희(黃喜)에게 증정(贈呈)하다가 금란리(禁亂吏,관직명)에게 잡혔으니, 청하건대 감수자도율(監守自盜律)로 논죄하여 장(杖) 80대에 처하소서.”하니, 임금이 박유는 공신(功臣)의 아들이라 하여 다만 관직만 파면시켰다는 기록들도 보인다. 작은 것이지만 뇌물로 생각하고 그러한 벌을 주었던 것 같다. 이러한 기록들로 보면 우리의 선조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해조류를 사용하였으며 매우 중시하였다.

1949년 8원 15일자 <서울신문>의 기사를 보면 독립 1주년 <우리가 쌓은 자취>란 제목으로(수산편)실린 기사의 내용에 연도별 생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4277년(1944) 234,513톤으로 98,421,875원의 소득을 올렸으며, 4278년에는 257,797톤으로 545,669,130원을, 4279년 309,253톤으로 2,852,319,997원의 소득을, 4280년 301,952톤으로 7,749,912,000원의 소득을,4281년 268,146톤으로 14,707,744,000원의 소득을 올렸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면 매년 소득이 높아져 갔음을 알 수가 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소득이 아닐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바다는 우리들의 논과 밭이며 엄청난 보고임에 틀림없다. 이 논과 밭을 더 기름지게 할 수는 없는 것인지 우리 모두 박람회를 계기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의 수출품을 보면 오징어, 김, 우뭇가사리, 건 멸치, 명태, 간유 등 6~7종을 들 수 있는데 작년도 총 수출량은 8,080톤에 금액으로 53여 억 원(상공부 통계)의 거액의 소득을 올려 국가경제부흥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완도는 이렇듯 국가의 부흥에 일조를 하였다고 불 수 있다.

또한 유엔의 한국문제처리에 관한 미국무부의 문서에는 한국 경제협조처 사절단, 대한민국의 어업, 1949년 12월의 기록에 우뭇가사리협회(agar agar fishery association)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뭇가사리를 비롯한 해조류를 매우 중시하였던 것을 알 수가 있다.

1903년 고종시대의 기록에는 우리 완도가 설군 되는데 많은 힘을 실어주었던 이도재 선생(당시 외무대신)께서는 우뭇가사리에 세금(판매수수료)을 낮추어 달라고 일본공사에 말했던 기록도 있다.

마광남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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