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우리 것] 마광남 주주통신원

담배는 백해무익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피우는 것이 마치 아편처럼 중독성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아무 이익이 없는 담배가 언제 어디에서 왔을까? 지금이야 잘 쓰지 않는 말이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담배를 권연(얇은 종이로 가늘고 길게 말아 놓은 담배. 권연초[卷煙草]·궐련초) 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게 잘 못 전해지면서 골연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기록으로는 최초 인조실록(1616~1617)에 바다를 건너 들어와 간혹 피우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1621~1622년에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담배는 외국에서 수입해 왔다고 해서 박래품(舶來品)이라고 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쿠바에서 토인들이 피우는 것을 보고 유럽으로 전해졌다고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으로부터 전해왔는데, 영어로 터배코 또는 타바코(tabacco)라고 했다는데 이것이 일본으로 전해오면서 담박괴(淡泊塊)라고 불렀고, 혹은 담파고(淡婆枯), 남령초(南靈草, 계곡만필(谿谷漫筆 제1권 남령초흡연) 라고도 불렀다.

중국에서는 남초(南草)를 연주(煙酒, 연기술)라고도 하고 연다(煙茶, 연기차)라고도 하였다. 이 담배를 두고 <계곡만필> 제1권에서는 세지공남초자(世之攻南草者)라 하여 담배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칭송남초지효능(稱頌南草之效能)이라고 좋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 같은 것 같다. 스스로 유식함을 내세운 사람들은 남초(南草), 왜초(倭草)라고도 하였고 연기를 피운다고 연초(煙草)라고도 하였고 담뱃대의 길이로 신분을 가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성호사설>(星湖僿說) 4권 만물문 남초(南草)에는, 우리나라에 담배가 많이 유행된 것은 광해군(光海君) 말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로는,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 담파국(湛巴國)이란 나라에서 들어온 것인 까닭에 속칭 담배[湛巴]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태호 선생(太湖先生)에게, 지금 이 담배란 것이 사람에게 유익한 물건입니까? 라고 물으니 태호 선생은, 담배란 가래침이 목구멍에 붙어 뱉어도 나오지 않을 때 유익하고 구역질이 나면서 침이 뒤끓을 때 유익하며, 먹은 것이 소화가 안 되고 동작이 나쁠 때 유익하고 가슴이 조이면서 신물이 올라올 때 유익하며, 한겨울에 추위를 막는 데 유익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일까 애연가들은 식후불연은 소화불량(食後不煙消化不良)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담배피우는 것을 정당화 하려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가 묻기를 그러면 담배는 사람에게 유익하기만 하고 해는 없다는 말입니까? 라고 묻자 태호 선생은, 몸에 이롭고 해로움을 따진다면, 해가 더 심할 것이다.
안으로 정신을 해치고 밖으로 듣고 보는 것까지 해쳐서 머리가 희게 되고 얼굴이 늙게 되며, 이가 일찍 빠지게 되고 살도 따라서 여위게 되니, 사람을 빨리 늙도록 만드는 것이다. 내가 이 담배는 유익한 것보다 해가 더 심하다고 하는 것은 냄새가 나빠서, 재계(齋戒)하여 신명(神明)을 사귈 수 없는 것이 첫째이고, 재물을 없애는 것이 둘째이며, 세상에 일이 많은 것이 진실로 걱정인데, 지금은 상하노소를 막론하고 해가 지고 날이 저물도록 담배 구하기에 급급하여 한시도 쉬지 않으니 이것이 셋째이다. 만약 이런 마음과 힘을 옮겨서 학문을 닦는다면 반드시 대현(大賢)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글에 힘쓴다면 문장도 될 수 있을 것이며, 살림을 돌본다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역(周易)에, 상륙(上六)은 오르는 이치에 어두우니, 곧고 바른 데에 한 결 같이 쉬지 않는 것만이 이롭다고 답하였다.

지금처럼 권연이 나오기 전까지는 담뱃대에 피우기도 하고 혹은 엷은 종이에 둘둘 말아서 피우기도 하였다.(담배를 말았던 종이로는 마분지, 신문지, 백로지 등)

그렇다면 이 담뱃대는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였던 세계적인 발명품일까? 이러한 담뱃대도 장죽(長竹)은 양반들이 사용하였고 곰방대는 상놈들이 사용하였다고 한다. 일본에서 들어올 때 담박괴로 들어온 것이 경상도지방으로 들어오면서 담박괴가 담바구로 불리게 되었고, 담바귀타령까지 생겨났다.

노랫말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시작일세 시작일세 담바귀타령이 시작일세
담바귀야 담바귀야 동래나 울산의 담바귀야
너의 국(國)이 어떻길래 대한의 국을 왜 나왔나
우리국도 좋건만은 대한의 국을 유람을 왔네
은을 주러 나왔느냐 금을 주고 나왔느냐
은도 없고 금도 없고 담바귀 씨를 가지고 왔네.
저기저기 저 산 밑을
슬슬 갈어 엎어 놓고
담바구 씨를 훌훌 뿌려
낮이면은 찬물을 주고 밤이면은 찬이슬 맞어
겉의 겉잎 다 젖혀놓고 속의 속잎을 잘 길러서
네모 반듯 드는 칼로 어슥비슥 썰어놓고
총각의 쌈지도 한 쌈지요 처녀의 쌈지도 한 쌈지라
소상빈죽 열두 마디 수복을 새겨서 맞추어놓고
청동화로 백탄불을 이글이글 피어놓고
담바귀 한대 먹고 나니 목구멍 속에 실안내 돈다
또 한 대를 먹고 나니 청룡황룡이 꿈틀어 졌다.

또 이런 시도 있다.
남국에 풀이 하나 있는데 / 南國有一草
염제도 예전에 맛본 적이 없지 / 炎帝嘗無前
비록 신선의 불사약은 아니지만 / 雖非不死藥
먹으면 풍연을 다스릴 수 있어라 / 服之治風涎
늘 손에 담뱃대를 들고서 / 長時手鵝管
쉼 없이 빨고 연기를 토하네 / 呑吐無休□
골초라고 사람들이 웃지만 / 傍人笑成癖
나는 스스로 시속을 따른다 / 我自能循俗
시속을 따름이 나쁘지 않나니 / 循俗亦不惡
외톨이 행동은 아무 이익이 없지 / 獨行無所益

이러한 노래가 생길 정도로 그때도 애연가가 많았던 것 같다. 이 노랫말에서 총각도 처녀도 쌈지 가득이라고 했던 것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피웠던 것 같다.

또 이런 속담이 있다. 부인과 사별한 사람에게 하는 말이 “계집 잃고 서러워하느냐 조대(담뱃대) 잃은 나도 있다.” 라고 하였던 것으로 보면 담배가 얼마나 중요시? 되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이곳(완도)에서는 산림법이 엄할 때 산을 감시하는 산감(山監)이 있었는데 하루는 마을 처녀들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가서 한 짐씩 해가지고 오다가 산감에게 들켰는데 젊은 사람들이라 도망을 하자 이를 쫓던 산감이 그만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담뱃대를 잃어버리고 처녀들에게 찾아주면 나무해가는 것을 용서해 준다고 하였으나 이 처녀들은 속임수인줄 알고 반신반의 하였으나 거짓이 아님을 알고 담뱃대를 찾아주었는데, 진짜로 나무를 그대로 가지고 가게 했던 일화가 저자의 마을에서 있었다.

나는 이러한 담배를 하루 한 갑씩 56년간 피었으니 408.800 개피 이고, 갑수로는 20,440갑이다. 담배 한 갑을 2,500원 친다면 51,100,000원이 되는데 이것을 모두 연기로 날렸으니 참 많이도 피었구나, 그래도 버리지 못하는 건 끈질긴 인연인가보다.

<해동역사> 제26권 물산지1 초류편에는 연초(烟草)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강희(康煕) 연간에 고려 사람들이 담배 1만 갑(匣)을 바쳤는데, 상이 이를 거절하면서 짐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하였다.

우통(尤侗)의 간재권고(艮齋倦藁)의 담배 피는 것을 읊다[詠喫煙]라는 시에, 단지 추위를 몰아 변경 문 밖으로 내보내기에 좋을 뿐인데, 어찌하여 좋은 집 방 안에서 아침저녁으로 물고 있나. 임금이 고려에서 바친 만 갑의 담배를 보고서는, 대궐 안으로 들여 지존 가까이에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네.[지호구한출새문 여하화옥공신혼 군간만갑고려종 미허심궁근지존] 只好驅寒出塞門 如何華屋供晨昏 君看萬匣高麗種 未許深宮近至尊] 살펴보건대, 연초(烟草)의 속명은 담배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집안에서 피우는 것은 모두가 싫어하였던 모양이다.

연초(烟草)는 이아(爾雅)와 본초(本草)를 상고해 보아도 모두 실려 있지 않으며, 오직 경악전서(景岳全書)에서만 비로소 그 성질과 맛에 대해 말하였다. 혹 어연초(菸烟草) -정운(正韻)에, 어(菸)의 음은 연(烟)이며, 뜻은 같다. 하였고, 광운(廣韻)에는, 어는 냄새가 나는 풀[臭草]이라고도 한다.

대개 연초가 중국에서 널리 퍼진 것은 만력(1573~1619) 연간부터였으며, 민중(閩中) 지방으로부터 종자가 전래되었다. 왕포(王逋)가 말하기를, 연엽(烟葉)이 민중 지방으로부터 전해졌는데, 그 지방 사람들이 한질(寒疾)에 걸렸을 적에 연초가 아니면 치료하지 못한다. 관외(關外)의 사람들이 오면, 비단과 말을 가지고 연초 1근(觔)과 바꾼다.

담배를 보관했던 기록이 <봉사일본시견문록>에 있다. 담배는 옷칠한 삼층합(三層榼)에 담았는데, 한 층에는 복부(服部)’라 쓰고, 한 층에는 방야(芳野)’라 쓰고, 한 층에는 신전(新田)이라 썼다. 듣건대, 이것은 담배가 나는 지명인데 담배의 생산지까지 적어 두었으며 각기 다른 지역의 담배를 비교하면서 피웠던 것도 알 수가 있다.

숭정(崇禎) 계미년(1643, 인조21)에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금령(禁令)을 내렸는데,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변방에 있는 군사들이 한질에 걸렸을 경우 치료할 수가 없으므로 마침내 금령을 풀었다 하였고, 요려(姚旅)는 말하기를, 여송국(呂宋國,필리핀의 루손섬)에 풀이 있는데, 이름을 담파고(淡巴菰)라고 하며, 일명 금사훈(金絲薰)이라고 한다. 연기를 대롱[管]을 통하여 목구멍 안으로 들이마시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취하게 한다.

역시 장기(瘴氣)를 물리치며, 갈아서 즙을 내어 머리의 이[蝨]를 죽인다 하였고, 왕사진(王士禛)은 말하기를, 연초는 근래에 장주(漳州) 사람들이 해주(海州)로부터 가지고 왔는데, 보전(莆田)에서도 심어서 여송(呂宋)보다도 더 많게 되었다. 지금은 곳곳에 있으며, 민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였고,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이르기를, 연초는 겨울철에 추위를 막을 수가 있어서 토착민들이 더욱더 많이 피운다. 무순(撫順, 푸순) 지방에서 나는 것이 더욱 좋다 하였다.

왕숭간(王崇簡)의 전기(箋記)에, 모려(慕盧) 한담(韓菼)이 담배 태우기를 몹시 좋아해서, 한원(翰苑)을 맡고 있을 때에 문인(門人)들에게 명하여 담파고가(淡巴菰歌)를 짓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담배가 성행한 것에 대해서는, 이성령(李星齡)은 말하기를, 광해조(光海朝) 임술년(1622, 광해군14)부터 시작되었다. 하였고, 이수광(李睟光)은 말하기를,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나온다.) 또한 남령초(南靈草)라고도 하며, 근세에 들어와서 비로소 왜국(倭國)에서 들어왔는데, 습한 기운을 제거할 수가 있고, 또 술을 깨게 한다. 그러나 가볍게 시험해 보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왜한도회(倭漢圖會)에 이르기를, 연초는 근래에 남만(南蠻)으로부터 들어왔는데, 귀천(貴賤)이나 노장(老壯)을 막론하고 모두 다 즐긴다. 중국과 조선 및 아란타(阿蘭陀) 사람들도 모두 다 그러하다.

무릇 담배를 빨아들이는 기구를 연통(煙筒)이라고 이름 하는데, 대나무 관(管)을 사용한다. 머리 부분을 안두(雁頭)라 하고 꼬리 부분을 흡구(吸口)라 하는데, 모두 진유(眞鍮)를 써서 만들며, 철(鐵)이나 혹 자기(磁器)를 쓰기도 한다.

담아서 태우는 것을 불을 들인다(火入)고 한다. 또 하나의 작은 그릇으로 피우고 남은 재를 버리는데, 이를 회취(灰吹)라고 하며, 향합(香盒) 모양의 물건을 사용하여 연초를 담는다 하였다. 지금은 공경(公卿)이나 사대부(士大夫)로부터 아래로 부녀자나 어린아이, 종들까지도 모두 담배 피우기를 즐긴다. 농가에서는 밭이랑을 잇달아서 모두 다 담배를 심는데, 곡식을 심는 것보다도 이익이 배는 많다.

그러므로 좋은 밭에는 모두 담배를 심는다. 그 가운데서도 평안도와 황해도 두 도에서 나는 것을 서초(西草)라고 하는데, 맛이 더욱 향기롭고 맑아서 값이 몇 배는 비싸다고 기록하였다. 즉 기후나 토질에 의하여 그 맛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담배농사가 다른 작물을 심는 것보다 더 나은 편이란다. 담배 값이 인상된 것만큼 원초도 오를까?

마광남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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