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에서 찾은 달콤한 평화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유원진 주주통신원l승인2017.06.16l수정2017.06.20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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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하노이, 내게는 그저 일하기 힘든 도시-

40년 만의 더위가 하노이를 공습하여, 대낮에는 그 복잡한 거리가 텅 빌 정도의 찜통에도 하얀 긴 팔 남방에 양복바지를 입고 며칠을 바쁘게 드나들다가, 체크인 후 처음으로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나가는 나를 벨 보이가 웃으며 쳐다본다. 나도 웃어주면서 베트남 말로 몇 마디 아는 체를 해 주었다. 문을 열어 주는데 한낮의 열기가 덜 식어서 후끈한 바람이 온몸을 덮친다.

▲ 하노이 주말 야시장  : 하노이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매장. 무궁생활 이라는 글자가 또렷한데 ... 나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한꿕"(한국) 하며 엄지를 치켜든다.

5시간의 치열한(?) 미팅을 끝내고 돌아와 슬리퍼를 끌고 호텔을 나섰을 때 이미 날은 어둑해져 있었다. 15년간을 드나들었어도 늘 이 시간이 되면 서울 하늘이 그립다. 매연이니 미세먼지니 해도, 피곤하고 힘들 때, 그저 익숙한 내 땅이 그리워지는 것은 비단 나만도 아니고 또 특별하게 이번 출장이 힘겨워서도 아닐 것이었다.

고향. 사실 서울 본토인 내게 고향이라는 개념은 마치 먼 산허리에 둘린 낮은 구름처럼 뭔가 보이기는 하는데 손에 잡히지는 않는, 그림 같은 것이었다. 어느 자리에서든, 누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잠시 망설이다가 "선향이 양평입니다." 라곤 했다. 굳이 아버지의 고향을 말하는 것은 '서울이 고향입니다.' 하면 '나는 고향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서울시 중구 만리동 산동네에서 태어났는데요.'라고 대답하다가 '그게 무슨 고향이야. 인마' 하고 면박을 심하게 당했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있어서 인지도. 이제 생각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호텔 가까운 곳에 있는 식당으로, 보도에 널린 물건들을 신경 쓰며 걷다가 문득 옆을 보니 몸 하나 겨우 들어갈 기다란 골목이 있었다. 그냥 골목이라기엔 너무 좁아서 위를 올려보니 동그란 간판이 꼭 내 얼굴만 한 게 높이 걸려있었다. 몇 걸음 떨어진 식당을 쳐다보다가 빨려들듯이 안으로 들어섰다.

더 써클 카페로 들어가는 긴 회랑 : 밖에 걸린 간판이 보이도록 찍어야 되는데 놓쳤다. 이 사진은 안에서 밖을 보고 찍은 사진이다. 끝에 햇살이 눈부신 밖이 보인다.

그리 배도 고프지 않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에 귀에서 맴돌던 거래처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명치끝에 걸려 뻐근했기 때문이리라. 귀에 붙을 듯 가까운 양쪽 벽에서 '괜찮아 잘했어' 하는 소리가 하모니로 들렸다. 아니면 뭔가 나를 이끄는 힘이 있어서였을까. 나도 모르게, 특히 골목길은 잘 들어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발길은 천천히 그러나 주저 없이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꿈속에서 본 풍경을 실제로 보고 놀란 적이 있었는데. 써클에 들어서는 순간이 그랬다. 어두운 조명이 은은히 퍼져 있는 카페 중앙홀 저쪽 너머에 다른 나라에서 온 것 같은 햇살이 쏟아지는 또 다른 공간이 있는데 사람은 없었다.

▲ 더 써클 카페 내부 : 긴 회랑을 지나 입구에서 본 카페 내부. 실내이자 실외가 되는 독특한 구조이다.

눈이 부시기도 하고 어둡기도 하고 마치 영화 '사랑과 평화'의 끝자락에서 패트릭 스웨이지가 빛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그런 분위기였다. 나는 잠깐 뜻밖의, 하노이에서는 늘 현대식 커피숍에만 다녀 익숙한 곳이 아닌 풍경에 놀라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놀란 것은 아니고 경이로워서, 가만히 풍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 실내에 있는 햇살 공간

-생각하지 말아요.-

내가 카페 안의 풍경을 보는 동안 가만히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보는 시선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둠이 눈에 익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난 후였다. 아주 조그만 여자아이가 나를 보고 웃으며 비로소 일어섰다. 아마 내가 그 경이로움을 즐기는 동안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허름한 몸짓이었을지언정, 나도 마주 웃어주고 그녀가 앉았던 제일 편한 곳 같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 그녀가 직접 천을 떠다 만든 소파와 의자. 의자 4개는 나도 도와 만들고 점심을 얻어먹었다

커피를 먼저 시켰던가, 맥주를 먼저 시켰던가. 몇 병의 하이네켄을 비우면서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몇 사람이 드나드는 느낌도 잊었다. 그렇게 흐르던 생각들이 갑자기 오늘 있었던 미팅에 이르자 내 안의 평화가 깨지는 소리가 바깥까지 울리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을 많이 하지 말아요."

꿈을 꾸고 있나. 옆을 보니 내 자리에 앉아 있었던 바로 그녀가 두어 간격 옆에서 나를 보고 웃으며 말하는 중이었다.

"영어를 잘 못 하는데(웃음).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힘들 때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요. 생각이 지나가게 그냥 두어요."

시간이 멈춘 듯 한 방 :. 이야기가 가득한 느낌의 방. 사진으로 표현해 내는 재주가 없는 게 아쉬웠다.

둘 다 영어가 외국어임에도 불구하고, 또 영어로 표현하는 모든 의미에 비호감임에도, 그토록 평화스럽고 위안을 주는 영어의 속삭임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작은 손가락을 옆으로 가볍게 저으며 나를 안쓰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일까 ..... 그 아이는 나의 어디를 보고 내가 힘겨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일까. 나는 그녀에게 그 말을 다시 한 번 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기가 영어를 못해서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한 그녀는 다시 한 번 천천히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해 주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말아요, 그냥 지나가게 두어요.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그녀는 나를 보고 웃더니 옆에 있는 기타를 무릎에 놓았다. 잘 치는 솜씨도 아니고 내가 이해하지도 못하는 베트남 노래였지만 나는 그 가사와 곡조가 분명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노래는 가늘게 이어졌다가 하늘로 올라가는가 하면 빛으로 나아갔다가 어둠 속으로 돌아오곤 했다. 15년 동안 베트남에서 여러 번의 전통 공연을 보고 많은 유명가수의 베트남 노래를 들었지만 처음 느껴보는 아름다운 노래였다. 관중은 나 혼자라 노래가 끝나서 손뼉을 치며 한 곡만 더 부탁했으나 이 노래 밖에 못한다며 기타를 내려놓았다

▲ 카페 더 써클의 주인  : The circle 의 주인인 미스 쩜. 내용도 모르는 노래가 너무 좋아 한 곡 더 부탁했더니 딱 한곡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저녁 안 먹었으면 지금 우리랑 같이 먹어요. 요리는 간단하지만 내가 만든 거니까 맛있다고 해 줘야 돼요!"

여느 때 같았으면 정중히 사양하고 일어섰으리라. 호텔 만찬도 사양하고 돌아온 길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녀가 위로 올라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카페는 동화속의 나라같이 고즈넉하고 평화로웠다. 왜 이렇게 손님이 없는 것일까. 아까 드나든 사람들도 앉아서 뭔가를 마시거나 먹지는 않았는데....뭔가에 홀린 기분으로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신기하게도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음악만 들으며 거의 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평화로운 기운이 세포 구석구석까지 드나들며 고통의 찌꺼기들을 청소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 실내에 있는 밖에서 본 내부 :  실내에서 보면 밖이 눈부시고 밖에서 보면 실내가 은은하다.

저녁을 먹고 시간이 늦어져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몇 병을 마셨을까. 나는 구석에 놓인 기타를 들어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을(물론 아무도 없으니 용감하게) 들려주었다. 그의 비극적인 이야기와 함께.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정말이냐고 묻더니 놀랍게도 눈물을 글썽거리는 게 아닌가. 가슴이 아픈 듯이 고개를 떨궜다. 그 사람도 생각이 많아서 그랬을 거예요. 사랑은 생각하는 게 아닌데."

-그녀에게 배운 것-

시간이 아주 늦어 문을 닫을 때, 계산을 하며 두리번거리는 내가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눈치 챈 그녀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  써클 카페 계산대 평생 혼자 손님이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오픈한 지 3주 밖에 안 되긴 했지만 손님이 선생님 딱 한명 뿐이었던 날은 처음이에요(웃음). 걱정이요? 아니요. 아마 이것도 무슨 의미가 있겠죠? 생각하지 말아요. 그냥 이렇게 음악을 듣고 생각을 보내 주는 것도 필요하잖아요? 걱정은 내일 하죠 뭐."

돌아가기 전까지 3일을 저녁마다 가서 음악을 듣고 밥도 얻어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했지만 그 사흘 동안 내가 진정으로 그녀에게서 받은 것은 아무 생각 없이, 흐르는 시간들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어야 할 때도 있다는 것. 흐르는 눈물을 닦을 필요가 없을 때도 있다는 것이었다.

귀국하기 전날 나는 책상을 치며 일어섰던 거래처에 다시 가서 어려운 조건이지만 해보겠다며 악수를 청했다. 어리둥절 놀라는 그들을 보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생각이 너무 많았다. 하다보면 어떻게든 손해는 보지 않게 해주리라 믿는다. 처음부터 다시 해보자, 오케이?"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이동구 에디터

유원진 주주통신원  4thme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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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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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표 2017-06-16 19:48:50

    무슨 걱정이 그리 많았수 ? 하노이 그립네요.. 마지막 거래성사 시킨 것은 아주 잘한 듯합니다 ^^신고 |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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