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8월의 북해도에서

여행의 동기는 보통 그 나라 그 지역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그 나라 역사와 그들의 삶, 관습들을 보고 체험하는 여정에서 우리는 자신들과 다른 그들 삶에 거부감보다는 호기심으로 마주하게 된다.

‘다름’을 인정하기까지가 인색할 뿐이지 일단 인정하기 시작하게 되면 우리의 포용의 범위는 ‘같음’의 경우보다 훨씬 넓어짐을 경험하게 된다. 다른 세계에 대한 모름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가진 정보만으로 그 세계를 판단하려드는 한 미지의 영역을 쉽게 줄여갈 수 없음을 잘 아는 우리 인간에게 작동하는 심리적 장치일 것이다. 여행은 바로 그런 포용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이다.

그런 정서적 경험은 의외로 인간을 더욱 여유롭게도 낭만적이게도 한다. 살기 위해 먹고 입고 관계하는 보통 일상과 달리, 이질적 정서의 세계에선 자신의 자연스러운 포용처럼 그 세계도 나를 포용해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측이 가능한 익숙한 환경에서 설렘의 정서를 느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포용과 설렘이 유독 일본 여행에서만큼은 예외가 되곤 한다. 이웃나라 일본 문화에 대한 익숙함과 편리함 때문일까. 그럼에도 그 익숙함이 그저 편안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삶이 그저 무심한 관용의 대상이기보다 역사적 사실과 관점에서의 분석대상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역사와 삶이 일정 부분 우리와 공유되고 겹치는 부분이 많은 이웃이라는 점과, 더 중요하게는 식민통치 전후 시작된 우리의 역사, 특히 고대사에 대해 끊임없이 말살, 왜곡, 축소하려는 그들의 집요한 행위에 대한 무의식적 반작용이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여유, 포용이라는 정서가 일본인에게는 유독 작동되지 않는 씁쓸한 이유이다.

 

l 대륙을 향한 동경의 땅, 홋카이도(북해도)

홋카이도(북해도)는 인구 550만이 거주하는 일본 최북단에 위치하는 섬으로 일본에서는 혼슈 다음의 두 번째로 큰 섬이며 이는 남한 면적의 80% 정도 크기라고 한다. 중심 도시는 삿포로이며 일본인들이 홋카이도 개척 당시 처음 정착했던 도시로 지금은 섬 인구의 약 1/3이 거주하고 있다. 홋카이도는 냉대 기후로서 여름에도 비교적 시원한 편이고 겨울에는 눈이 많은 섬이다. 한국에서 가장 더운 시기인 8월 초 홋카이도로의 여행은 피서로서도 제격이었다.

일본 본토 상단에 위치한 홋카이도는 위로는 대륙과 인접해 있는 사할린과 거의 붙다시피 연결된 듯한 모습이다. 대륙에서 떨어진 섬나라 일본인들의 대륙을 향한 애틋한 동경(침략)의 심정이 느껴지는 모습이랄까.

메이지 시대 이후 이 북해도 삿포로에 대거 이주한 일본인들의 역사는 혹독했다 한다. 원주민인 아이누족을 무참히 살해하며 정착하기 시작했던 '삿포로'는 ‘습하고 거친 땅’이라는 뜻의 아이누어라 하니 얼마나 힘든 개척의 시기였는지 짐작된다. 경작이 불가능한 거대한 늪지인 쓸모없었던 땅을 일본인들은 치산치수로서 오늘날 북해도를 일구었다고 한다. 과정이야 어떻든 강제 이주한 일본인들이 그 불모지를 개척하기 위해 겪어냈던 삶은 같은 인간으로서 가슴 뭉클한 역사였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의 대가인 전쟁배상금(그들 예산의 2.5배에 해당했다고 함)으로 근대화 물결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국제무대에 서게 된다. 국제무대에서의 그들의 야욕은 자국민들의 엄청난 희생과 함께 진행된다. 물론 그들과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 민족에 대해서까지 수탈과 징용, 위안부 등이 강제 동원되었던 용서할 수 없는 역사도 포함된다. 청일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견제로 시작된 러일전쟁에서도 승리한 일본은 전쟁배상금 대신 남 사할린, 대한민국에 대한 지배권을 갖게 된다.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야욕이 2차 세계대전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미국에 굴복하게 되는 순간까지 숨 가빴던 그들의 역사를 보면 참 지독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l 일본스런 일본다운

내가 탄 비행기가 북해도 아사히카와 공항(전세기 편만 이착륙한다고 함)으로 착륙하면서 내려다보인 홋카이도 대평원의 경작지는 바둑판보다도 더 반듯하게 구획된 모습이었다. 과거 역사의 산물들을 일거에 버리고 허물기보다는 보존하고 재활용하는 민족, 작은 집들과 반듯하게 정리된 자동차와 농기구들, 이런 모습은 일본인과 함께 떠오르는 모습이자 속성이다. 5일간의 짧았던 여정은 비에이, 후라노, 유바리, 도야, 오타루, 하코다테 등 주로 홋카이도의 서남쪽이었는데 특별한 유적지라든가 산수경관을 자랑할 만한 화려함은 없었지만 잔잔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섬이었다.

물론 어떤 환경 조건에서도 그들다운 모습으로 변모시키고야 마는 일본인 특유의 성실함이 일궈낸 결과였을 것이다. 혹독했던 불모지 북해도를 계절마다 다른 꽃들이 만발하는 농장(팜 도미타 레벤다화원)으로 일구는가 하면, 지역마다 독특한 스토리를 만들어 치장하는 독특한 그들의 문화(4계절의 언덕, 제루부 언덕 등)와 자연이 가져다준 화산지와 온천, 도야 호수 등은 일본스러운 분위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볼거리였다.

 

l 성실함과 끈기의 결과, 섬세함

그러나 이보다 내게 더 인상 깊었던 것은 과거 청어잡이 항구 및 운반 기능을 했다는 오타르 운하와 그 주변이었다. 지금은 쓸모없어진 운하의 일부를 보존한 채 당시 운하를 중심으로 즐비했던 거대한 창고들을 철거하는 대신 유리공방, 오타르 공방, 술 공방 등 각종 공방과 음식점으로 재활용하면서 과거 역사를 그대로 회상할 수 있게 보존하고 있었다. 그들이 살아온 흔적을 쉽게 지우지 않고 세대를 연결하면서 또 다른 현재의 기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는 즉시 과거를 미련 없이 밀어버리고 마는 우리의 역사 인식을 생각하니 미운 일본이라도 배우고 받아들여야 할 가치라는 생각을 하며 운하 주변 거리를 기웃거렸다.

입속에서 온갖 재료들의 조합과 조리 과정이 섬세하게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의 과자, 케이크 등 먹거리들, 오르골(태엽이 풀리면서 음악소리가 나오는 음향 기구), 유리공예 등 신기한 공예품들을 둘러보면서 섬세함을 넘어 한편 조잡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웬만한 성실성과 끈기가 아니고서 어찌 이런 섬세함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일본인들의 끈질긴 속성, 끝장내는 속성은 그들 삶에서도 느껴진다. 일본인들의 홋카이도 정착기는 국가 주도하에 일본 본토에서의 대대적인 이주와 함께 시작하는데 이주민들은 대체로 사무라이(중산급 월급쟁이), 탄광 광부, 청어잡이 어부 등이었다고 한다. 둔전병(아이누족, 러시아군 대비) 역할을 함께 하게 될 남자들만 이주시키다 보니 북해도는 한 때 범죄소굴처럼 살벌한 풍경이었다고 한다. 이런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유곽(일종의 환락가)을 만들어 이들에게 유희거리를 제공함으로써 일할 동기를 유발했다고도 한다.

이후 윌리엄 클라크 박사와 같은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삿포로 농업대학을 건립했고, 북해도 개척사를 가리키기 시작했으며 뮌헨, 메사추세추 등 북해도와 비슷한 기후의 지역으로부터 맥주, 낙농 등 사업을 도입해 적용하는가 하면, 이동 시간이 3시간으로 단축된 일본에서 세 번째인 (오타르~삿포로) 간 첫 철도를 개통하기도 했다. 내가 여행 중일 때는 마침 삿포로 맥주 축제가 한창이었는데 시내 중심지인 오도리(우리나라 종로통과 비슷한 오래된 도로)를 중심으로 들어선 세기, 산토리, 삿포로, 기린 맥주에서 독일 맥주까지 맥주 부스에서 갖가지 시원한 맥주를 즐길 수 있었다.

 

l 극단적인 국가 우선주의적 뿌리는 어디서

지금 북해도는 앞서간 일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척박했던 삶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직후 일본이 점령하고 있었던 북해도 바로 위 ‘남 사할린’에 소련군이 상륙했을 때, 일본군은 시민들과 군인들의 손발이 되었던 여자 통신 교환수 9명에게 ‘러시아군이 오면 통신기기는 고장 내고 청산가리 털어먹고 죽으라.’고 명했다고 한다(그러나 일본은 자결한 것으로 포장한 위령비를 사할린에서 가장 가까운 왓카이도에 세우고 전쟁 희생자로 위장하려 함). 역사에서 이런 극단적 선택을 강요했던 일본과 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는 일본인들에 대한 의문은 야스쿠니 신사에서 어느 정도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전쟁에서 사망한 자들의 영령을 위해 제사하고 천황의 참배라는 특별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전쟁 때마다 국민에게 천황숭배와 군국주의를 고무, 침투시키는 데 절대적인 구실을 하였으며 전몰자들은 천황을 위해 죽음으로써 생전의 잘잘못은 상관없이 신(神)이 되어 국민의 예배를 받을 수 있다고 유도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나오는 우리나라와 달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자의든 타의든) 국민들에 대한 철저한 예우가 국가의 그러한 혹독한 명령을 거부할 수 없게 하는 하나의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물론 사무라이라든가 닌자, 카미카제 특공대처럼 국가나 조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밖에 없도록 유도해온 그들 역사를 보면 철저한 국가 우선주의적 인식의 뿌리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국가나 조직의 이익이 개인의 목숨에 우선하고 전장에서는 끝장내지 않고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메시지. 여의치 않으면 독약이라도 먹고(혹은 혀를 물고) 자살을 택해야 했던 그들의 역사를 보면 필리핀 어느 섬에서 원폭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살아있음에 대한 자책으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일본인 이야기가 일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l 긴 승부, 스스로 굴복한 강자에게서 배우려는 근성

그들의 이런 속성 뒤엔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또 하나의 무서운 근성이 있다. 무엇이든 단시간이 아닌 길고 꾸준하게 승부하려는 근성인데, 우리 역사를 말살하려는 집요하고도 끈질긴 시도의 경험을 우리도 가지고 있다. 지금도 많은 국가 예산을 투입하여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일에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는 그들이다. 한반도 이북은 중국의 오랜 속국이었으며, 이남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며 한국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몰고 가려는 조작을 멈추지 않고 있다.

반면 영국, 독일, 미국을 숭앙하다시피 하는 그들을 보면, 철저히 강자에 굴복하며 약자에게 가혹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국가 우선주의적 인식의 뿌리와 맞닿아 있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그들을 단지 야비한 민족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 스스로 굴복한 강자들에게서 배우려는 그들의 자세다. 홋카이도 개척시기에도 미국으로부터 전문가들을 초청해 삿포로 대학을 설립하고 농법을 전수받았으며, 독일에서는 맥주 발효 기법을 배워왔다고 한다.

그들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습성은 오늘을 이겨내는 습관화된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곤 한다. 그런 습성은 내가 당대에서 무언가 완성해내겠다는 생각 대신 조직의 더 큰 결과를 위해 기꺼이 밑거름으로, 과정의 조력자로서의 희생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어떻게 이런 민족성이 생겼던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왜 국가를 그렇게 두려워하게 된 것일까 궁금해졌다. 사할린 일본인 여자 교환수들에게 ‘청산가리 털어 넣고 거기서 죽어라’고 명한다든가, 진주만 공격 시 이미 3번이나 군대를 갔다 온 남자들이 대부분일 정도로 ‘전쟁에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말라.’는 국가로부터의 혹독한 메시지가 그들을 그렇게 살도록 했던 것이었을까.

어느 책에선가 조직과 친분 중에 택하라고 하면 일본인들은 조직을 택하고, 한국인은 친분을 택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에겐 조직의 질서와 원칙이 중요시되고 우리나라는 개인 간 관계를 중시하다 보니 비공식적 뒷거래가 성행하는 것이라고.

한 치의 오차 없는 반듯한 논밭, 정리된 환경, 항상 뒷사람을 생각해서 정리하고 마무리하는 습성. 마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고 조직과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듯한 일본과 일본인들. 당연히 그 사회와 조직은 잘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그런 삶이 개인을 우선시하는 사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원칙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니 그 원칙이 마치 사람을 위한 원칙이 아닌 삶의 목적이 된 듯한 그들에게서 창조적 발상이 나올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본다.

조직(국가)이 철저히 개인에 우선되는 나라. 일본인들은 사할린, 북해도 등 강제 이주의 역사에서 뿐 아니라 미국 이민의 역사에서도 그렇듯 어떤 어려운 환경도 특유의 끈질긴 성실성으로 극복해내면서도 국가에 반기를 들고 요구하기보다 순응하며 복종하는 민족성을 보여주었다.

 

l 헤어질 시간

일본에 대한 이런저런 사색의 시간과 함께한 북해도 여정 마지막 날이 되자 여지없이 한 두 방울씩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잘 지내다 가라고 맑은 날 선사하더니 가는 날 아쉬운지 날이 잔뜩 흐려 있다. 일본 전역이 태풍으로 난리가 아니었고 비행기가 결항, 지연되었다는데 북해도만 말짱하다가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가볍게 그 영향권 내에 들어선 것이다. 원래 북해도가 태풍이 거의 없다고는 한다.

흐린 차창 밖을 보니 또 헤어짐의 시간이 가깝구나 싶었다.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이곳 환경도 느낌도 경험들과도 헤어지고 나면 이곳에서의 시간은 과거로 흘러들어가고 나는 다시 미래를 향해 가게 될 것이다. 우주만물의 원리는 흐름, 순환의 과정인데 우리 기억은 항상 과거를 붙잡고 있다. 모든 인간의 감정은 과거를 회상하는데서 온다. 아니면 과거로 흘러가고 있는 현재라 착각하는 현상 앞에서 벌어지곤 한다. 과거를 추억하는 행위는 유한한 존재들의 어쩔 수 없는 집착이니 말이다.

미래로 향해 가는 아쉬움, 그 아쉬움의 근원은 다름 아닌 인간의 사고, 존재 자체가 우주의 무한생성 소멸의 영원함이 아닌 자신을 중심으로 한 사이클로 바라보는데서 오는 슬프기도 우울하기도 기쁘기도 한 감정일 것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태어남과 동시에 경험하게 되면서 극복하려는 그 감정들이다. 그저 우주의 흐름 속에 놓아두지 못한 채 튕겨져 나온 영원한 이방인, 외부인, 그것이 인간일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느끼게 되는 이런 회상과 달리 인류 역사는 세대를 넘나들며 인류 전체를 지배하는 과거이다. 올바른 역사에 대한 집착, 그것만은 단순한 집착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인 것이다. 최근 북해도 유바리 탄광 근처에서도 일제 때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과 그 주변에 한국 여성들의 위안소가 있었다는 일본인들의 증언 기사가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에 대한 사과는커녕 고대사에서 근대사까지 역사 왜곡을 그치지 않고 있는 그들에 대해 포용이라는 감정이 싹틀 날이 올 수는 있을까?

요즘 우리 고대사에 대한 학자들 간 논쟁이 뜨겁다. 역사는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 고증해가는 학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식민사관 등과 같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날조된 역사관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 진실이 승리하는 인류 발전사가 아니었기에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진실만을 향해 가야 하는 것인지 우문을 던져본다.

편집 : 박효삼 편집위원

김진희 주주통신원  kimjh1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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