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주주이자 '문화공간 온' 석락희이사의 My way

그를 만난 날은 5월 10일, 그러니까 대선 다음날이었다. TV 화면 속의 새로운 대통령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함과 정의로운 결과를 약속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세상, 그 가슴 벅찬 꿈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말하여지는 것만으로 눈이 부시던 하루.

당신을 모두가 기다립니다 / 차가운 난 모두에게 미안하죠
봄이란 그대가 내게 맡긴 그 일을 / 묵묵히 해오며 당신을 기다렸어요
매서운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 / 그들은 땅속 깊이 더 깊이 뿌리내렸죠
그래서 당신을 더 기다리나 봐요 / 아팠던 그만큼 안아주세요
차가운 나는 이제 물러가요 / 화사한 당신이 채워주세요
봄이란 그대 따뜻한 그대 / 봄이란 그대
- 커피소년의 노래 <겨울이 봄에게>

길고 길었던 겨울의 끝, 2017년 나의 봄은 그렇게 왔다.

▲ "대통령 선거는 첫 단추를 채운 거라고 생각해요" ⓒ 참여사회

 

첫 단추를 꿰며

"지인들하고 '문화공간 온'에서 개표방송을 함께 봤어요. 고량주 한 병을 들고 갔는데 사람들이 위스키도 가져오고 케이크도 사오고 그랬죠. 새벽까지 있으려고 했는데 결과가 너무 일찍 나오는 바람에 11시쯤 나왔어요."

그는 SNS에 스스로를 '대통령을 도둑맞은 나라에서 근무 중'이라 소개했다. 대통령 자리를 도둑질한 불의한 권력 밑에서 보낸 지난 4년, 이 나라는 말 그대로 동토(凍土)였다. 그러나 지난겨울 우린 그 얼어붙은 땅을 딛고 서서 봄이 우리에게 맡긴 숙제를 묵묵히 해냈다. 겨우내 우리가 아파했던 만큼 봄이 우리를 따뜻이 안아줄 거라 기대하면서. 그리고 다시 찾아온 5월. 봄은, 아니 우리는, 보란 듯이 꽃을 피워냈다.

"첫 단추를 꿴 거라 생각해요. 촛불시민혁명의 목표가 대통령 바꾸는 것에 있었던 건 아니니까요. 헌법이나 혹은 정당법, 선거법 개정을 통해 앞으로 촛불시민들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되어야겠죠. 시민회의 같은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들을 어떻게 반영할 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구요."

그런 고민의 과정에 직접 참여할 의사가 있냐는 질문에 그는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이번 대선에 대한 아쉬움을 덧붙였다.

"박원순 시장이 되었으면 어땠을까 했죠. 토론할 때 보면 박 시장이 정책이라든가 철학 면에서 더 우수하다고 생각해요. 대선은 조직과 시스템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런 준비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의 인생 이야기에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박원순 시장. 그가 박 시장과 맺게 된 오랜 인연의 시작은 이렇다.

"성공회대와 한겨례문화센터가 공동으로 기획한 NGO아카데미에서 강사로 온 박 시장을 처음 만났어요. 강의가 끝나면 함께 밥도 먹고 막걸리도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분한테 많은 감명을 받았어요. 그러다 제 인생에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박 시장을 찾아갔었죠."

 

리앗과 싸우다

20년이란 세월을 쌓아온 인연. 그 긴 길을 더듬어 올라가다 만난 인생의 쓴 조각 하나.

"한 그룹의 총괄인사부장으로 있을 때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구조조정을 해야 했어요. 1,500명 정도를 내보내야 했는데 그때가 제 직장생활 중 가장 힘든 순간이었죠. 그때 다짐했어요, 내 인생에 다시 이런 일은 하지 않겠다. 이젠 가치 있는 일,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고 싶다. 그래서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있던 박 시장을 찾아가 일하게 해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일단 회원으로 가입해서 이곳이 어떤 곳인지, 뭘 할 수 있을지 먼저 고민해 보라더군요. 그렇게 참여연대 회원이 되었어요."

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한겨레 창간주주면서 참여연대 회원이라. 이쯤 되면 으레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대학 때 학생운동 하셨어요?

"그렇죠. 지하서클에서 사회문제들도 연구하고 열심히 활동했는데, 감옥은 안 갔거든요. 마음속에 부채감이 있었죠. 제가 좀 온건한 입장이기도 했고 또 전공이 경영이다 보니까 나는 기업 속으로 들어가서 바꾸겠다, 이런 마음이었죠."

그가 세상과 벌였던 길고도 지난한 싸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많이 부딪혔죠. 당시 큰 사회문제였던 노사관계에서 역할을 한번 해보자 하고 대우중공업에 노무 기획 쪽으로 들어갔어요. 근데 회사가 하는 짓이 공안기관보다 더한 거예요. 노조원들 감시하고, 지방으로 발령 내고, 협박하고 회유하고. 이러면 안 된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안 먹히더군요."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회사를 나왔다. 그러나 옮겨간 회사에서도 그는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프로세스 개선에 힘을 쏟고 변화를 위해 열심히 제안했다. 직장문화를 민주화시키기 위해 후배사원들을 모아 스터디그룹을 만들기도 했다. 그 와중에 노사문제에 대해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어 대학원에도 들어갔다.

"노사관계대학원을 마칠 때쯤 인사혁신을 하고 싶다고 회사에 제안했는데 끝내 기회를 안 주더군요. 그래? 그럼 내가 찾아간다, 그래서 다른 그룹의 인사부로 옮겨갔어요. 그곳에서 무척 열심히 했죠. 사원들 교류를 위해 동아리도 만들고, 많은 제안들과 혁신 프로젝트를 이끌며 어떻게 하면 지시받지 않아도 자주적으로 운영되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까, 그거 한번 해결해보겠다고 회사동료들, 후배들하고 오랜 시간 함께 고생했는데…. 바로 그 사람들을, 1,500명이나 제 손으로 내보내야 했던 거예요."

그 상처를 극복하는 데 2년 정도 걸린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당시 절실한 마음으로 찾아갔던 참여연대에서 여러 활동을 하고 있을 무렵, 그에게 마지막으로 기회가 왔다.

"후배들 추천으로 새로 시작하는 홈쇼핑 회사에 들어가게 됐어요. 창업임원의 자리였기에 제가 주도적으로 회사를 만들어 갈 수 있었죠. 자율적으로 일하는 문화를 만들고, 페이퍼를 다 없애고 전산시스템을 도입하고. 근데 이 회사가 롯데에 인수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버렸죠."

그가 만들었던 시스템이 한 순간에 다 무너져 버렸다. 어떻게든 후배들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 회사에 남으려는 노력도 해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다른 임원들이 날 얼마나 미워했는지 몰라요. 결국 승진을 안 시켜주니까 승진정년에 걸려서 나오게 되었죠. 근데 나중에 보니 그때 함께 임원 회의 하던 사람들이 횡령, 배임 등으로 저만 빼고 다 감옥 갔어요. 직장민주화는 참 요원한 일인 것 같아요."

긴 이야기였지만 무척 흥미진진했다. 마치 영화를 보듯, 주인공에게 빙의가 되어 해피엔딩을 고대했지만 결과는 씁쓸했다. 그러나 그의 자평은 다르다.

"파란만장한 세월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했어요."

▲ 그는 매일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15키로를 달린다. 1년에 마라톤 풀코스를 12번 정도 완주한다. ⓒ 참여사회

 

신화백 이야기

현재 그는 모든 임금노동에서 떠난, '신화백'이다. 신나고 화려한 백수. 그러나 백수라고 하기엔 하는 일이 너무 많다.

"서울시 시민감사 옴부즈맨으로 4년 정도 활동했어요. 서울시 시정에 대해 시민들이 감사를 청구하면 옴부즈맨들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감사를 하는 제도예요. 이 제도에 박 시장도 관심이 많고 또 제가 권유도 하고 해서 이걸 합의제 행정기구이면서 독립적인 조직인 '시민감사옴부즈맨위원회'로 만들었어요. 그게 시장님하고 저하고 한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죠."

참여연대에서는 운영위원도 했고 회원들의 등산모임인 '산사랑'에서도 18년째 활동 중이다. 이 모임을 벤치마킹해서 희망제작소에 '강산에'라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현재는 '문화공간 온'에 이사로 있다.

"문화공간 온은 낮에는 카페, 밤에는 주점으로 운영되는 협동조합이에요. 진보적인 사람들의 사랑방인데 작년에 적자가 났어요. 이제부터라도 협동조합답게 운영해 보려고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요."

그러나 신화백의 이력 중에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마라톤대회 89회 완주라는 엄청난 기록이다. 그리고 내가 이 글을 쓰는 사이 그는 생애 90번째 마라톤대회에 나갔다.

"산행을 엄청 좋아해서 백두대간 종주도 하고 그랬는데 그 일행 중 한 명이 우리가 하루에 스무 시간씩 산행도 하는데 마라톤에 한번 나가보자 해서,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가 말하는 마라톤의 매력은 '공정함'이다.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발휘해서 출발선에서 결승선까지 가는 단순한 과정. 거기에는 별 다른 특혜도, 경쟁도 무의미하다.

"엘리트들은 순위가 중요하겠지만 우리 마니아들은 그저 자신이 세운 목표만 있을 뿐이니까요. 그래서 때론 동료들하고 같이 달리기도 하고 뒤처지는 이가 있으면 옆에서 같이 뛰며 서로 돕기도 하고 그러죠."

그는 매일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15km를 달린다. 1년에 마라톤 풀코스를 12번 정도 완주한다. 비 오는 날이면 그게 잠시 쉴 핑계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마음을 달리 먹으면 시원한 빗줄기를 맞으며 달릴 수 있는 행운이 되기도 한다고. 어른이 된 후 1km도 달려본 적이 없는 난, 그가 하는 말을 그저 조용히 들을 뿐이다. 그러면서 또 다른 남자,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시안까지 실크로드 12,000km를 걸어갔던 남자의 말을 생각한다.

마라토너에게 그를 훌쩍 추월할 수 있는 적수라고는 단 한 명뿐이다. 바로 자기 자신. 대부분의 스포츠와 달리 마라톤은 다른 사람들을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42km를 뛰어 근육이 마비돼버린 마라토너는 결승선을 넘을 때 비로소 크로노미터(매우 정확한 시계)를 돌아본다. 그리고 행복은 바로 거기, 그가 단축한 몇 초 안에 숨어 있다. - 베르나르 올리비에, 『나는 걷는다』 중에서

 

순례의 길

그의 이야기를 정리하다 문득 중학교 1학년 때 치렀던 백일장이 생각났다. 시제는 '길.' 그 짧은 단어에 생각이 갇혀 한동안 아무 것도 적지 못했다. '길'이란 말이 지닌 농도 짙은 함의를 짚어내기엔 그때 난 너무 어렸다. 인생의 반을 살아낸 지금,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난 이 어려운 단어를 다시 만났다.

"제가 마지막 회사를 그만둘 때, 후배들이 계속 몰려와서 짐을 못 쌌어요. 그래서 마지막 날은 아예 문을 걸어 잠근 채 짐을 쌌죠. 밤 9시쯤 이젠 다 퇴근했겠지 싶어 문을 열고 나왔는데, 제 사무실이 5층에 있었거든요. 근데 문 앞에서부터 시작해서 계단 저 밑까지 몇 백 명이 줄을 서 있는 거예요. 그걸 보는데…."

그가 다시 그날로 돌아가 감회에 젖는다. 나도 그의 옆에 서서 사람들로 가득한 그 계단을 함께 내려온다. 인생에서 많은 걸 이뤄내진 못했다며 아쉬워하는 그에게 난 마라토너의 시계를 보여준다.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어떻게든 세상을 바꿔보려던 나날들. 비록 많은 걸 이루진 못했어도 그가 만들어낸 작은 변화, 그 몇 초 안에 행복이 있는 거라고, 나는 감히 그에게 말한다.

먼 길을 걸어야 하는 순례자들은 빠름보다는 느림을 추구한다. 얼마나 빨리 여정을 끝내느냐보다는 이 길에 얼마나 오래 머무르느냐에 존경이 받쳐지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 여전히 그 길에 머무르며 91번째 도전을 시작할 그에게, 나의 존경을 바친다.

[편집자 주] 박현아 시민통신원은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봉사활동 시작하여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다. 사진은 김경희 미디어홍보팀 간사가 촬영했다. 이 글은 월간 <참여사회> 6월호에 실린 글이다. 현재 석락희 주주는 '신화백'이 아니라 서울교통공사 자회사인 (주)서울메트로환경 대표이사(사장)로 근무하고 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박현아 시민통신원  nemopark@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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