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의 고장 보성군 의병 유적지 답사기] 12 독립운동의 산실로 대종교를 만든 홍암 나철

홍암 나철은 대종교의 종교인으로만 알고 있으나, 사실은 독립운동 기지로서 필요성에서 응용한 것이었다. 김선태 주주통신원l승인2018.04.29l수정2018.04.29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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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산실로 대종교를 만든 홍암 나철

▲ 홍암 나철 기념관                                    사진출처 : 남도여행길잡이

--보성군 의병 유적지 답사 ㅡ2017.11.29.--

때 : 2017년11월29일 10:00‘ ~15:30‘

장소 : 전라남도 보성군 일원

누가 : 보성군의병정신선양회<추진위원 10명>

무엇 : 보성군의병유적지 19개소

대종교의 나철 선생은 분명하게 말해서 종교지도자가 되기를 바랐던 분은 아니었다. 그 분의 뜻은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었다.

아래 선생이 살아오신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한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하기도 하였지만, 오직 우리나라가 일제의 마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여러 차례의 무장 투쟁을 계획하였으나 실패를 거듭하였다.

나철(羅喆)

1863(철종 14)∼1916. 대종교의 초대 교주·독립운동가.

본관은 나주(羅州). 본명은 나두영(羅斗永)·나인영(羅寅永). 호는 홍암(弘巖).

전라남도 보성(寶城) 출신. 29세 때 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이후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와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역임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 출신의 지사(志士)들을 모아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직전인 1905년 6월 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扶助)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의 정객(政客)들에게 제시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일본의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이 각 신문에 발표되자, 나라 안에 있는 매국노들을 모두 제거해야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단도(短刀) 두 자루를 사서 품에 넣고 귀국하였다.

교단에 전하는 말로는 서울에 도착하여 숙소로 걸어가는 도중에 한 백전 도인에게서 두 권의 책을 받았는데, 그 책이 바로 『삼일신고(三一神誥)』와 『신사기(神事記)』라고 한다.

1906년, 다시 한 번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대립관계에 있던 오카모토[岡本柳三助]·도야마(頭山滿) 등을 만나 협조를 구했으나 별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또한 귀국길에 폭탄이 장치된 선물상자를 구입하여 을사오적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7년 1월부터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여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오적의 주살(誅殺)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서창보(徐彰輔) 등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 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崔寅植) 등과 함께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받았다.

고종의 특사로 그 해에 풀려나서 1908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통로에 의한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소득 없이 귀국하였다.

교단에 전하는 말로는 일본에 체류할 때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도인이 찾아와서 단군교를 포교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귀국하자마자 오기호, 강우(姜虞), 유근(柳瑾), 정훈모(鄭薰模), 이기, 김인식, 김춘식(金春植) 등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였다. 이 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다.

곧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 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여 5대 종지를 공포하였다. 또한 단군의 개국과 입도(立道)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하여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이라고 하였다. 1910년 8월에는 대종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911년에는 대종교의 신관(神觀)을 삼신일체의 원리로 설명한 『신리대전(神理大全)』을 발간하는 한편,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祭天壇)과 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을 순방하고 만주 화룡현 청파호(靑波湖)에 교당과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교세의 급속한 확장에 당황한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자 1916년 음력 8월 4일,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 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16일 새벽 이상스럽게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8월 15일 그는 자신이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폐기법(閉氣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그의 유언에 의하여 청파호 언덕에 유해를 안장하였으며, 그 후 대종교에서는 그가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경절(四大慶節)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철 [羅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위의 답사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문서교정이나 보는 임시직에서 일하시던 선생은 나라를 대표하는 사신자격으로 일본에 건너가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扶助)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의 정객(政客)들에게 제시하였지만,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어 헛걸음을 하였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을 없애기 위해 폭탄공격을 시작하였으나, 두 번이나 실패를 하였고, 붙잡혀 신안으로 귀양까지 가게 되었다. 특사로 풀려나자 독립운동의 방향을 종교 활동으로 위장하여 시행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민족종교들은 종교 활동을 기회로 항일운동을 진행 하였기에, 종교 활동을 금지당하면서 국내 활동이 어려워진다. 그러자 만주로 옮겨 활동하면서 대종교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은 대종교와 천도교 같은 민족종교가 앞장을 섰다.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대부분이 종교인이고, 특히 민족종교에 적을 두고 종교 활동으로 위장하여 독립운동을 했었음은 알려진 사실이다.

나철기념관을 들어서니 정말 좋은 자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늑한 칠동마을의 산기슭에 들어 앉아 있었다. 다만 입구에 있는 두 건물이 앞을 가로막아 시야가 가로막히는 것이 아쉬웠고 답답하였다.

높직한 기념관에 들어서기 위해 2단의 계단으로 올라서니, 넓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는 사당이 그리고 오른쪽엔 기념관, 왼쪽엔 사무공간이 배치되어 있었다.

기념관에 들어서니 잘 정리된 게시물들이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다. 나철 선생의 일생을 알리는 패널과 항일운동에 관한 패널, 그리고 대종교에 관한 패널로 크게 구분하여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예산과 정성을 쏟아서 만든 자료들 중에 오기가 있는 부분은 옥에 티가 되었다. 나철 선생이 제거하고자 하였던 매국노 오적을 기재한 패널에는 그 신분과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가하면, 오적인데 6명의 이름이 올라있기까지 하였다. 하루 빨리 고쳐 놓아야 할 것이라고 해설사에게 지적하였더니, “군에서 안 해주니까 우리들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러 차례 건의를 드렸는데 아직도 안 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잘 좀 말씀드려 주세요.”하며 오히려 우리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예산으로 운영하는 일이기에 거쳐야 할 단계들이 있겠지만, 외지인들이 많이 찾는 이런 시설의 수정은 시간을 다투어야 한다고 군 당무자에게 건의하고 싶다.

마당에 나와서 또 다시 논쟁이 일었다. 배수로의 뚜껑에 새겨진 나철선생의 모습과 [독립 운동의 아버지]라 새겨진 철판이 문제였다. “널리 알리자는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지금 이렇게 밟고 지나야 하는데, 우리가 선생의 상과 새겨진 글씨를 밟고 지나는 게 맞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올적마다 이 판을 보면서 망월동 5.18국립묘지에 들어서면서 바닥에 누운 전두환의 이름이 새겨진 돌 판을 밟고 지나는 것이 연상되어서 영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하는 말에 대부분 동의하였고, 이것도 다른 방법으로 교체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나와 대종교와의 인연은 참으로 이상하게 얽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다니던 순천사범병설중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치던 나종순 선생님은 나철 선생의 손자로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유독 나를 귀여워해주셨고, 시험을 보면 채점을 시작하기 전에 내 시험지를 뽑아서 정답지로 사용할 만큼 내가 지리과목을 좋아하게 만들어 주셨던 분이다.

나는 사범학교를 졸업하였지만, 나 때문에 진학을 못한 체 강의록으로 공부를 하고 있던 동생을 선생님의 형이신 나종윤 교장선생님이 운영하는 중등과정 미인가학교인 순천고등공민학교에 입학시켜 뒤늦게나마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하셨다.

이렇게 두 형제분의 도움과 사랑을 받은 나인데, 1980년에 서울에 집을 장만한 곳이 현재까지 홍은동에 있는 대종교의 본당이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홍제동이 되었다. 그래서 1980년 어느 날인가 대종교 본당을 찾아가서 [환단고기]를 번역하여 출판을 하신 강수원 선생을 만나서 <이 환단고기를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게 고쳐 쓰고 싶다.>고 하여 허락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환단고기를 옮겨 쓰는 작업을 하다가 너무 황당한 내용이라고 폄하하는 제도권사학자들의 비난 속에서 출판조차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도중에 포기하고 말았다. 지금도 그 때 작성한 원고와 환단고기가 책장 한 구석에서 세상에 나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이 나철기념관을 방문하고 나서기 전에 우리 일행은 “모인 김에 오늘 이 뜻깊은 행사가 이것으로 끝나지 않게 모임을 만들면 어떻겠습니까?”하는 안대순 어르신의 제안에 모두 동의하였다. 이름은 [보성의병정신 선양회]라 하고 우선은 추진위원회를 발족하기로 합의를 하였다. 현장에서 입회비를 납부하기도 하고, 임시 회장과 간사도 선출하는 등 회의 모습을 갖추는데 불과 10여분도 걸리지 않았다. 회장은 가장 연상이면서 오늘의 행사를 추진하여 주신 안대순 어르신을, 총무 겸 간사로는 김용국 향토사연구소장을 뽑았다. 절반이상이 회비를 선납할 정도로 열의가 넘쳤다. 오늘의 행사로 모두의 마음이 그만큼 잘 뭉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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