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는 우리 것] 마광남 주주통신원

사람을 쓰는 자가 몸을 굽히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몸을 펴도록 하려는 것이요 그 도리가 바르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물에 빠진 자를 구하려는 자는 물에 발을 적시지 않을 수 없고 도망하는 자를 쫓는 자는 뛰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모든 언어 동작에서 항상 사람을 써서 치안을 이룩하는 데 뜻이 있기 때문이다.

마땅히 구부려야[屈] 할 때 구부리지 않으면 그 막힌 것을 통하게 할 수 없고, 마땅히 굽혀야[枉] 할 때 굽히지 않으면 그 일을 처리할 수 없다.

만약 꼭 막힌 사람이 사람을 쓰는 위치에 있어 다만 자존심만 간절하고 치안을 도모하는 정신이 없으면, 관직의 출척(黜陟)을 역도(役徒)를 부리는 것같이 생각하여 인재(人才)의 진퇴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을 것이다.

곧기만 하고 굽히지 않으면 어떻게 대임(大任)을 감당하며, 모나고 둥글 수 없다면 움직일 방법이 없다.

심지어 '다투어 진출하려는 자도 임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겸손하여 물러가는 자를 어느 여가에 등용하며, 굶는 자도 봉록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찌 부유한 자를 참여시키겠는가.'라고까지 하는데 이것은 나라를 그르칠 말이다.

심지(心智)가 아는 바만 믿고 그 아는 바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장해(戕害)가 되고, 자기 이목(耳目)으로 보고 듣는 것만을 중히 여기고 총명(聰明)에 막힘이 있음을 모르는 것이 혼미한 것이다.

남을 존대하면 자기가 존귀해지고 자기를 굽히면 남도 굽히는 것은 교접(交接)의 예(禮)에도 높일 만한 것인데, 하물며 치안을 위해서 몸을 굽히는 것이겠는가.

사람을 쓰기 위해서 자기의 심지(心志)를 굽히는 것이 성인(聖人)의 행동이요 군자의 덕(德)이다.

출처: 인정 > 인정 제24권 > 용인문 5(用人門五)

마광남  wd34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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