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북대방·남대방: 순장제 vs 형사취수제

우리는 언제부터 공자왈맹자왈 하면서 살았을까? 공자왈맹자왈에 포획되기 이전의 당신과 나의 모습을 어떠하였을까? 그리고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당신과 나는 '공자왈맹자왈'의 그물에서 벗어났을까?

24화의 영화 <붉은 수수밭>은 중화라는 이름의 늙은이를 죽인다. 29화의 영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는 중화라는 고매한Silver 수컷Stallion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의지 내지 기대를 그려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작가의 희망사항일 뿐, 우리는 여전히 공자왈맹자왈의 지배를 받고 있을 것이니, 당신 지갑에 고이 간직한 1천 원짜리 5천 원짜리와 5만 원권 지폐를 보라. 천 원짜리 퇴계 이황과 5천 원짜리 율곡 이이, 5만 원짜리 신사임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율곡 이이의 대표적인 저서는 <격몽요결擊蒙要訣>이다. '격몽擊蒙'은 '몽蒙을 손뼉[擊]친다'는 말이다. 그들이 왜 '몽蒙'을 손뼉[擊]치는지 주역 제4산수몽山水蒙괘를 보시라.

 

蒙 亨             몽蒙은 ‘주고받기[亨]’라

   匪我求童蒙     비적[匪]이 굶주리며[我] 동몽童蒙을 회유[求]하면

   童蒙求我       동몽童蒙(군림욕의 몽매)은 공작새entity[我]를 구원[求]한다.

   初筮告 再三瀆  최초 점쟁이가 발표[告]하면 제2 제3자가 (모방하여)더럽히매

   瀆則不告 利貞  더럽힌즉 고告하지 못하니 착취[利]하면 죽음[貞]으로 부활[貞]하라.

初六 發蒙         무릅씀[蒙]을 일으켜라[發].

     利用刑人 用說桎梏 용用2를 부추기며 사람을 벌하면 용用1은 질곡을 감수하리니

     以往吝       욕망[用2]을 진부화[往]함으로써 욕망[用1]을 저지[吝]하라.

九二 包蒙         불깐 돼지들의 꿈[蒙]을 수태[包]하라.

     吉納婦       주둥이[吉]가 부인[婦]의 씨(절개)를 (우아한 문장에)받아들이면[納]

     吉子克家     주둥이[吉]의 자식[子]이 불깐 돼지들의 집[家]을 정복[克]하리라.

六三 勿用取女     용用을 금기[勿]해야 여자를 취한다.

     見金夫不有躬 금부(有 문화인)를 차별화[見]하면 不有(=无)가 몸소 행동[躬]하리니

     无攸利       무无는 감쪽같이[攸] 착취[利]하리라.

六四 困蒙吝       가난[困 생존욕구]에 몽매[蒙]하면 식사를 기피[吝]한다.

六五 童蒙吉       군림[童 존경욕구]에 몽매[蒙]하면 선비가 밥을 먹는다.

上九 擊蒙         생존욕구와 존경욕구의 몽매蒙昧(몽매한 꿈)를 손뼉[擊]쳐라.

     不利爲寇     불리不利(=用)가 보이지 않는 도적[寇]을 사랑[爲]하면

     利禦寇       이利는 보이는[示] 도적[寇]을 따라[御]가리니

 

우선 '주역周易'의 정체를 바라보라. 주역은 백성의 욕망-생존욕구와 존경욕구-을 조작하여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는 공작새인간들의 성전聖典이다. 생존욕구에 몽매蒙昧한 백성, 모자란 까마귀처럼 도착된 존경욕구의 꿈[蒙]. 그 두 개의 '몽蒙'을 손뼉[擊]치는 것이 성인군자들의 연금술이었으니,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擊蒙要訣>이라는 책을 쓰고 그 책을 독파하여 과거에 장원급제한 유생들이 몽매한 백성을 지배하는 사회 '당신들의 조선'이 아니었던가. 삼봉 정도전,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등으로 이어지는 해동공자들을 배출하며 끊임없이 백성을 착취하던 유가儒家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환란의 역사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드러나자 주리론 주기론 사단칠정론 등 탁상공론을 펼치며 악착같이 죽어가는 중화주의를 부활한다. 그 모순과 부조리의 역사에서 깨어나는 역사가 '동학東學'이라는 점에 누구도 반론하지 않으리라. 문제는 그 이전의 실학이다. 실학은 성리학에 대한 반성 내지 민중을 깨우치는 각성의 학문이었을까?

"아하, 이용利用이 된 연후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厚生이 된 연후에야 정덕正德이 될 것이로다."

열하일기(6월 27일자)에서 연암 박지원은 이렇게 토로한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연암이 '정덕-이용-후생'하는 바꾸어 말하면 '정덕正德'을 숭배하는 성리학 프레임-덕본재말德本財末-에서 벗어나 利用을 우선하는 실학(북학)으로 전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이 利用이고 무엇이 正德인가. 6월 27일자 일기에서 청나라의 정교한 기술(利用)을 부러워하던 연암은 서서히 그 너머를 바라본다. 잘 만들어진 똥거름은 수수밭에 뿌려지고, 수수밭에서 생산된 수수 짚은 벽돌가마의 땔감으로 사용되고, 그렇게 생산된 벽돌은 웅장한 성곽을 쌓고, 그 웅장한 성곽은 만리장성 너머의 무도한 오랑캐들을 백성들에게 각인하며 중화주의를 강화한다. 똥거름과 벽돌의 利用은 결국 중화주의 선전이라는 正德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결국 "아하, 이용利用이 된 연후에야 후생厚生…"은 박식하지만 중화의 프레임에 갇힌 주인공 연암의 한계다. '열하일기는 기행문이 아니라 바보 연암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니까.) 그것이 고증학이라는 이름으로 변신한 청나라의 중화주의라면, 청나라를 배운 조선(정조)은 가짜 천도설을 유포하며 막대한 혈세를 쏟아 부어 수원화성을 쌓지 않았던가. 다산 정약용은 거중기라는 신기술(利用)을 도입하여 성곽쌓기에 일조하였으니, 그 성곽 역시 정조대왕의 지극한 孝와 200여 년 전 강토를 유린했던 오랑캐들-청나라와 왜구-을 환기시키며 백성들의 가슴에 중화라는 이름의 正德을 부활하였으리라. 조선을 건설한 성인이 삼봉 정도전이라면 삼봉 퇴계 율곡을 계승한 최후의 중화주의자는 다산 정약용. 그러한 자신의 정체를 다산은 자신이 쓴 최고의 걸작 <목민심서>에 여실히 드러낸다. 목민심서 머리말을 다산은 '목민심서牧民心書'는 '목민牧民하는 심서心書'라는 희한한 주장으로 도배한다. 그러나 생각하는 선비들이라면 '목민심牧民心하는 서書'임을 간과하지 않을 터, 수원화성이 忠孝烈을 사랑하고 오랑캐를 혐오하게 만드는, 그럼으로써 죽어가는 중화주의를 부활하는 성곽임을 간파하리라. 그러니 다산과 실학을 재고하시라. 그들은 정조의 가짜변혁(중화부활)의 꿈을 기획하였음을. 그렇다면 연암의 北學은 무엇을 하였을까? 역사학자들은 '청나라(北)를 배우는 북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연암의 北學은 '공자의 學(주자의 성리학은 물론 청나라의 고증학까지)을 탈출하는 배학北學'이었음을 기억하시라.

 

이쯤에서 다시 고대로 돌아가자.

2002년 시작된 중국의 동북공정을 계기로 고대사에 관한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면서 문화계도 오랫동안 방치(?)했던 고구려를 주목하고 있다. 드라마로는 2006~2007년에는 mbc가 <주몽>과 <태왕사신기>를 연달아 방영하였고, 2011~2012년에는 kbs가 <광개토태왕>을 내놓았다. 뮤지컬로는 황해도 안악군의 고분(안악3호분)을 소재로 한 <안악지애史(2004년)>와 널리 알려진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이야기를 소재로 한 <왕자호동(2014년)>가 눈에 띈다. 게다가 이제 한 달 후에는 영화 <안시성>이 개봉될 예정이라고 한다.

 

▲ 2014년 국립발레단이 공연한 뮤지컬 <왕자호동> 포스터

그러나 광개토왕비 삼국유사에 담긴 우리 역사의 키워드가 '유화문명'임을 기억하는 독자들로서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으리라. 주몽이든 광개토왕이든 양만춘이든 간에 그들이 싸워야 하는 이유는 '유화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서'이며, '고조선과 고구려는 중국史의 일부다'라는 동북공정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길은 '우리는 중화가 아니라 유화문명이다'라는 간명할 대답에 있을 것이니 말이다.

 

▲ 2004년 (주)비단엔터테인먼트가 안악3호분의 미스터리를 소재로 연출한 뮤지컬 <안악지애사>의 한 장면

만일 역사가들이 '유화문명'을 이야기 하였더라면 '유화부인'이라는 이름의 뮤지컬이 10편쯤은 창작되었으리라. 그러나 역사가들은 역사를 거꾸로 가르쳤으니, 문화예술인들은 우리 민족의 창세기라 할 수 있는 유화부인을 외면한 채 고작해야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이야기를 우려먹다가 새로운 소재를 찾는다는 것이 누가 뿌린 씨앗인지도 모르는 안악3호분에 눈길이 꽂혔으니, 고색창연한 유물이라면 무턱대고 중화문명이라고 우기는 중국인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안악3호분 벽화1. 분묘의 주인은 호화로운 주렴이 드리워진 가운데 좌우 시중을 거느리고 제왕처럼 군림하고 있다. 이것이 고구려왕의 모습이겠는가?
▲ 안악3호분 벽화2. 분묘의 여주인 역시 뚱뚱한 몸뚱이에다가 호화로운 장신구로 치장한 재 몸종들을 거느려 군림하고 있다. 이것이 고구려 귀부인의 모습이겠는가?
▲ 안악3호분 벽화3. 고구려왕이라면 이렇게 절대적인 권위를 과시하며 백성 위에 군림하지 않았으리라.

안악3호분은 고구려왕의 무덤이 아니다. 근거가 무엇이냐고? 지금껏 안악3호분 벽화가 보여주는 지배자의 생활상들은 광개토왕비 삼국유사 무용총수렵도(제5화) 무용총무용도(제8화) 오호분4호묘(제7화) 등에 그려진 고구려의 정신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좀 더 손에 잡히는 이유가 필요하다면 일찍이 황해도 안악 지방을 파고들었던 대방帶方의 이야기 삼국유사 '북대방' '남대방'편을 보시라.

 

‘북대방北帶方’편

北帶方本竹覃城     나라를 버리고[北方] 도리를 짬뽕[帶方]하면 죽담성을 모방[本]한다.

新羅弩禮王四年     신라 노례왕弩禮王(24~57년)이 나이[年]를 은폐[四]하니

帶方人與樂浪人     대방帶方 사람들은 낙랑樂浪 사람을 예찬[與]하며

投于羅             신라에 투사投射하였다.

{此皆前漢所置二郡名 {이들은 전한이 설치[所]한 금기[置]하고 분리[二]하는 군의 이름인데

其後僭稱國}         그 후예들은 나라[國]를 참칭하여

今來降             꼬치로 꿴 3인[來]을 연출[今]하며 트리클다운[降]한 것이다.}

 

‘남대방南帶方’편

曹魏時始置南帶方郡 조조가 씨 뿌리매 위가 풍류를 일으켜[始南] 대방군에 이식하였다.

{今南原府}         {풍류[南]를 첨단화[今]하면 조정[府]을 근원[原]하리라.}

故云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帶方之南海水千里 “하부구조를 경계하여 풍류가 지배하면 획일의 물이 천리를 물들이고

曰澣海           물[氵]을 교육[曰]하여 착취[幹]하면 물[氵]은 반복[每]된다.”

{後漢建安中          {후한後漢 건안建安(196~220년)시대에 중화[中]가

以馬韓南荒地爲帶方郡 마한의 풍류가 황폐한 땅으로 하여금 대방군을 사칭[爲]하게 하여

倭韓遂屬是也}        한韓(고구려)을 포위[倭]하였으니 한韓이 다[遂]하여

                   족속을 죽이고[遂屬] ‘시是’를 수호[屬]하였던가!}

 

제31화 '마한'편과 제35화 '낙랑국'편은 삼국이 건국될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굳건한 연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낙랑국 멸망의 역사에서 균열의 조짐이 엿보인다. 신라의 제3대 노례왕弩禮王은 어찌하였던가? 2대 남해왕이 죽음에 임하여 아들(유리)과 사위(석탈해)를 불러 유언하였다. "내가 죽은 후에 너희 朴 昔 두 사람은 나이순으로 보위를 이으라.[吾死後 汝朴昔二姓 以年長而嗣位焉]" 남해왕이 죽었을 때 탈해는 38세였고, 유리의 나이는 알지 못하였다. 탈해는 지혜가 많은 사람은 잇금이 많다고 하므로 잇금으로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자고 제안하였고, 떡을 입에 물고 시험해보니 유리의 잇금이 더 많아 유리가 왕이 되었다고 한다.(이상 '삼국사기' 참조) 그러나 태자인 유리의 나이를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래서 일연은 "노례왕(유리)이 나이[年]를 은폐[四]하였다"고 한 것이다.(따라서 제35화 '낙랑국'편 6~8행의 번역을 이렇게 번복한다. “혁거세가 다 함께[十] 씨 뿌리기[年]를 거듭[三]하자 낙랑 사람들이 ‘붕어빵[又]’을 업그레이드[來]하여 투사[投]하였으나 제3대 노례왕弩禮王은 나이[年]를 은폐[四=罒]하였다.")

노례왕(유리)은 나이[年]를 은폐[四]하였다. 그것은 아버지의 명령에 대한 불복이며,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유교적 위계질서를 거부함이다. 낙랑 사람들은 열심히 중화주의를 선전하였지만 백제와 신라는 굳건하게 유화의 영혼을 지켰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낙랑국'편 '남대방'편 '북대방'편을 관통하는 낙랑질의 역사를 정리해보자.

혁거세가 백성들과 함께 無(의식, 가치)의 씨를 뿌리기[年]를 거듭[三]하자 낙랑 사람들은 ‘붕어빵[又 답습하는 중화인]’을 업그레이드[來]하여 투사[投]하였다.(낙랑이 주몽 혁거세 온조가 건국할 때 중화주의에 기초하게 하려고 그들을 회유하다가 실패하였다는 이야기는 '일본서기'에 있다.)

그러나 제3대 노례왕弩禮王은 나이[年]를 은폐[四]하였으니, 중화주의를 거부한 것이다.

150여년 후 漢이 멸망하자 조조는 죽음으로 중화의 씨를 뿌렸으니 위나라는 조조의 이름으로 차별화된 중화주의를 대방군에 이식하여 마한 지배계급의 사칭-백성들의 모방-을 자극한다. 200여 년 전 최리崔理가 낙랑군을 사칭하여 낙랑국을 세웠듯이 대방군을 모방한 마한 땅의 어느 족장은 대방국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제왕처럼 군림하였으리라. 

"馬韓의 풍류가 황폐한 땅으로 하여금 대방군을 사칭하게 하여 韓을 포위하였으니"

馬韓은 한반도 남부의 韓(우리가 '삼한'이라고 배운)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뒤의 韓은 누구인가?

제31화 '마한'편을 환기하라. "고구려[麗]를 칭송[稱]하는 까닭에 ‘마한馬韓’이라 한 것이다.[故稱麗爲馬韓]" 여기서 稱麗≒馬韓이다. 칭송[稱]은 '사랑'으로서 '수컷질[馬]'과 통하는 언어라면 ‘마한馬韓’은 韓(고구려)을 수컷질[馬]하는 나라가 아닌가. 고구려는 서방질하고 백제 신라는 오입질하는 것, 그것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연대'다.

"한韓이 다[遂]하여 족속을 죽이고[遂屬] ‘시是’를 수호[屬]하였던가!"

韓은 고구려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고구려의 영혼을 의미한다. 일연은 '낙랑-대방'으로 이어지는 중화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고구려(韓)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일연은 말하지 않는다. 백제와 신라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였던 안타까운 역사를.

"한韓(고구려)을 포위하였으니 한韓(고구려의 영혼)이 다[遂]하여 족속을 죽이고[遂屬] ‘시是’를 수호[屬]하였던가![倭韓遂屬是也]"

우선 화법(倭韓遂屬是=倭韓+韓遂+遂屬+屬是)을 바라보라. 도덕경 제9장에서 노자는 공작새 한 마리의 장렬한 죽음으로 부활하는 공작새낙원(중화)을 이렇게 통탄한다. "공功이 다하여[遂] 백성이 몸[身]을 따르면[遂] 몸[身]이 물러나는 게[功遂身退] 하늘의 도道였던가![天之道也]" 노자의 이어달리기화법(功遂身退=功遂+遂身+身退)이 죽음으로 영생하는 중화를 향한 조롱이라면, 일연의 이어달리기화법(倭韓遂屬是=倭韓+韓遂+遂屬+屬是)은 상생하며 영원히 이어지는 유화문명에 대한 뿌듯한 긍지를 담고 있다.

이제 그들의 '죽음의 법칙'과 우리의 '상생의 법칙'을 응시하라.

"조조가 비움[置]의 씨[時]를 뿌리매 위魏가 풍류[南]를 차별화[始]하여 대방군에 이식[置]하였다."

조조는 어떻게 중화의 씨를 뿌렸을까? 위魏나라가 대방군에 조조의 중화주의를 이식하였다는 흔적은 어디에 있을까?

조조曹操의 자는 맹덕孟德, 세뇌교육[德]의 달인[孟]이다. 널리 알려진 일화를 보자.

중국 후한시대 채옹蔡邕(132~192)이라는 대학자에게 채염蔡琰(자는 문희文姬)이라는 무남독녀가 있었다. 채문희는 박학하고 재변이 있었으며 음률을 잘하였다고 한다. 유복한 집안의 박학다재한 채문희는 하동河東의 위중도衛仲道에게 시집갔지만 남편이 일찍 죽었고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왔다. 문희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흥평興平(194~195) 연간에 흉노가 침입하여 채문희를 납치하였으니, 오랑캐 땅으로 끌려간 채문희는 거기서 12년을 머물며 좌현왕의 두 아들을 낳았다. 채옹에게 후사가 없음을 애석히 여긴 조조曹操가 사자를 보내 천금을 치르고 문희를 속량贖良하였다. 오랑캐 땅에서 돌아온 채문희는 흉노에게 잡혀간 정황, 그들에게 당한 능욕, 타향에서의 애환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조조의 구원과 귀향, 자식과의 가슴 아픈 이별을 담아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이라는 대서사시를 남긴다.

▲ 문희귀한도-길림성박물관. 흉노에서 12년을 살다가 한나라로 돌아오는 채문희의 모습에서 옛 중국인들의 미인관이 엿보인다.

독자들은 충분히 간파하리라. 채문희가 사랑하는 두 아들을 남겨두고 피붙이 하나 없는 한나라 땅으로 돌아오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화의 백성들은 '개돼지 같은 오랑캐'를 손가락질하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으니, 유방의 漢나라가 기울어가는 역사의 굽잇길에서 조조는 그렇게 영원한 중화를 위한 부활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

결국 삼국유사 '낙랑국' '남대방' '북대방'편은 낙랑공주이야기와 채문희이야기로 엮이어 있다. 낙랑국이 멸망하자 대방 사람들은 '낙랑공주이야기'를 퍼뜨려 백제신라에 투사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150년 후 대방은 조조가 기획한 채문희이야기로 마한의 문화 불모지를 공략하였으니, 그 문화 불모지가 황해도 안악군 일대이며 '안악3호분'은 바로 그들이 남긴 찬란한 중화주의의 유물임을 추론하기는 어렵지 않으리라. 왜 '안악3호분'은 고구려의 무덤이 아니라 대방의 무덤인가? 다름 아닌 '순장묘'라는 사실이다. 어떤 학자는 '안악3호분'을 고구려의 예외적인 순장묘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을 '순장'하지 않는, 미천한 비복일지언정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고구려의 정신을 한번이라도 생각했더라면 그 학자는 '고구려의 예외'가 아니라 '고구려 무덤이 아님'을 간파하였으리라.

고구려는 사람을 순장하지 않는다. 그 충격적인 역사-상생의 역사-에 대한 일연의 증언을 다시 음미하라. "한韓이 다[遂]하여 족속을 죽이고[遂屬] ‘시是’를 수호[屬]하였던가!" 중화는 조조와 대방국의 왕의 무덤에 수많은 사람을 함께 매장하여 중화(是)를 부활하지만, 유화문명은 족속을 순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연 그러하였을까? 위나라가 '죽음의 문화(순장제)'로 죽음의 문명(중화문명)을 부활하며 대방군을 재건하던 그 시기 고구려 10대 산상왕(197~227)의 이야기를 생각하라. 형인 제9대 고국천왕이 서거하자 산상왕은 형수인 우씨부인과 결혼하여 왕위를 계승한다. 죽음의 문화로 부활하는 죽음의 문명에 대항하여, 상생의 문명을 여는 사람을 살리는 문화(형사취수제)를 채택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짤막한 문장에 필자는 너무나 장황한 해설을 붙이고 말았다. 그것은 다분히 간명하게 정리하는 기술이 부족한 탓이기도 하지만, 일연의 문장에 내포된 '다양한 맥락' 때문임을 독자들은 이해하리라. 그 맥락context을 간과하면 문장text를 제대로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니, 제35화에서 필자가 노례왕과 탈해왕의 잇금이야기를 간과하여 오역한 '四年'은 좋은 본보기일 것이다.

맥락context을 바라보라. 어떻게? "道가 (사람을)인도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道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노자는 道와 사람을 연결하는 철학의 맥락을 묵시한다. 그러면 역사의 맥락은 어디에 있을까? 부여에는 순장제가 있었고, 고구려에는 형사취수제가 있었다. 순장제는 사람을 생매장하는 문화이며, 형사취수제는 생매장될 형수님을 살리는 문화다. 문학의 맥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철학과 인간, 역사와 인간, 문학과 인간. 그렇게 집요하게 사람을 성찰하는, 그럼으로써 사람을 살려내는 그런 문사철(文史哲)로 돌아가기를 기대해본다. 

편집 : 김동호 객원편집위원

오순정 시민통신원  osoo20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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