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청산으로 멋진 대한민국을 물려주자

반공의 핏자국 위에 세워진 나라, 이승만 정권! 제목이 너무 무섭고 섬뜩합니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역사의 진실입니다. 한국현대사 최고의 권위자 한홍구 교수는 일찍이 대한민국 전체가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집단 학살이 자행된 거대한 공동묘지라는 뜻이지요. 최소 3만 명에서 최대 10만 명이 학살되었다는 제주 4・3학살(1948)이 그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1949년 내내 38선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는 교전이 벌어집니다.

그 와중에 좌익 혐의를 받는 민간인 학살이 수시로 이루어졌지요. 1949년 12월 경상북도 문경 석달 마을 학살 사건은 일찍이 세상에 알려진 대표적인 사건일 것입니다. 경북 경주시 내남면 학살 사건은 최근에 와서야 언론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서 국회의원을 3번이나 한 인물에 의해서 저질러진 만행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그랬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도영 박사가 1990년대 후반 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굴한 문서와 사진자료에는 끔찍한 학살과 처형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1950년 4월 13일(?) 서울 북쪽(오늘날 태릉 근처)에선 좌익 혐의로 체포된 사람들 39명을 처형합니다. 40명도 안 되는 인원을 처형하기 위해 200명의 헌병들이 동원되었지요. 사진 속에는 총에 맞아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권총을 빼들고 머리에 확인 사살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 장면을 사진에 담은 미군 장교는 그런 처형 장면이 잔혹하지만 당시 남쪽 사회에서 벌어진 일상적 풍경이라고 기록했습니다.

▲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자행된 민간인 처형장면. 1950년 4월 태릉 근처에서 좌익혐의자 39명에 대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출처 : 이도영 박사 제공)

6・25전쟁이 발발하고 개전 초기 7-9월 석 달 사이에 대한민국 전 국토에 걸쳐 민간인 30만 명 정도가 예비 검속돼 집단 학살됩니다. 군인과 경찰, 그리고 극우청년단체에 의해 자행된 학살이었습니다. 이른바 ‘국민보도연맹학살’ 사건입니다. 인민군이 점령하지 못한 경주, 포항, 울산, 부산 등 낙동강 이남지역에서도 예외 없이 자행된 학살이지요. 부산에서만 1만 명 가까이 집단 학살되거나 영도구 동삼동 앞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아직도 한국사 교과서 8종 어디에도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전혀 서술돼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죽였는지 아직도 역사학계에선 정확한 진상조차 조사되거나 연구된 적이 없습니다.

▲ 부산지역 보도연맹원 등 정치범 집단 학살장소(영도구 동삼동 소재). 수천 명에 이르는 사상범들을 적법한 절차 없이 처형한 뒤 절벽 아래로 수장시킨 학살 장소이다. 현재는 김소운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출처 : 하성환)

분명한 사실은 그 학살을 자행한 장본인이 김창룡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반민족행위자들, 바로 친일세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을 비호한 미군이 한국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우스만 대위였습니다. 미국은 냉전이 굳어지는 국제정세 속에서 학살과 처형을 적극적으로 묵인하거나 방조했지요. 마치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잔혹한 학살이 빛고을에서 자행되고 있었을 때 광주 시민들의 기대와 달리 미국은 전두환의 야만적 학살을 묵인하고 방조하였듯이 말입니다.

5・18 광주항쟁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 가운데 하나가 미국의 실체에 대해 이 땅의 민중들이 회의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미군은 정말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주둔하고 있는 것일까? 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나 85년 서울 미 문화원 점거 사건은 그런 배경에서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80년대 내내 반미(反美)는 곧 빨갱이로 몰렸고 미국을 비판하는 칼럼조차 목숨을 내걸고 써야 했던 시절입니다. 미국 비판=반미=빨갱이로 공식화된 사회였기 때문이지요. 국회의원이 '대한민국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구속된 게 1986년 사건이었으니까요.

오죽했으면 지금 40대 후반 ~ 50대 초반 선생님들이 다녔던 대학생 시절, 운동권 학생들은 미국(美國)을 '꼬리 미'자를 써서 미국(尾國)이라고 했을까요! 전형적인 친미국가 일본조차 하지 않은 것을 이승만은 미국(米國)을 미국(美國)이라 부르고 전 국민에게, 그리고 전 교과서에 그렇게 가르치도록 썼습니다. 대신 일제 때부터 써왔던 인민, 노동이란 말을 불온시했지요. 오늘날 노동이란 말은 써도 인민이란 말은 거의 쓰지 않는 것은 이승만의 반공국가 탄생과 관련이 깊습니다. 분단이 낳은 언어의 단절로 기형적인 현상입니다.

해방 공간 그리고 남쪽에서 분단정권이 수립되는 그 시기! 고문과 학살, 집단처형은 왜 일상적으로 자행되었을까요? 그리고 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혹하게 집행되었을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역사적 상상으로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한홍구 교수의 표현대로 말씀드리면 당시 학살을 통해 한반도 남쪽에서 완전히 씨를 말려버렸다고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민족을 생각하고 사회정의를 생각한 자들을 완전히 싹쓸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4・19혁명은 그 싹쓸이한 박토 위에서 발생한 자생적인 거대한 함성이었습니다.

문제는 이승만의 반공국가 건설에 서정주, 김동리 등 내로라하는 당대 문인들이 문화선전대로 나서서 반공국가 건설에 앞장섰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그네들 작품이 국어교과서는 물론이고 지금의 40대 이상 어른들에겐 전혀 낯설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시와 소설에서 한국문단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그냥 주어진 게 아니라는 뜻이지요. 아직도 여의나루역(지하철 5호선) 3번 출구로 나가면 왜색 풍 짙은 대표적인 친일화가의 작품이 버젓이 대로변에 공개돼 있습니다. 무심한 대중들은 그냥 지나칩니다.

▲ 서울 여의나루역 길가에 있는 운보 김기창의 작품. 그는 친일 1세대 화가 이당 김은호 화백의 제자이자 살기등등한 <적진육박>(1944) 등 친일작품을 남긴 친일 화가이다(출처 : 하성환)

마치 남영 역 플랫폼에 내리면 박종철 군이 10시간의 고통 속에 죽어간 남영동 대공분실 쥐색 건물을 무심히 지나치듯이 말이지요. 플랫폼에 내리자마자 그대로 까무잡잡한 쥐색 건물이 전면에 보이는데도 대중들은 일상의 삶에 파묻혀 지나칩니다. 유심히 보면 고문실 5층 창문이 유독 작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도 말이지요. 그러나 일상의 대중을 탓할 일도 아닙니다. 남영(南營) 역 이름 자체가 조선왕조를 그대로 이어받은 일제 식민지 냄새를 그대로 안고 있으니까요. 해방된 지 73년이 지나가는데 아직도 '남쪽 병영'이라는 지역 명을 그대로 쓰고 있으니 제정신인 나라인가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 남영 역(지하철 1호선) 플랫폼에서 바라본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기념관)유독 5층 창문이 좁다. 5층 전체가 고문실이었다. 한국 제1세대 건축가 김수근이 1976년 박정희 정권 시절 설계한 건축물이다(출처 : 하성환)
▲ 남영 역(지하철 1호선) 플랫폼에서 바라본 옛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기념관)유독 5층 창문이 좁다. 5층 전체가 고문실이었다. 한국 제1세대 건축가 김수근이 1976년 박정희 정권 시절 설계한 건축물이다(출처 : 하성환)

내년이면 3・1 민족해방운동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탄생 100주년 되는 해이지요. 건국 100주년입니다. 일제강점기 최대의 민족독립운동이었던 3・1운동을 정치학자들은 부르주아혁명이라고 명명합니다. 시민혁명이라는 뜻이지요. 7500명 이상 학살되고 수만 명이 구금되거나 부상을 입는 참극으로 3・1운동이 끝나지만 1920년대 전반기 해외 무장독립투쟁의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폭탄과 권총을 두르고 적의 심장부를 강타했던 의열단의 결성이나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쟁, 정의부 국내진공작전 등이 모두 「3・1혁명」의 처절한 실패를 딛고 전개된 무장독립투쟁이었습니다. 일제 측 자료에 근거하더라도 정의부는 1920년대 전반부에만 일제와 수백회의 전투를 치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국사 교과서엔 단 한 줄도 서술돼 있질 않습니다.

해방 공간에서 송진우, 여운형, 그리고 정부 수립 후 김구는 피살됩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지하로 잠적하고 민족주의자들조차 숨을 쉴 수 없는 정국이 조성되지요.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북행이나 항일민족주의 교육을 실천한 이만규조차 두 딸과 이별하며 다급히 북행길을 택했던 것은 생존을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습니다. 조선어학회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고루 이극로 선생 역시 철두철미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였음에도 북을 선택하고 북에 남습니다.

해방공간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곧 이어지는 6・25전쟁! 그것은 한반도 남쪽에 확실한 반공국가 건설로 막을 내립니다. 친일 반민족세력을 자신의 정치적 세력으로 묶어두고 적극 비호했던 인물이 바로 초대대통령 이승만입니다. '반민특위'가 좌절되면서 역사 청산을 방해했던 제1의 인물이 바로 대통령 이승만입니다. 그리고 그에 멈추지 않고 자기 동족을 향해 살육을 자행하면서 거대한 핏자국 위에 이승만 반공정권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초대대통령을 합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은 노욕을 부려 또다시 대통령을 하고자 합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7세였습니다. 고희는커녕 60만 되어도 장수대열에 올라서 환갑잔치가 치러졌던 시절입니다. 77세의 늙은 나이에 이승만은 헌법을 뜯어고쳐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듭니다. 이를 위해 야당 국회의원들을 헌병대로 끌고 가는 등 부산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을 또 해먹지요. 이른바 학교에서 배운 발췌개헌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79살 대통령 이승만은 사사오입 개헌과 상상할 수 없는 부정선거를 통해 세 번째 대통령이 됩니다. 사사오입 개헌은 대통령 이승만 스스로 헌정질서를 농락함으로써 짓밟은 폭거였습니다. 그럼에도 국회의사당 내 이승만 동상에는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의회정치의 초석을 닦았다'고 미화하였습니다. 의회 민주주의를 짓밟은 자를 거꾸로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인물이라고 커다란 동상과 표지석까지 세워놓았으니 정말 제정신이 아닌 나라 같습니다.

▲ 부산정치파동(1952), 사사오입개헌(1954) 등 의회정치를 탄압하고 헌정질서와 의회민주주의를 말살했던 이승만! 그러나 국회의사당 내 동상 표지석에는 '의회정치발전의 초석을 놓으시고 의회민주주의 발전의 귀감이 된 우남 이승만 박사'라는 글귀로 찬양, 미화돼 있다(출처 : 하성환)

특히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조봉암 표 98장을 앞뒤로 이승만 표로 묶어서 조봉암 표를 이승만 표로 둔갑시킵니다. 그렇게 100장 단위로 이승만 표로 위장시킨 것이지요, 문제는 개표과정에서 앞뒤 이승만 표 2장이 없을 정도로 조봉암 선생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봉암 선생은 뒷날 '선거에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고 고백합니다. 진정한 민족지도자 조봉암 선생은 이승만이 조작한 진보당 사건으로 4월 혁명 발발 1년 전 서대문형무소에서 전격 처형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이승만의 반공국가 건설 과정에서 한국기독교도 단단히 한 몫 하지요. 안두희처럼 월남한 청년들로 서북청년단을 처음 만든 이가 한경직 목사입니다. 그 서북청년단이 제주 4・3 학살 과정에서 악명을 떨칩니다. 오죽했으면 제주도민들이 경찰에 붙잡히면 살 수 있어도 서청에 붙잡히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했을까요. 그런 서북청년단이 수십 년 만에 박근혜 정권 시절 재건되었고 집회 현장마다 맞불집회를 놓으며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박근혜 정권 시절! 인간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 그리고 오늘날 광화문 네거리와 서울광장에서 마주친 무서운 눈빛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은 ‘대통령 문재인을 몰아내자’ 며 노골적으로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를 합니다.

레드 콤플렉스의 공포와 후유증을 어린이의 눈으로 그린 작품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대구를 배경으로 한 살풍경한 작품입니다. 바로 뛰어난 작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이 그 소설입니다. 한 때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은 이후 수십 년 동안 한국사회가 어떠했으며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해주는 사회소설입니다.

1975년 민주화 인사들을 전격 처형한 인혁당 사건, 장준하 선생의 의문의 죽음! ...

1980년대 중반 서울에서 중간고사 시험 치러 갔던 대학생이 경찰에 연행된 지 한 달 뒤에 부산 동삼동 앞바다에 시체로 둥둥둥 떠오르던 시절! ...

노태우 정권 당시 조선대 교지 편집위원장 이철규 군 의문사 사건! ...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그 무시무시한 42년의 독재시절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의문의 죽음들과 원통한 죽음들이 혼재했습니다. 42년의 독재 시절! 그것은 민주주의의 암흑기 그 자체였습니다. 형식적 민주정부인 김대중 국민의 정부-노무현 참여정부를 넘어서서 오늘날 문재인 정부에 거는 기대가 남다르게 큰 것은 단지 촛불의 힘으로 등장한 때문만은 아닙니다. 단 한 번도 역사가 청산되지 못한 한국의 현실에서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과 과거사 청산은 너무나 절실한 시대의 과제이자 소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국민의 한결같은 소망이기도 합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이제 1년 7개월이 지나갔습니다. 남은 기간 조금이라도 역사가 청산되고 한국사회에도 무언가 새로운 기운이 움트기를 꿈꾸어 봅니다. 반공의 핏자국 위에 세워진 이승만 정권이지만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줄 국가는 아름다운 대한민국이어야 하겠습니다. 못난 어른들, 못난 조상들로 인해 다시는 후손들이 역사의 무게 속에서 고통 받는 일이 없어야 하겠지요.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하성환 주주통신원  hsh703@chol.com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