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용왕님도 숨고 사람의 발길도 끊어졌던 월미산을 오르다

통일의 시대를 맞아 인천에서 꼭 가봐야 할 곳은 어디일까? 기자는 단연코 그 답은 월미도라고 생각하고, 지난 12월 16일 일요일에 월미도를 찾는다.

월미도는 조선시대에는 한양을 지키던 군사기지였고 개항기에는 조선에 들어오기 위해 머무는 첫 기착지였다. 6.25 전쟁 시에는 인천상륙작전의 첫 상륙지점이었으며, 그 후 50년 동안 군부대가 주둔하다가 2001년도에 시민들에게 개방하게 되었다.

옛날에는 <하인천>이란 전철의 마지막 역에서 내렸었는데, 지금은 그 <하인천>이 <인천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용산에서 출발하는 급행을 타고 동인천까지 와서는 다시 그곳에서 완행의 전철을 타고 한 정거장인 이곳 인천역에서 내리면 된다.

과거 이곳이 인천과 서울의 경인선의 첫 출발지임을 말해주는 경인선기차 기념비가 바로 인천역 앞에 있다. 일요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월미도를 놀러가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는데, 월미도를 가기위해서는 이곳에서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월미도를 들어가야 한다.

역전 바로 건너에는 붉은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중국식 전통 대문이 시선을 끈다. 예부터 중국인들은 동네 입구에 세웠던 마을의 대문 같은 것으로, 귀신을 쫓고 상가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건축 장식과 예술로 차이나타운의 입구임을 알리고 있다.

월미도로 가는 버스는 중간에 한국전쟁시에 인천상륙의 지점을 알리는 '맥아더 거리'를 거쳐 한 정거장을 더 지나서 이름하여 '월미도 유원지'에 다다른다. 인천시가 과거 친환경 전기 셔틀버스 시설을 하였지만, 개장도 못하고 몇년째 수리하고 있다는 버스 기사의 설명이다. 

▲ 월미도 입구에는 맥아더가 전함 261척으로 한국해병 1연대와 함께 상륙하였다는 안내문이다.

월미도 입구에는 미군과 한국군이 함께 월미도를 상륙하였다는 안내판이 있다. 그러니까 여기는 육지가 아니라 당시에는 완전한 섬이었으니, 그래서 '월미도'라 부르는데 지금은 '월미공원'이다.

월미공원은 어린이들을 위하여 많은 놀이시설을 비치하였고 요란한 회전목마 등이 요란하게 내뿜는 소리와 함께 돌아가고 있었다. 시원한 바다의 경치때문에 앞의 영종도며 작약도의 섬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후련하다.

유람선과 방파제 등대를 배경으로 먹이를 받아먹는 갈매기들이 관광객들의 탄성과 즐거움을 사로잡는다. 월미도 유람선 선착장과 월미문화의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바다가 내뿜는 갯벌 내음새와 함께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인기가 있는 곳이 해수족탕의 물놀이장인데, 개장 기간이 3월부터 11월까지이어서 기자가 찾은 12월 16일은 체험을 할수는 없었지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야외무대에서는 고인이 된 김광석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 몇안되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 천신만고끝에 월미산을 점령하였다는 기념탑이 월미도유원지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다.

바로 옆에 높은 탑이 있다. 맥아더 상륙작전 기념비이다. 바로 이곳이 상륙작전시에 월미도에서 엄청난 일이 있었던 곳임을 알려주는 곳이다.

▲ 맥아더의 상륙작전에는 한국 해병이 함께 월미도를 점령하는 기념비이다.

"1950년 인천 상륙작전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에 의하면 그날의 월미도는 '불바다'였다. 항공기가 떨어뜨린 네이팜탄이 지붕에 떨어지는가 하면, 항공모함에서도 월미도를 향해 집중적으로 포격했다. 건물이며 나무들을 모두 쓰러지고 인근 마을과 월미산이 완전히 폐허로 초토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1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전쟁이 끝난 뒤 월미도는 군사기지가 되어 주민들은 강제로 쫓겨났고 지금까지도 되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상륙작전의 기념비는 사진과 함께 말하고 있다.

▲ 월미산의 상처를 고스란히 사진과 함께 기록물이 만들어졌다. 앞의 조형물은 미군이 월미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상륙정의 군함이다.

세기의 도박으로 불렸던 인천상륙작전은 간조시에 3미터에서 최대 10미터의 밀물과 썰물의 차이로, 그리고 북 인민군의 해안포의 위협의 제거를 위한 포격으로는 기습효과가 없다는 악조건 등으로 많은 고려끝에 결정하였다고 적고 있다.

당시 인민군은 방어와 사주경계에 소홀히 하지않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빛바랜 흑백의 월미도 불바다 사진이 미국의 입장에서는 통쾌할지 모르지만 필자의 눈에는 아리다. 그래서 9월 15일 상륙작전 날에는 정부에서 행하는 기념행사가 있는가 하면, 민간인 단체에서 행하는 '민간인 희생의 굿 - 이름하여 '대동굿'을 행한다고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한 사람의 설명이 뒤따른다.

▲ 아! 625 박물관이다. 그런데 지금 일요일 오후 3시인데도 문이 닫혀있는 것이 기자의 눈에는 궁금했다.

"아! 6.25, 월미도 추억의 박물관"이 있는데 오늘이 바로 일요일이면서 시간도 3시인데도 문이 닫힌 것을 보면, 혹 사람들은 우리의 아픈 상처의 월미도를 둘러보기보다는 놀고 먹고 즐기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들게하는 것은 기자의 헛된 생각일까?

'문제가 많은 시대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현실이 기자의 마음에 아프게 다가왔다. '2,000원에 커피먹고 박물관 보고~'의 고민이 묻어 나오는 것이었다. 주변의 먹거리 등으로의 흥청망청에 또한 마음이 아리다.

▲ 월미유원지에서 월미산으로 접근이 용이하도록 입구에서부터 계단으로 잘 만들어놨다.
▲ 월미산의 상처를 알리는 안내판이다.

기자는 월미산을 오르기로 한다. 월미산은 조선말에 풀밭만 있어 대머리섬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는 당시에 우리나라 산림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식량이나 땔감을 얻기 위해 산림을 심하게 훼손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안내판은 적고 있다.

월미산을 약 10분간 오르니 월미산에 사는 황조롱이가 있었음을 알리는데, 이 황조롱이도 유엔군의 상륙작전으로 인하여 민간인 희생과 아울러 이곳의 많은 동식물이 함께 안타까운 마감을 하였으리라는 생각이다.

▲ 안내판에는 이곳 월미산이 황조롱이의 서식지임을 알리고 있는데 과연 이 새는 과거 월미산의 엄청난 포격과 함께 완전히 사라졋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언제인가 다시 돌아올 때는 통일이 되는 그 날은 아닐까?

조금 더오르니 월미돈대와 월미포대라는 안내문이 있다.

"돈대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설치한 방어물로 성을 쌓기 곤란한 능선이나 계곡, 해안가 등에 흙이나 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외국세력의 접근이 활발하던 조선 후기에 월미돈대는 이들로부터 인천과 월미도를 지키는 주요한 군사시설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적고 있다.

▲ 조선시대부터 만들어진 월미돈대와 월미포대의 흔적을 발굴한 인천시에 감격한다. 저 월미포대로 맥아더의 상륙작전에 얼마나 효력적으로 저항을 했을 인민군의 심정으로 돌아다보는 기자의 마음은 내내 무척 무겁다.

기자는 읽고 또 읽으면서 '역지사지'를 해본다. 당시의 북한군의 심정으로 이 글을 읽으니 월미산은 또한 마음을 아리게 한다. 같은 민족이 총부리를 겨누고, '남은 북진통일로 백두산에 태극기를, 북은 한라산에 인공기를' 생각하면서 서로 밀고 밀리었으리라.   

산을 오르면서 큰 나무들이 없다는 사실은 1950년 이후의 나무들만이 새로 식재된 나무라는 생각이 드니, 과거의 이곳의 나무들이 다 사라지고 새로 외지에서 옮겨온 나무임을 알게 되면서, 아직도 월미도는 한국전쟁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임이 마음에 다가온다.

▲ 월미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소원을 적어서 거치하도록 하는 하였는데 무척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원을 적었다. 푸른 천으로 한 것은 아마 포격으로의 민둥산이 어서 푸른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하는 상상이다.

얼마를 더 오르니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써서 붙일 수 있도록 녹색 천과 펜을 비치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소원에서부터 나라의 안녕과 통일을 소원하는 글을 적고 있었다.

필자는 "통일은 곧 된다!"라고 적었다. 정상 근처에 오르니 월미공원 해넘이, 해맞이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홍보를 한다.

▲ 미군의 상륙과 함께 한국해군이 오랜동안 월미산을 점령하고 있다가 2000년도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월미산의 환희를 인천시는 기념비로 세웠다.

이곳에는 한국의 해군기지로부터 물려받은 월미공원 귀환을 축하하는 기념비가 있다.

"서해용왕님도 숨고 사람의 발길도 끊어졌다, 아 우리 모두 월미도의 귀환을 축복하자"고 2001년 인천광역시 최기선 시장은 절규하고 있었다.

월미도 년표에는 1680년 조선 숙종 6년에 유사시 왕이 피신하기 위해 월미행궁을 축조했으며 숙종 34년에 월미산 정상에 포대를 설치한다고 적고 있다. 

▲ 인천앞바다 아마도 맥아더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하여 만들어졋던 포진지에는 인민군의 포가 아닌 조선시대 사용했던 포가 정상에 거치되어 있다. 사주를 경계하던 인민군의 절규가 아리다.

그 월미산의 포진지에서 나름으로 통일을 꿈꾸면서 남으로 내려왔던 북한군들은 바로 이 진지를 보강하면서 인천 앞바다를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북한군은 밀려오는 미군과 함께 올라오는 한국해병과 전투를 했으리라.

이미 기습 상륙작전 전에 엄청난 포격으로 희생된 월미산의 주민과 인민군의 영혼이 저 상공을 떠돌고 있으리라. 그 당시 북한군이 미군과 한국군의 상륙작전에 밀려 북으로 올라갔다면 몇명이나 생존해 있을까? 아마도 일부는 남한에서 빨치산으로 되었으리라. 

여기서 희생된 주민 백여명과 함께 북한군들도 주검으로 통일을 이루리라.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해마다 대동굿을 통해 천도재를 지낸다고 하니, 이 마음아픈 행사를 내년에는 반드시 찾을 것을 기자는 약속해본다.

▲ 월미산에서 살아남은 몇 그루에 이름을 붙인 것이 인상적이다. 소나무가 한 그루 그 생존을 지키고 있는데 이름은 <장군나무>이다.

월미산을 내려오는 중간에는 <영원한 친구나무>가 눈을 끈다. 분명 상륙작전시에 살아남은 몇 그루의 나무에게 붙인 명칭이 틀림없어 보인다. 한 그루의 상수리 나무인 <영원한 친구나무>에게 기자는 생존의 축하를 보낸다.

▲ 장군나무를 좀 더 멀리 떨어져서 사진을 눌러봤다. 장한 소나무가 더 커보이는 것은 온통 새로히 식재한 작은 나무들때문에 커 보이는 것임을!

안내판에는 99년생으로 적고 있지만 아마 더 많은 역사를 끌어안고 있는 나무이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사진을 눌렀다. '월미평화의 나무'에서 "평화통일의 나무"로 남아있기를 기다린다.

이곳에서 근무를 하던 해군 장병들이 1만 그루의 식수를 했다는 기념비와 더불어 인천여고 학생들의 기념식수가 포탄사격에 의하여 형성된 민둥산 월미도를 오늘의 울창한 월미도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 오랜동안 이 곳에 주둔햇던 해군 장병들이 만그루의 나무들을 식재했음을 알리는 기념비이다.

앞으로 남북한 통일이 되면, 월미도는 통일의 기념비적 월미산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해본다.  남에서 1947년에 <우리의 소원>으로 불렀던 노래인데, 북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제목을 바꾸어서 지금은 남과 북이 함께 부르는 노래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찾는데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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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 ; 허익배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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