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불평등과 학벌주의를 깨뜨리자

2014년 11월 수능 전후로 4명의 젊은이들이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능 전날 경기도 양주에선 고3 학생이 17층 아파트에서 투신했다. 울산에서는 수능 다음날 고3 여학생이 가채점 뒤 집에 돌아와 스스로 목을 맸다. 경남 창원에서도 대학을 휴학한 뒤 수능을 친 스무 살 학생이 아파트 꽃밭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2007년에도 고교 졸업반인 쌍둥이 자매가 수능 성적 발표 다음날 새벽, 25층 아파트에서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너무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아이들의 선택은 결국 죽음이었다. 그렇게 19살 어린 나이에 이승에서 생을 마쳤다. 아파트 25층 베란다에 손목시계와 핸드폰을 놓았다. 투신하기 5분 전 아빠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는 "엄마랑 동생이랑 행복하세요. 늘 못해드려 죄송해요"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지만 전 세계 어느 나라에 우리나라와 같이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있을까? 교육에 몸담고 있는 교사로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통계청(2018)에서 발표한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는 자해(자살)인데 인구 10만 명당 7.8명에 이른다. 벌써 10년째 자살은 청소년 사망원인 1위이다. 청소년 4명 중 1명은 일상생활을 제대로 하기 힘들 정도로 우울감을 갖는다고 했다. 청소년 행복지수는 OECD 국가 가운데 꼴찌인 지 오래이다. 자살률도 상위권에 위치할 정도로 높다. 그만큼 이 땅의 청소년들은 상처투성이 속에서 행복하지 않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행복한 학교, 행복한 교육은 먼 나라 이야기이다.

▲ 청소년 사망원인 통계청 자료(2018)우리나라 청소년 사망원인 1위는 교통사고 등 안전사고가 아니라 청소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이다. 2018년 현재 10년째 사망원인 1위이다.(자료 : 통계청)

문제의 본질은 경제불평등과 사회적 차별, 그리고 그것의 교육적 투사인 학벌주의 이데올로기이다. 살인적인 입시교육이 초래한 야만적인 비극으로 매년 이맘때면 되풀이돼 온 연례적인 사건사고이다. 우리가 이 아이들의 죽음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학벌주의로 덧칠된 한국사회의 야만성과 경쟁적인 학교교육의 일그러진 비인간성에 주목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죽음은 결코 죽음으로 내몰린 아이들의 나약한 심성에 원인이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사회 구조의 극심한 불평등과 차별 그리고 여기에 기인해 끝없이 경쟁으로 내모는 야만적인 교육현실에 있다. 따라서 아이들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는 수능 성적을 비관한 나약한 심성으로 치부한다. 기사를 접한 순간의 안타까움과 함께 쉽게 잊어버리는 게 반복돼 왔다. 어떤 자살은 사회면 1단기사로 처리되지만 어떤 투신은 아예 기사로 취급되지도 못한 채 묻혀버린다.

분명한 것은 어린 영혼들의 죽음을 접하는 기성세대의 태도이다. 스쳐지나가듯이 기사를 접하는 기성세대의 무심한 태도 또한 공범의 위치에 서는 것이라 생각한다. 학벌주의로 공고화된 한국사회 구조적 폭력, 바로 범죄적 성격을 묵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폭력도 범죄이지만 구조적・문화적 폭력도 명백한 범죄이다. 더구나 국가 시스템이 이를 조장한다면 국가폭력인 셈이다.

아이들의 죽음을 두고 '시험성적에 목을 매는' 운운하며 한 순간의 이야깃거리로 삼는 게 그동안의 관행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문제를 대하고 지나가는 것은 살아 있는 어른들의 게으름이자 비겁함이다. 그런 죽음을 수십 년 방기하고 방조한 단절된 사회의 냉혹한 시선일 뿐이다. 더더욱 교묘한 기성논리는 아이들의 죽음을 경쟁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부산물 정도로 여긴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갖고 주목할 사건이 아니라는 기괴한 항변도 있다. 심지어 아이들의 죽음을 철저히 개인적인 일, 가정적인 일로 치부하며 적당히 안타까워하면서 넘어갔던 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처한 조건과 환경이 각기 다르고 아이들의 의식수준이 다 고만고만한 상황에서 왜 유독 그 아이들만 죽음으로 내몰려야했는지에 대한 인간적 고민이 전혀 없는 냉혈한의 논리이다. 그것은 어른스럽지 못한 자세이고 한국사회를 보는 대단히 협소한 시각이자 경쟁의 논리를 합리화하는 동물의 세계, 바로 그것이다.

한 인간의 생명은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에 모두 동의한다. 그러함에도 매년 똑같은 이유로 그렇게 목숨을 끊는 일이 되풀이 되는 잔인한 현실이라면 그것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마땅하다. 그러나 교육구조이자 거대한 사회구조의 문제라는 이유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변화를 위한 시늉만 낼 뿐 마땅히 존재해야 할 어른들의 분투하는 모습은 거의 찾기 어렵다. 여기에 우리의 절망이 존재한다. 채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죽어간 어린 영혼들의 사회적 고통을 경쟁사회의 어쩔 수 없는 부산물 정도로 치부하는 모습에 우리는 절망한다.

2002년 대전에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린 초등학생의 죽음이 있었다. 자신이 해야 할 학습노동시간이 아버지의 노동시간보다 많다며'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절규한 사건이다. 1986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항변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어느 여중생의 외마디 절규가 되풀이된 것이다. 1989년 서울 고3 학생이 '선생님의 목소리가 지옥에서 부르는 소리 같다'며 '감정이 없는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어른들이 밉다'고 유서를 남겼다. 2006년엔 인천의 초등학교 학생이 '학원에 가기 싫다'며 도복 끈으로 스스로 목을 맨 적도 있다. 어린 영혼들의 외마디 절규가 아직도 귓전에 맴도는데 도대체 아이들이 왜 죽어가야 하는지 언제까지 그런 죽음이 계속돼야 하는지 슬프고 참담하다. 신문에 1단 기사로조차 나오지 않은 사건도 있다. 몇 년 전 수능 시험이 끝난 이틀 후 서울 용산구 이촌동에 사는 한 재수생이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어린 영혼들의 죽음 앞에 우리 어른들은 죄인이다. 학생들을 탓하고 심지어 나약한 아이라고 비난하기보다 우리 교육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나아가 한국사회의 어떤 이데올로기가 아이들을 죽음으로 휘몰아갔는지 마땅히 질문을 던져야 옳다. 솔직히 아이들의 죽음 이면엔 한국사회 '학벌주의'라는 어둠의 실체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서울 유명 과학고를 졸업한 학생이 스카이 대 경영학과를 합격하고도 서울대를 떨어졌다며 신림동 여관방에서 음독자살한 사건은 학벌주의 이데올로기가 아이들 영혼을 어떻게 잠식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어른들은 학벌주의라는 어둠의 구조와 막강한 실체를 깨뜨리려는 노력보다 어둠의 구조에 슬쩍 편승하려는 태도를 일관되게 보여 왔을 뿐이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선 못난 어른들이 노골적으로 어둠을 부추기고 범죄에 가담한다. 그러면 한국사회는 왜 학벌주의에 갇혀 고통 받고 있을까? 그것은 경제 불평등과 사회적 차별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는 학벌=금력으로 통한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 로스쿨 교수 차민혁(김병철 분)이 피라미드 꼭대기를 인생의 목표로 강조하는데 바로 학벌=금력을 상징화한 표현이다.

입시지옥의 현실에서 스스로 하나뿐인 목숨을 끊으며 죽어간 아이들은 하나같이 남겨진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죄송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도 아이들이 보여주는 마음의 상태와 영혼의 깊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 올 뿐이다. 아이들의 죽음을 의미 있게 사회적으로 승화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롯이 기성세대가 못난 탓이다.

이제 진보교육감 시대, 학교사회가 변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교육을 바꿔야 한다. 그리하여 한국사회 어둠의 실체를 신봉하고 부추기는 학벌주의 이데올로기와 투쟁해야 하고 학벌주의에 편승해 기득권을 누리는 일체의 사회세력과 투쟁해야 한다. 무엇이 교육이고 무엇이 반(反)교육인지 무엇이 진정으로 교육자다운 모습인지 우리 스스로 성찰하며 반추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의 죽음 앞에 우리 어른들은 죄인이고 한없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학벌주의를 해체하는 방안은 간단하다. 국가가 정책적으로 고졸 - 대졸 간 임금격차를 최소화하되 시장에 방임하지 않고 제도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북유럽처럼 고졸 임금으로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임금 보전체계, 높은 누진세율 도입 등 사회복지시스템을 창출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전국 사립대학을 국공립 대학으로 통폐합하되 학벌주의의 정점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 서울대학교를 해체시켜 프랑스처럼 파리1대학, 파리4대학, 파리10대학 등으로 국공립 대학 네트워크를 구축하면 된다. 어느 대학을 졸업해도 똑같은 졸업장이 주어지고 고졸-대졸 간 임금격차가 크지 않다면 한국교육은 정상화되고 대학진학자는 북서유럽처럼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노르웨이는 아예 대학입시가 없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면 대학 역시 취직시험 준비기관에서 대학 본연의 학문 연구기관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정말로 지적호기심을 갖고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대학을 가게 될 것이다. 물론 각 대학은 지역별로 특성화하되 북서유럽처럼 모두 무상교육 시스템을 갖추는 복지형태여야 할 것이다. 임금격차가 줄어들 경우 맨 먼저 직업 간 차별이 사라지고 한국 사회 봉건성의 잔재인 직업에 대한 귀천의식도 말끔히 사라질 것이다. 학력과 무관하게 거리 청소부도 높은 임금을 받으며 좋은 근로조건에서 노동을 한다면 얼마나 행복한 시민의 삶이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학교 역시 혁명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니일(A. S. Neill)이 세운 섬머힐 학교처럼 '신경질적인 학자보다 거리의 행복한 청소부를 양성하는 학교'가 탄생할 것이다. 스위스 굴뚝 청소부가 대학원 졸업의 학력을 갖고서도 스키를 즐기며 인터뷰하는 TV장면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굴뚝청소부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높은 자긍심을 간직한 장면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 니일(A. S. Neill)이 루소의 교육사상에 바탕을 두고 1921년에 세운 섬머힐 학교 전경.

섬머힐은 학생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며 자유와 평등의 가치 등 민주주의를 생활 속에 체득하는 교육과정을 실천한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자료사진)

고졸인 배관공 아들의 연봉이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 교수인 어머니의 연봉보다 많은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모국어가 아님에도 버스기사나 시장 상인 누구나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현실은 분명코 평등교육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노동의 강도에 따라 사회적 임금이 결정되는 시스템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가능하게 할 수 있다. 한국사회 학벌주의 이데올로기의 허위의식을 벗겨내야 한다. 그리고 학벌주의가 빚어낸 거짓신화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자. 그러할 때 우리는 인간의 얼굴을 한 아름다운 사회를 창조해 내고 다음 세대에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죽어간 아이들이 내 아이, 우리 집 아이가 아니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언제까지 이 지독한 현실을 외면할 순 없다. 내 아이는 아닐 거라는 불안 속에 무심하게 살아갈 수도 없다. 이제 한국사회 기성세대들은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삶의 자세를 고민하며 성찰하는 긴긴 침묵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 길이 죽어간 아이들에게 속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 25층에서 뛰어내렸을 당시 그 아이들이 직면한 공포와 그 마지막 순간을 생각하면 이 땅의 교사로서 속죄하고 또 속죄하고 싶다. 이제 더 이상 EBS 문제풀이 입시교육으로 아이들을 내몰지 않아야겠다. 이제는 진정 교사로서 아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세계관을 간직할 수 있도록 아이들의 영혼 가까이 다가가는 인생의 안내자가 되고 싶다. 그게 남은 교직생활의 소박한 소망이다. 그러기 위해선 오늘도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불의한 구조와 싸워야 한다. 그게 이 땅에서 교사로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아이들이 죽음으로써 어른들에게 남긴 숙제이기 때문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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