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만주 무장독립운동사

100년 전 대한민국이 시작되었다. 1919년 2월 1일 중국에서, 2월 8일 일본에서, 3월 1일 국내에서, 이 땅의 민초들이 대한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고했다. 나라를 잃고 절망 속에 살았던, 그러나 더 이상 어둠을 견딜 수 없었던 이 땅의 백성은 대한제국의 시대를 끝냈다. 그리고 국내외에서 스스로 주인이 되는 그 어려운 길을 가겠다는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마치 간절한 외침에 서로 응답이라도 하듯이 곳곳에서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렇게 자주적 백성의 힘으로 시작되었다.

북간도 봉오동에 터를 잡고 살던 최진동, 최운산 형제들도 만세시위를 조직했다. 경제력과 무장력을 가진 왕청현 지역의 토호세력이었던 최진동 최운산 형제들은 왕청현뿐만 아니라 북간도 전역에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여러 명이 사망자가 나온 3.13 용정의 만세시위와 달리 왕청현의 시위는 좀 더 치밀하고 새로운 전략을 선택하였다. <都督府(도독부)>군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시위대를 보호한 것이다.

당시 봉오동에는 최운산 장군이 지휘하던 독립군부대 <都督府(도독부)>가 이미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2년부터 운영하던 사병부대가 시간이 지나면서 정예 무장독립군으로 성장한 것이다. 봉오동으로 모여드는 애국청년들이 수백 명으로 늘어나자 최운산 장군은 1915년 봉오동 산중턱을 개간해 연병장을 짓고 대형 막사 3동을 건축했다. 그리고 본부 주위에 폭이 1m가 넘는 토성을 쌓아 성의 사방에 대포를 설치했다. 본격적인 무장독립군기지의 모습을 갖춘 봉오동에는 500명 이상의 독립군이 있었다.

1919년 3월 26일로 날을 정해 길림성 왕청현의 행정중심지 백초구에서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백초구는 일본영사관 분관과 일제경찰서를 비롯해 상가들이 많았던 상업 중심 지역이었다. 일본 내무부 장관에게 보고한 문서(1919년 소요사건에 관한 도(道)장관 보고철 제7권 중 4.)에는 그날의 시위현장이 백초구 왕청현서(경찰서)에서 북방으로 약 10정 거리, 일본영사관 분관에서 10정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일본의 거리 단위가 정이었는데 1정이 109m 정도의 거리라고 하니 경찰서에서 1km 조금 넘는 거리다. 또한 “해당 집합지점은 조선인 가옥 약 30호가 있는 부락”이라고 하니 시내 중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 일제의 내무부장관에게 보고한 문서의 원본 사진

이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은 간도 백초구 보통학교 분교 부근의 소요사건이 자신이 속한 학교에 관련된 사항이 있으므로 정황과 개요를 보고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간도 백초구에서는 예전부터 3월 26일 오전 11시를 기하여 독립선언 시위운동을 개시하려는 것을 공공연히 말하였다.”고 기록했다. 비밀리에 기습적으로 준비한 것이 아니라 일시와 날짜를 공공연하게 알렸다는 것이다.

“드디어 당일 대경자, 목단강, 하마힌, 대왕청, 나자구(백초구에서 26리)등에서 집합한 자가 약 1천 5벽명(이 중 사립학교 및 서당의 조선인 학생 약 2백명 및 중국인 약 1백명)은 백초구 왕청현서(경찰서)에서 북방 약 10정(일본영사분관에서 10정)의 산록에서 선언식을 거행하였다.” 고 하니 왕청현의 여러 지역을 넘어 목단강, 나자구 등 제법 거리가 먼 곳에서 도착한 천오백여 명의 사람들이 함께 독립만세를 선언한 것이다.

조선인 학생 이백여 명이 참석했지만 자신이 있는 학교에서는 집회 참가를 불허했고 주의단속을 잘 해서 학생들이 참석하지 않았다는 기록은 왠지 의심이 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시위를 주도한 “수괴자는 귀화 조선인 최명록(최진동 장군의 본명) 및 최모 등” 이라고 최운산 장군의 형제들을 적시하면서 이 집회에 중국인들이 100여명이 참석하고 구 한국기와 중국기를 나란히 게양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최진동, 최운산 형제들이 평소 중국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지냈을지 상상할 수 있는 한 장면이다.

또한 이 선언식에는 각 종교의 지도자들도 참석했는데 단군교, 시천교, 예수교의 목사들이 차례로 일어나 연설을 하였으며 이 중에 “부인(여성) 연설자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연변 사회의 분위기가 상당히 깨어있고 열려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할머니 김성녀 여사도 이날 여러 친척들과 마을사람들을 모아 만세시위에 참석했다고 하셨다.

이 보고서는 중국군 병사와 순경들이 엄중 경계한 것으로 표현했지만 아마 이들은 중국군과 같은 색깔의 군복을 입었던 도독부의 독립군들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군인들과 순경들이 참석자들을 보호한 덕분에 용정의 3.13 시위와 달리 3.26 백초구의 만세시위는 아무런 피해가 발생하지 않고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도 일제 밀정의 존재가 드러나 있다. 자신과 같은 “학교의 학무위원인 김윤협은 공공연히 집회에 참가하였고 현도윤, 구무경, 박창극 3인은 그 전 언젠가 도망함으로써 아마 당일은 참가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이문백은 본 사건에 미리 관여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선언서를 우리 분관에 밀송하여 내정의 원조를 하였다.”고 기록한 것이다.

만세시위에 정정당당하게 참가한 김윤협의 이름과 어떤 사건으로 피신해야 했던 현도윤, 구무경, 박창극 세 사람의 이름, 그리고 밀정인 ‘이문백’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일제보고서에 나란히 들어있다. 세 사람의 삶이 그대로 드러나는 100년 전의 문서를 보면서 오늘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역사의 이름으로 돌아보게 된다. 

'독립운동가'와 '밀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오늘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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