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에 광화문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아침에 학교 가는 다향이한테도 수업이 끝나는 대로 광화문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청와대 쪽과 서울경찰청을 비롯한 광화문 주변의 길들을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최루탄이 터질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지요.

예정된 시간을 전후로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다향이도 합류했습니다. 지난주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모르쇠로 일관하는 정부에 압력을 넣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인원입니다. 집회 말미에 수천 명의 군중이 청와대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경찰들은 이미 전경버스로 방어막을 쳐놓았고, 그 앞에 경찰과 바리케이드도 준비해 놓은 상황이었습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경찰이 불법 도로점거, 시민의 불편 운운하면서 해산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허! 길은 저희가 먼저 막아 놓고"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비켜라, 비켜라…" 하는 구호가 계속됐습니다.

1차, 2차, 3차, 4차…. 해산경고가 이어질 때 말했습니다.
"다향아, 이제 최루탄을 쏠 것 같으니까 세종문화회관 뒤쪽으로 해서 집에 가 있어."
"아빠는?"
"아빠는 집회가 마무리된 다음에 가야지. 해산방송을 한다고 해서, 라이트를 켜고 사진 채증을 한다고 해서 모두 집에 가버리면 진실은 영영 가리어질 것 아냐? 아빠는 집회경험이 많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집에 가 있어."

등을 떠밀었지만 나의 손을 놓지 않고 다향이가 말합니다.
"아빠. 아빠도 같이 가."
"다향아. 때로는  두렵고 힘들어도 싸워야 할 때가 있어. 비로 지금이 그럴 때야. 난 너한테 부끄럽고 비겁한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얼른 가."
다시 다향이의 등을 떠밀었고, 다향이는 여전히 나의 손을 꼭 붙들고 같이 갈 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그렇게 십여 분을 실랑이했습니다. 대학 내내 최루탄을 먹은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지 잘 알지요. 다향이가 그 고통을 겪도록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순간 4·19혁명을 떠올리면서 '이제 열일곱이나 된 아이를 내가 너무 어린애 취급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심전심으로 다향이의 마음도 알 것 같았습니다. 젊은 날의 아빠가 시위 도중에 전경이 던진 돌을 맞고 외눈박이가 되었다는 사실. 그래서 함께 탁구를 치거나 배드민턴도 하지 못하고, 운전할 때도 어려움을 느낀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아빠만 남겨두고 저 혼자서 집에 가는 게 영 내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실랑이 끝에 다향이랑 발끝을 돌렸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어떤 게 올바른 아비의 입장일까요.

오성근 주주통신원  babsangm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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