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꽁무니에서 유난히 희고 노란 빛을 내뿜었어. 저수지로 이어지는 똘뚝을 사이에 두고 온 들녘을 불사르고 다녔지.

▲ 사진 출처 : 다음 이미지

깜박거리는 불빛 사이로 드러난 네 몸은 시커매서 그닥 호감을 주지는 못했어. 어쩌다가 손에 잡힌 네 몸에서는 상종하기 어려울 정도로 군내가 진동했거든. 하지만 밤마다 신작로 위를 누비며 순사놀이를 즐기던 우리에게 넌 아주 좋은 장난감이었지. 우린 그런 너를 좇아 대밭 너머 둠벙까지 내질렀어.

그림자 없는 밤!

질척거리는 논둑에서 미끄러지고 고무신은 그만 논고랑에 처박히고 그럴 때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어. 우린 너나없이 개구리와 미꾸라지를 잡는다고 고무신으로 패대기질을 했어. 한바탕 난장을 친 거지.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은 우리는 대밭에 이르러 잠자리를 잡는다고 노닥거렸어. 잠에 취한 녀석들은 도망을 가지도 못해. 이슬 맞은 녀석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르르 떠는 모습이 눈에 선해. 어느 새 열 손가락 틈새도 모자라 입으로 잠자리를 물고 다녔어.

잠자리라고 별 수 있겠어? 왕잠자리나 장수가 없는 대밭은 금세 뉘가 났어. 손에 낀 잠자리 모두 내팽개치고 우린 다시 개선장군처럼 신작로를 누비며 떼창을 했어. 아니 숫제 소릴 질렀어. 기마전이나 단체전을 할 때 입장하면서 부른 건데 뜻은 물론 제목도 몰랐지.

“무찌르자 오랑캐 몇백 만이냐 대한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책이라고는 교과서가 전부이던 시절! 그나마 물려받고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었지만... 침을 묻히지 않으면 글씨가 써지지 않는 연필, 책받침을 받쳐도 찝히고 찢어지던 ‘잡기장’의 지질, 교실바닥 밑에서는 대낮에도 쥐들이 경주를 하고, 쉬는 시간마다 변소 벽을 기어오르는 구더기를 쓰러뜨린다고 오줌줄기 자랑하던 시절, 팬티만 입은 아이들을 운동장에 앉혀놓고 기계독을 없앤다고 머릿속에 디디티를 살포하고, 변에 섞여 나오는 요충을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잡아당기던 시절, 뒷간 바닥에 내지른 변을 보고는 똥점을 치며 좋아하신 할머니... 무너지지 않는 원추형이니 필시 기와집 짓고 잘 살겠다고 하셨거든.

아, 말해 뭣하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대체 뜻도 모르고 부르던 것이 어디 이 노래뿐이랴. 달달 외우던 혁명공약은 아예 교과서마다 맨 뒷장에 박혀 있는 경전이었어.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둘째……”

어쨌든 기고만장한 우리들은 하나밖에 없는 동네 샘에 이르러 멱을 감았어. 샴푸는 구경도 못했고 부잣집이 아니면 세숫비누도 없을 때야. 누가 쓰던 빨랫비누 부스러기라도 잡히면 호강이었어. 그저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퍼붓는 게 전부였거든.

그러고는 별빛 뚝뚝 듣는 하늘을 바라보며 널 희롱했어. 못 생긴 게 재수 없다고 혀를 차면서.

유년의 추억이다. 족히 60년 가까이 됐어. 그런 널 다시 만난 건 퇴촌야영교육원이야. 행운이라고 말해야겠지. 깨복쟁이 친구를 만난 것처럼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아침마다 소맷동우 이고 밭으로 달려가시던 할머니! 이렇게 삼삼할 수가... 때아닌 환청까지 들린다. ‘오매 내 새끼 밥도 안 묵고 어딜 그렇게 쏘댕긴다냐.


달팽이 몸을 헤집고
우렁이 속살을 탐하던 네가
꽃꿀을 넘볼 즈음
넌 이미 개똥벌레가 아니다.

삶을 영위하던 입은 어느 새 퇴화하고
이슬만 머금은 채
온몸으로 자신을 불사르니
넌 내게
삶보다 더 절실한 게 있음을 가르쳐 준다.


나 또한
누군가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밤새 허덕이듯 온몸을 불사른 적이 있어.
별빛이 바래도록 사랑을 갈구한 적이 있다구.
따지고 보면 그게 다 연원은 너였어, 반디!

생애 절정의 순간은 보름 남짓
미련 남긴들 무슨 소용 있으랴?
사랑이 끝나면
이내
더 큰 사랑을 남겨둔 채 영면한다.

이별도 호사스럽지
슬픔과 그리움은 남은 자의 넋두리
하마 다시 볼까 그리워할 틈도 없이
별빛 따라 내 사랑도 스러져 간다.

아직도 풀숲 어딘가엔 내 사랑이...

 

편집 : 양성숙 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박춘근 주주통신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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