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면 평산리 이종학(96)씨

▲ 이종학씨가 부인 김옥희씨와 함께 찍은 사진. 부인은 2016년 작고했다. <사진제공: 이철순씨>

몇 년 후면 내 나이 100세가 된다. 그 절반 무렵인 52세가 되던 해에 자발적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나는 고향 옥천으로 귀농해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할 말은 하면서,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람답게 살아보기로 다짐했다. 공부하고 연구하는 농부, 대안을 모색하는 농부,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농부, 역사와 동행하는 농부가 되려고 노력했다. 나의 소원은 죽기 사흘 전까지 땀 흘리며 일하는 것이다.

■ 보도연맹 학살사건 목격자가 되다

▲ 이종학(오른쪽)씨와 부인 김옥희(제일 왼쪽)씨,
김옥희씨 동생들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제공: 이철순씨>

나는 1922년 옥천군 동이면 평산리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학교에 다니지 않고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뒤늦게 12세의 나이에 죽향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했다. 17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공업학교(현 한밭대학교)에 진학했다. 덕분에 철도청 대전사무소에 입사해 토목기사로 일할 수 있었다.

23세가 되던 해인 1945년 해방을 맞았다. 당시 나는 동맹통신에서 일하는 기자 2명과 같이 옥천에서 대전으로 통근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반인은 잘 모르는 비밀스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해방이 되기 전인 8월9일에 벌써 "일본이 곧 패망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소련이 곧 참전할 것"이라는 말도 그때 들었다.

실제로 해방 이후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5년 동안 시국은 혼돈의 연속이었다. 당시 겪었던 두 가지 충격적 사건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친일파가 역사의 심판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득세하는 세상이 왔다는 것이 첫 번째 사건이고, 독립운동을 했던 큰아버지가 그들의 핍박을 받다가 고향에서 쫓겨나 북으로 가서 교사가 된 것이 두 번째 사건이다. 나도 해방을 앞두고 직장 동료 몇 명과 몰래 태극기를 준비했는데, 모든 일을 직장 내의 친일파들이 모르게 해야만 했다.

28세가 되던 해인 1950년 전쟁이 일어났다. 고향으로 피난을 왔다가 다시 한 번 민족 비극의 현장을 목격했다. 그해 7월 초순경의 일이었다. 나는 소를 몰고 논으로 일하러 나갔다. 그런데 총으로 무장한 경찰이 몰려오더니 들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 "모두 집으로 돌아가라"고 종용했다. 귀가하다 보니 언덕에 약 20m 길이의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다. 잠시 후에 트럭 2대가 전깃줄로 포박한 수십 명의 사람들을 싣고 왔다. 그리고 구덩이 앞에서 그들을 총살시킨 다음 묻어버렸다. 나는 그렇게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목격자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독재 시대가 열렸다.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서울에 있는 교통부로 자리를 옮겼다. 살아남으려면 침묵을 지켜야 했다. 가장으로서 평안한 가정을 지키고 일구는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할 말은 하면서,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마지막 자존심까지 버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군인 출신들의 간섭이 횡행하는 직장 생활에 넌덜머리가 났다.

▲ 이종학씨의 젊은 시절. <사진제공: 이철순씨>

할 말을 하면서 사람답게 살아보자

52세가 되던 해인 1974년 나는 공직에서 물러나 고향 옥천으로 돌아왔다. 이제부터 할 말은 하면서,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람답게 살아보기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우선 생활 터전부터 가꿔야 했다. 24년 전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이 묻혀 있는 동이면 평산리 서원골에 밤나무 과수원을 조성하는 것이 1차 목표였다. 민둥산이었던 그곳에 직접 묘목을 심고 접도 붙이고 하면서 조금씩 개간을 해나갔다. 집 한 채 없던 그곳에 오두막을 지었고, 진입로를 닦으며 악착같이 일했다. 이렇게 기초를 세운 다음 보다 가치 있는 '제2의 인생'을 살기 위해 나는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하나, '공부하고 연구하는 농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예컨대 밤나무를 키울 때는 밤나무에 대한 공부를 ABCD부터 시작했다. 공부해보니 세계에서 차지하는 밤 생산량의 25%에 이를 만큼 당시 한국은 최대 밤 생산국이었다. 그렇게 공부하니 연구할 과제도 보였다. '작은 밤을 식품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그 중의 하나였다. 사실 알이 작은 밤은 줍는 것은 물론이고 껍질을 까는 과정에도 손이 많이 간다. 당연히 경제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가축 사료로 쓰이곤 했다. 알이 큰 밤만 골라 쓰고 작은 밤은 사실상 버리다시피 해온 것이다.

나의 연구는 이런 문제점에서 출발했다. '어떻게 하면 알이 작은 밤을 가공해 활용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고민과 시도를 했다. 그 과정에서 밤을 몇 가마니나 버렸는지 모른다. 작은 밤을 일일이 손으로 까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나는 기계를 활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장 이용할 만한 기계가 없었고, 결국 나는 생강이나 과일을 건조하던 기계를 응용해 마침내 해결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 1969년 서울에 살던 시절 아내, 오남매와 함께 찍은 가족사진. <사진제공: 이철순씨>

공부하고 연구하는 농부

공부하고 연구하는 습관은 풍력과 태양광 등 대안에너지를 개발할 때도 큰 도움이 되었다. 2001년 11월 소형 풍력발전기를 세우고 가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세심한 관찰을 통해 나는 세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첫째, 사람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쉬듯이 바람도 대체로 낮에는 불지만 해가 넘어가면 불지 않았다. 둘째, 바람이 일정하게 부는 경우는 드물었다. 실제로 풍력발전기의 전기를 이용해 팩스를 받으면 글자가 흐려졌다가 진해졌다가 변화가 심했다. 셋째, 바람도 계절을 탔다.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대륙에서 계절풍이 불어와 발전기가 잘 돌아가지만 봄부터 가을까지는 바람이 잘 불지 않았다.

이런 발견이 나로 하여금 2002년부터 풍력만이 아니라 태양광발전기까지 공부하고 연구하게 만들었다. 공부하고 연구하자 태양광발전기도 진화를 거듭했다.

나는 태양에너지를 보다 많이 받기 위해 일명 '해바라기 발전기'라 불리는 태양추적장치를 개발했다. 2002년 12월 설치한 것은 손으로 움직여야 했던 수동식이었다. 하지만 6개월 후에는 타이머만 맞춰놓으면 오전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상하 좌우로 모두 6번 움직이는 자동식으로 개선했다. 그러자 기존 방식보다 최고 80%가 넘는 태양에너지를 더 많이 이용할 수 있었다.

▲ 추수를 하고 있는 이종학씨 <사진제공: 이철순씨>

옥천을 '한국의 프라이부르크'로!

둘, '대안을 모색하는 농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풍력과 태양광 등 대안에너지 개발이 가능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2003년 7월16일 민간인으로는 전국 최초로 태양광발전소 설립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태양광발전소 설립허가를 받은 목적은 2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내가 먼저 실천을 통해 제도적으로 어려운 점을 헤쳐 나가면서 대안에너지를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길을 터주고 싶었다. 둘째, 우리의 미래세대인 학생들이 대안에너지를 직접 보고 느끼고 배울 수 있는 체험교육장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세운 태양광발전소에 만족할 수 없었다. 옥천군민이 참여하는 국내 최초의 시민태양광발전단지를 조성한다는 더 큰 목표를 세웠다. 충북과학대에 대체에너지를 연구하는 학과가 있는 만큼 주민들의 참여 속에 행정과 학교가 협력하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나아가 옥천을 독일의 환경수도인 프라이부르크처럼 만들고 싶었다. 도시 한 가운데로 맑은 물길이 흐르는 프라이부르크는 시내 중심 건물에 태양광발전소를 세워 무공해 태양에너지를 얻고, 시민들은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셋,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농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표현의 자유는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국민의 기본권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이 기본권을 누리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귀농하며 자유인으로 살기로 다짐한 나는 이 기본권을 마음껏 행사했다. 농사를 짓거나 사업을 하면서 불편한 것이나 요구할 것이 있으면 청산면사무소, 옥천군청, 충북도청은 물론이고 산림청, 한국전력, 산업자원부 등 중앙정부와 공공기관에 수시로 전화를 걸었고 공문을 보냈다. 이 과정에서 옥천신문, 대청호주민연대, 충북과학대, 에너지대안센터, 지방분권국민운동본부 등 수많은 동반자를 얻었다.

▲ 이종학씨 집 앞으로 이씨가 만든 태양광 시설이 설치돼있다.

조선일보 바로 본 옥천독립군

넷, '역사와 동행하는 농부'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2000년 출범한 '조선일보반대옥천시민모임(일명 옥천독립군)'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체제 문제를 떠나서 해방 직후 이북이 옳은 일을 한 것이 있다. 친일파를 숙청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만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조선일보가 민족에 반하는 짓을 많이 했다.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조선일보를 좋아할 수 없다.

물론 나도 일제 때에 일본 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까지 얻었으니 친일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로 다르다. 노골적인 친일보국의 길을 걸었던 조선일보는 '적극적 친일'을 했다. 일본이 다스릴 때는 일본을 지지하고, 미국이 다스릴 때는 미국을 지지한 것이 조선일보이다. 만약 이 나라를 이북이 다스렸다면 기회주의자인 조선일보는 주저 없이 북한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해방이 되고 55년이 흐른 뒤에 내가 옥천독립군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그래서 어찌 보면 매우 운명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안에너지 활동을 하면서 타 지역 사람들과 만날 때도 나는 항상 옥천독립군임을 자랑했다.

오래 묵은 마음의 부채를 청산하다

1997년 7월6일이었다. 전날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개간을 하느라 파헤쳤던 집 앞 언덕이 무너지면서 다량의 사람 뼈가 발굴됐다. 나는 47년 전 대량 학살된 보도연맹 관련자들의 유골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곧바로 군청과 면사무소에 신고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은 채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당시만 해도 사상과 관련된 것이라면 죽은 사람의 뼈조차 건드리지 않으려는 피해의식이 강했다. 옥천신문이 이 사실을 크게 보도한 뒤에야 겨우 여론이 형성됐고, 군청이 나서 정식으로 공원묘지에 안장해주었다. 오래 묵은 마음의 부채를 청산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세 살 적은 김옥희와 결혼해 슬하에 3남2녀를 두었다. 그들이 다시 2남6녀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헌신적 동반자였던 아내는 91세가 되던 2016년 8월에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아내와 재회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 용인 한국민속촌에 갔을 때. 이종학, 김옥희씨 부부가 전통 혼례 의상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제공: 이철순씨>

김덕수, 류시화 그리고 '이종학' 옥천 대표 '신지식인'

이종학 옹은 고향 옥천으로 돌아와 '제2의 인생'을 살며 많은 사람과 기관으로부터 감사와 존경의 대상으로 인정받았다.

옥천신문은 1999년 창간 10주년 기념식에서 보도연맹 학살사건 역사발굴에 기여한 그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산업자원부는 2002년 민간에서 대안에너지 개발에 공헌한 그에게 표창장을 수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그를 신지식인으로 선정했다.

옥천군은 2006년 그를 옥천군민대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 옹이 조성한 대안에너지발전소가 청소년 체험학습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옥천교육청은 2005년 관내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활용할 수 있는 10개의 체험학습장을 선정하면서 동이면 평산리 대안에너지발전소를 포함시켰다. 실제로 청주 경덕중학교, 옥천 삼양초등학교 등 많은 교육기관에서 이곳을 방문했다.

한국관광공사는 이종학 옹을 옥천군을 대표하는 인물로 뽑았다. 2005년 옥천군 관광종합개발 기본계획안을 발표하면서 역사인물(송시열, 조헌), 문학인(정지용, 유승규), 언론인(송건호)과 함께 시인(류시화), 예술인(김덕수), 신지식인(이종학) 등 3명의 생존자도 인적자원으로 활용할 것을 권유했다.

올바르게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막내아들(서원건설 이철순 대표)의 감사편지

①성인이 될 때까지 늦잠 자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으신 아버지에게 근면과 성실의 습관을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②새로운 것에 항상 민감하고 호기심이 넘쳤던 아버지에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③소식(小食)과 금주와 금연을 철저히 실천해 건강과 장수의 비결을 전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④항상 원리원칙을 강조하고 솔선수범을 실천하신 아버지에게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⑤언제나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게 살아오신 아버지에게 실천력과 추진력을 배울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 동이면 평산리 이종학씨 자택 풍경.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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