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백두산!

2005년 여름 백두산 들꽃 탐사를 다녀와서 김광철 주주통신원l승인2019.09.03l수정2019.09.03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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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7월 27일 천지에 올랐을 때의 백두산 모습, 중국인들이 써 놓은 붉은 글씨가 선명하다.

제3일째인 2005년 7월 27일에는 오전에 '왕지'라는 못에 들르고, 가까운 곳에서 꽃 탐사를 하는데, 그날은 우리 일행이 서파 쪽으로 백두산 천지로 오르기로 한 날이다. 전날 밤부터 비가 와서 걱정이었다. 그날도 오전에는 비가 왔는데, 하늘이 우리를 도왔는지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니 서서히 비가 그치면서 웅대한 백두 영봉이 더욱 가까이 다가오며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가이드가 마련한 차에 분승하고 서파 쪽을 향했다. 중국에서 백두산을 오르는 코스는 '서파', '북파', '남파' 등 여러 곳이 있다. '파'라는 말은 방향을 나타내는 접미사로 보인다. 서파 쪽은 중국과 북한의 경계지역으로 경계를 나타내는 5호 경계비가 세워져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산정 가까이까지 차가 다닐 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닦여 있다. 아마 산정에서 약 700m - 1000m 가까운 곳에 주차장이 있었다.

▲ 서파 주차장에서 백두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 길의 모습, 지금은 엄청나게 관광객이 넘쳐난다. 약 7,800m 걸어서 오르면 백두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 천지못 주변에 피어있는 '호범꼬리', 범의 꼬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같다. 서파에서 천지를 오르는 길에 많이 만날 수 있었다.
▲ 백두산 정상을 향해 오르면서 바위 틈에서 만날 수 있던 '좀참꽃'
▲ '담자리꽃', 장미과식물, 백두산 정상 가까운 고지대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미 꽃은 지고 열매만 보여주고 있다. 함북, 평북, 시베리아, 만주지역 등 고산초원에 많이 서식한다고 한다.
▲ 구름국화, 국화과 식물로 이렇게 천지못 주변에 8월에 한창 피고 있었다. 높은 산에만 서식한다고 하여 '구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 '두메구절초', 국화과 식물로서 백두산 정산 근처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름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높은 고산 지대에 서식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백두산 정상 가까운 곳은, 어디나 고산 지대는 대부분 그러하겠지만, 나무 한그루 없는 초원 지대이다. 그 초원에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백두산을 찾는 길손들을 반기고 있었는데, 제일 흔한 것이 잎이 마치 화살촉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화살곰취'이다. 이 꽃은 다음날 서파에서 종주를 하여 북파 쪽으로 향할 때에도 지천으로 깔려 있는 꽃이었다. 우리 남한 땅에서는 화초로 애지중지 가꾸어지고 있는 '하늘매발톱'이 이곳에서는 너무 흔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할 정도였다. 그 외에 '산미나리아재비', '담자리꽃나무', '좀참꽃', '호범꼬리', '바위돌꽃' 등을 사진기에 계속 주워 담으며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에는 중국 사람들도 많이 관광을 와 있었지만 남쪽에서 온 우리 동포들이 너무 흔해서 한국말이 왁자지껄할 정도였다. 이곳에서는 다른 곳 하고 다른 풍경 하나를 볼 수 있었다. 돈을 주면 가마로 여행객들을 산정까지 운반해 주는 가마꾼들이 있었다. 돈으로 사람을 사서, 옛날 귀족들이 하인을 부리듯이 가마를 타고 거드름을 피우며 타고 가는 모습을 보면서 평등 세상을 외치는 사회주의 국가의 또 다른 면을 보는 것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 서파에서 전지를 오르면 북한과 중국 경계를 나타내는 경계비가 세워져 있다. 이런 경계 표시가 되어있지만 철책을 쳐 놓은 것은 아니어서 관광객들은 자연스럽게 주변을 넘나들었다.
▲ 2005년 여름 백두산 천지의 모습

우리 일행은 오후 4시 반 경에 5호 경계비가 있는 백두 산정에 오를 수 있었다. 올라서 보니 그야말로 사진으로만 보던 짙푸른 천지물이 우리를 반겼다. 오전에 비가 오다 개어서 그런지 천지에는 구름 한 점 없이 개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드넓은 천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입을 떡 벌리고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감탄이 절로 일었다. 정말 우리 일행은 행운을 잡은 것이다. 29일 '천문봉'에 올랐을 때도 그랬고, 30일 날 장백폭포를 지나 북파 쪽으로 천지에 오른 날도 천지는 우리에게 그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질 않았다. 백두산을 여러 차례 오른 사람들의 말을 빌려 봐도 이렇게 천지가 온전하게 눈에 들어오는 적은 1년에도 몇 번 되지 않을 정도로 흔치 않다고 한다. 나는 이런 천지를 한없는 감동으로 내려다보며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연신 사진기를 눌러댈 뿐이었다. 현 박사의 말을 빌면 우리가 서 있는 5호 경계비를 지나서 천지 한가운데로 국경이 지나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과 북한의 경계라고는 하지만 철책 하나 없고 덩그마니 비석 하나 세워져 있을 뿐이다. 평소에는 북한 군인 한두 명이 이곳을 지킨다고  한다. 마침 우리가 간 날은 북한에서 어떤 행사가 있어서 그런지 그날따라 경계병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곳을 찾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천지의 이곳저곳을 사진기에 담기 위하여 국경 같은 곳은 아랑곳없이 넘나들고 있었다. 하기사 한 발짝 넘으면 북한 땅이고, 한 발짝 넘어오면 중국 땅이니 바로 이곳에서의 국경이 무슨 커다란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가 이곳을 밟기 위하여 우리 땅을 두고 멀리 이역 땅을 돌아서 이곳을 찾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울 뿐이지.

현 박사의 설명에 의하면 천지 너머 건너다 보이는 봉우리가 우리가 다다음날 가기로 되어 있는 '천문봉'이고, 오른쪽으로 가장 높게 허옇게 보이는 봉우리가 백두산의 최고봉인 2744m의 '장군봉'이라고 한다. 그외에 녹명봉, 차일봉 등의 큰 봉우리들이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백두산!  우리 겨레면 누구나 그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가슴 깊은 곳에서 볼덩이가 치미는 것과 같은 가슴 속에 간직한 뜨거운 용암이 용솟음치는 기분을 갖게하는 민족의 영산이다. 반도 땅 모든 산하가 여기에서 시작하여 그 정기 안 서린 곳이 없으니 그도 그럴 일이 아니겠는가?

막상 이곳 중국에 와서 바라다보는 백두산은 중국 사람들은 '장백산'이라고 부르며 자연보호 구역으로 보전하고는 있지만 베이징 한 복판에서 바라다보는 장백산은 중국의 한 변방일 뿐일 것이다.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을 찾고, 그 옛날 고조선 이후 고구려와 발해 시절 우리 민족이 지배했던 땅! 요즘  민족 역사의 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 사람들한테는 그것이 어떤 위협이 되는지 '동북공정'이다 뭐다 하면서 이 지역의 역사를 애써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니 이 무슨 엉뚱한 정치적 놀음인가?  동양대 김문회 교수는 이런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논리를 몽골, 만주, 한반도, 일본을 중국 한족의 역사와 대립지어 '대쥬신'의 역사로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나는 그 해석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어찌했거나 요하 이동 땅은 기나긴 중국 역사에서 결코 한족 중국의 역사는 아닌 것이다. 청을 세워 중국을 지배했던 여진도 지금은 중국 문화에 흡수되면서 마치 중국의 역사인양 치부되지만 청은 몽골과 힘을 모아 얼마 되지 않은 만주족('만주'라는 용어 자체가 일제가 중국을 분할 지배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용어임)을 한족과 철저히 구분하여 자기 글자도 개발하고, 지배세력으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는 특별한 노력으로 제국을 유지해 왔다. 당시 수십만(?)의 여진이 1억이 넘는 한족을 300년 가까이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 불가사의할 따름이다.. 그러나 도도한 역사의 흐름 앞에 소수의 지배 세력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청의 한계였던 것이다.

금을 세운 누르하치는 신라 왕실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그의 이름 자에서 보는 봐와 같이 '愛新覺羅' 신라를 동경하고 사모하여 나라 이름도 그리 지었다 한다. 과거 고려 시대 이 곳에 세워졌던 '금'나라는  신라 왕실 후손인 김함보의  8대 손인 아골타가 세웠다. 그리하여 나라 이름도 김씨 성과 같이 '金'이라 하였다 한다. 누루하치는 그 '金' 왕실의 후손임을 자각하고 나라 이름을 다시 '金'이라 지으니, 사람들은 이 나라를 '후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후금은 임진왜란 때는 조선으로 사신을 보내 '저 쥐새끼 같은 왜구들을 바다로 다 쓸어 넣어버리겠다'고 하며 조상의 나라인 조선을 돕겠다고 하였으나 조선 조정은 이를 거절하고 명의 도움에 목을 매었던 것이다. 광해군은 외교를 잘 하여 금과 선린우호 관계를 유지했으나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장악한 서인 정권은 기울어져 가는 한족의 '명'을 상전으로 받들며 소중화주의에 빠져 몽골과 조선을 아울러서 명과 대항하려던 청의 전략을 거부하다가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의 역사를 자초하기도 한다. 청은 '팔기군'이라는 몽고의 주민 조직 방식을 이용하여 민병 합동 주민 조직을 만들고 그 통합된 힘으로 중원을 지배한다. 그 청이 결과적으로는 고스란히 이곳 요동 땅을 중국에 편입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곳 요동 땅은 고조선 이후 한족의 지배력이 미친 시기도 없지는 않았지만 주민 대부분은 그들이 오랑캐라고 했던 만주족(거란, 여진)이고, 지배 세력도 우리 한민족이나 몽골 또는 거란, 여진으로 불리는 만주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한족 중국의 정통의 역사라고 강변하는 것은 그야말로 난센스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요즘은 중국이 나서서 발해의 유적들을 유네스코에 등록하겠다고 하면서 이런 노력들을 더 강화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역사가 내 것이다, 네 것이다'라고 따지는 행위 자체가 지극히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도구로 쓰이는 경우가 많고, '민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그 옛날에는 없었던 정치적 용어일 수 있는데,  환경과 생태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게 뭐 그리 대수이겠는가? 고조선이 그렇고 고구려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나라들이 강성했을 때에는 이곳 백두산이 역사의 중심이었는데, 지금은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나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지.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산과 물이 닿는 모든 지역, 과거 강성했던 고구려의 지배력이 미쳤던 지역과 한반도를 다  아우르는 지역을 묶어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백두산을 그 문화의 중심에 두는 시대가 언제가는 열리리라는 기대는 단순한 꿈에 불과한지 상상해 본다.

▲ '너도개미자리' 석죽과 식물로서 이 꽃은 백두산 정상 부분의 바위틈이나 돌무더기 등에 이렇게 활짝 그리고 씩씩하게 피어있었다.

<참고>

위 글은 2005년 여름 백두산 일대로 들꽃탐사를 다녀온 소감을 써서 '환경과생명을지키는교사모임'등의 카페에 실었던 것이다. 지금 중국을 통해서 백두산 탐방을 가면 당시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달라져서 들꽃 탐사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통제가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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