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목(82, 안내면 서대리)씨

이번에 만난 사람은 안내면 서대리에 사는 유창목 씨(82)입니다. 옥천읍에서 지업사를 운영하는 송영훈 씨가 추천해주었습니다. "서대리에 도배하러 갔더니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멋쟁이 할머니가 살고 계셨습니다. 옥천신문 은빛자서전에 소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연락했습니다."

유창목 씨

자신을 '안내면 행복한 학교 장미반' 학생이라고 소개한 유 씨는 80세를 넘기며 치매 초기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1년 전부터 의사로부터 그림을 그려보라는 권유를 받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집 주변의 꽃과 나무 그리고 새가 그림의 모델이 되어 주었습니다.

"오늘은 옥천 장날이다. 학교를 들러서 옥천에 나가 머리를 깎고 약도 사 왔다. 옥천 가는 길에 강가를 보니 작은 버들에 잔뜩 물이 오르고 있었다. 노랑도 아니고 파랑도 아닌 버들 색깔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집에 가면 빨리 이 작은 버들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유 씨는 시와 일기도 쓰고 있었습니다. 앞에 인용한 글은 지난 3월 30일 작성한 일기입니다. 유 씨는 인터뷰하러 오는 손님을 맞으려고 대청소도 하고 노인 냄새가 나지 않게 하려고 방향제도 뿌렸다고 했습니다. 숙연한 마음으로 그녀의 인생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달빛 아래 하얗게 피어 있던 밤꽃

나는 1937년 충청북도 보은군 탄부면 임한리에서 유복녀(遺腹女)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 내 이름은 '평녀(平女)'였는데,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다. 어머니가 5남매 중 막내인 나를 임신하고 있을 때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갑자기 가장이 사라지자 어머니가 1남4녀나 되는 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다. 어머니는 함경도 원산의 한 식당으로 일하러 갔는데, 형편이 어려워 귀향할 때 자식들을 모두 데려오지 못했다. 그래서 남의 집 수양딸로 들어간 셋째 언니가 아직도 이북에 남아 있다. 우리 집안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몇 년 후에 전쟁이 일어나면서 유일한 남자인 오빠가 목숨을 잃었다.

불행의 진흙 속에도 보석처럼 빛나는 기억은 있다. 다섯 살 때로 기억된다. 한밤에 원산에서 열차를 타고 귀향하다 철원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어머니가 잠들어 있던 나를 깨웠다.

"평녀야, 그만 자고 일어나 창밖을 보거라."

창밖의 넓은 들판에 밤나무가 도열해 있었고, 달빛 아래 하얗게 피어 있는 밤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잠결에 꿈꾸듯 바라본 그 장면이 내게는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해방이 되고 나서 2학년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든 단서는 자연과 어머니였다. 어느 날 집으로 오다가 풀밭에서 새집을 발견했다. 나는 보석처럼 생긴 새알을 어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책보에 싸 가지고 왔는데, 어린 마음에 어미 새가 불쌍해 두 알은 남겨 두었다. 미루나무 버섯을 따서 치마에 싸 가지고 가기도 했는데, 어머니가 "우리 평녀 대단하다"며 좋아하셨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내심 중학교에 들어가고 싶었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마침 인근의 한 중학교 월사금이 무료라고 해서 어머니에게 학교에 보내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여자 혼자 몸으로 자식을 키워야 하는 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결국 나는 스스로 진학을 포기했다.

▲ 젊은 시절의 유창목씨

빨간 댕기로 맵시 부리던 시절의 추억

집에서 서너 해 어머니 일손을 돕다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대구로 나갔다. 약 3년 동안 방직 공장에서 여공으로 일했다. "충청도에서 온 처자가 참하고 야무지다"는 칭찬을 들으며 공장을 다녔다. 머리를 양 갈래로 길게 따고 빨간 댕기로 맵시를 부리던 시절이었다. 혼처를 알아봐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주변에 많았다. 그때 만약 거기서 도시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첫사랑이라고 말하기에는 우습지만 이런 사연도 있었다. 당시 공장에는 주인 아들도 출근하고 있었다. 큰 키에 얼굴이 갸름하고 심성도 고왔던 그 청년은 나를 보기만 하면 미소를 지었다. 젊은 나이에 설레는 호감이 있었지만 바보처럼 서로 말 한 번 걸어보지 못했다. 그러던 중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이 왔다. 퇴사하던 날 기계실에 들렀는데, 청년이 나를 보더니 눈물을 글썽였다.

'근본이 있는 양반 가문'으로 시집가야 한다는 것이 어머니가 나에게 귀향을 재촉한 이유였다. 결국 스물두 살이 되던 해에 옥천군 안내면 서대리 텃골마을 하동 정씨 가문으로 시집갔다. 남편 정찬옥은 나보다 여섯 살이 많았다. 보은농고를 졸업하고 수원농대를 1년 동안 다녔다는 중매쟁이의 말만 듣고 신랑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채 결혼했다.

하지만 사흘 만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남편이 홀아비라는 사실을 본인의 고백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더욱이 일곱 살 먹은 아들도 하나 있었다. 어쩐지 혼례식을 하던 날 마을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살림살이 형편도 좋지 않았다. 처마가 낮은 초가삼간은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요즘 같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겠지만, 그때만 해도 여자는 한 번 시집가면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철기, 양순, 예순, 원기, 경순 5남매가 줄줄이 태어났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남편은 술만 찾았다. 그것도 하루에 세 번 술을 마셨다. 아침부터 해장을 한다며 마셨고, 나중에는 아예 술을 집에 사다 놓고 마셨다. 하도 자주 마셔서 일부러 달력에 표시를 해봤더니, 한 달 동안 마시지 않은 날이 이틀에 불과했다. 어느 날은 정말 화가 나서 "나를 당신처럼 공부시켜 줬으면 도지사는 했겠다."고 쏘아붙이기도 했다.

그나마 버티며 살 수 있었던 것은 5남매 아이들과 시부모 때문이었다. 시부모는 새벽부터 들에 나가 열심히 일했다. 그것이 딱해 보여 참고 또 참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남편은 40대 중반에 중풍으로 쓰러졌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시어머니마저 중풍으로 쓰러졌다. 남편은 안채에서 6~7년, 시어머니는 아래채에서 9~10년 병석에 누워 있다가 돌아가셨다.

내 인생 원동력은 열심히 살아준 5남매

남편과 시어머니 병수발을 하면서 농사를 지었다. 혼자서 논 400평, 밭 1500평을 일구며 암소도 키웠다. 여자 몸으로 무거운 지게질을 하다가 앞으로 고꾸라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내 인생을 원망하며 서럽게 울었다. 뜨거운 여름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저런 날이 올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필이면 그 무렵 맏아들은 군대에 입대했고, 방위로 복무하던 둘째아들은 돈 벌러 외지로 나가 있었다. 가끔 고향에 돌아온 두 아들이 너무 안타까웠는지 "우리 엄마 너무 불쌍해요" 하며 함께 울기도 했다.

이렇게 힘든 일만 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때로는 기쁜 일, 고마운 일도 찾아왔다.

키우던 암소가 간간이 낳아준 새끼를 팔아서 남편과 시어머니 병구완을 할 수 있었다. 소를 키우려면 풀이 많이 필요했다. 낫으로 풀을 베는 것 못지않게 나르는 일이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 경운기나 리어카로 실어서 날라 주었다. 겨울을 나려면 땔나무가 필요했다. 산에서 간벌을 하거나 도로변 미루나무를 베는 날이면 부리나케 달려갔다. 내가 버려진 나무를 쌓아놓으면 또 누군가 와서 날라 주었다.

동네에서 생일, 환갑, 제사가 있는 날이면, 그 집에서 음식을 얻어다 병석에 누워 있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먹였다. 남편은 고기를, 시어머니는 떡을 좋아했다. 가장 구실을 못하는 것이 미안했던지 남편은 "그런 것 얻어오지 않아도 된다"며 서럽게 울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도와주고 음식을 나눠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물론 가장 큰 기쁨의 원동력은 5남매였다. 맏아들 철기는 정월에 태어났다. 그해 봄이 오자 나는 들에 나가 찔레꽃을 꺾어다 화병에 꽂았다. 그 화병을 철기 머리맡에 놓아두고 이렇게 말해주었다.

"우리 아들 철기야, 이 꽃향기를 맡아 보거라."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아이들 마중을 나가는 것도 기쁜 일이었다. 맏딸 양순이, 둘째딸 예순이가 안내중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 미리 밥을 지어놓고 마을 입구까지 마중을 나갔다. 가방을 들고 오는 교복 입은 두 딸의 모습이 보이면 그렇게 가슴이 설렐 수가 없었다. 이웃 사람들이 이렇게 우스갯말을 하면서 놀렸을 정도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대통령 부인이라도 마중 나가는 줄 알겠네."

그림 그리는 순간은 정말 행복하다

몇 해 전부터 나는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그림 그리기가 내 인생의 마지막을 축복으로 이끌어주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인가 무렵에 교내 미술대회에서 2등상을 받았다. 학교 뒷동산에서 내려다본 들판과 냇가를 있는 그대로 그렸는데, 선생님과 어머니에게 큰 칭찬을 받았다.

"와~ 미루나무 위의 까치집까지 그렸네! 평녀는 화가 소질이 있구나!"

그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도화지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운동장 모래 위에 꽃과 새와 집을 수없이 그렸다가 지우곤 했다. 예쁘고 고왔던 어머니 얼굴도 내 습작의 중요한 소재였다.

약 70년 동안 그림을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그런데 80세를 넘기며 치매 초기 진단을 받고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그림을 그려보라는 처방을 받았다. 자식들이 사다준 붓과 물감으로 지난 1년 동안 수백 점의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처음에는 종이를 아끼려고 달력 뒷장에 채송화, 봉숭아, 백일홍 등 집 주변에 있는 꽃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은 정말 행복하다. 모든 근심, 걱정, 시기, 질투, 욕심의 마음이 사라진다. 마치 인생의 도(道)를 깨달은 느낌마저 든다. 의사 선생님도 그림 치유 환자 중 내가 최고라며 놀라워하셨다.

내 인생의 모든 희망이었던 철기, 양순, 예순, 원기, 경순 5남매가 내 인생의 마지막 축복인 10명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열심히 살아준 5남매가 고맙고 또 고맙다.

▲ 유창목씨가 그린 그림

 

남은 소풍 시간 행복하게 보내세요

■ 맏딸이 보내온 감사편지

어머니. 시부모님 모시고 병든 남편 수발하며 5남매 키워내신 어머니의 그 모진 시간을 우리가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저 "엄마" 그 한 단어로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을 대신하고 싶습니다.

지금 엄마는 치매라는 친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그런데 치매는 때로는 사람을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하는 것 같습니다. 표정이 가끔 멍해지실 때도 있지만 손녀와 휴대폰 가지고 장난치실 때는 어린 소녀처럼 마냥 천진난만합니다. 어제 저녁 엄마가 부르시던 '소양강 처녀'는 가요가 아닌 동요라는 느낌마저 받았습니다.

꼭 1년 전에 시작한 그림 그리기는 엄마의 숨어 있던 재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엄마 자신의 기구한 인생을 고백하는 표현의 통로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엄마의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숙연해지기까지 합니다. 팔십 넘게 평생 동안 열심히 사시고 이제 돌아와 활짝 피우기 시작한 꽃봉오리가 연상됩니다.

엄마. 우리 5남매 우애 변치 않고 건강하게 살게요. 먼 훗날 우리도 엄마 닮은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열심히 살게요. 남은 소풍 시간 행복하게 보내세요.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맏딸 양순 올림)

 

흙담, 나무문, 저수지…외갓집의 추억

■ 외손주가 보내온 감사편지

할머니. 세상에 태어나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처음으로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적어 봅니다.

지금도 여름이 다가오면 꽃밭골에서 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흙담을 돌아서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면 할머니는 항상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제가 벌써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지후가 조금 더 크면 그때의 그 파릇했던 추억을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할머니. 봄이 되면 감자밭 고랑에 비닐을 덮고, 가을에는 고추와 호두도 따고, 서대 저수지에서 낚시와 수영도 하고…. 자주는 아니었지만 하나하나가 잊지 못할 그리운 추억들입니다. 시골에 다녀오면 승용차 안은 시장에 갔다 온 것처럼 언제나 할머니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덕분에 며칠 동안 풍족한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외갓집 벽에 걸려 있던 새 그림을 보고 "와~ 잘 그렸다"고 감탄했었는데, 그 그림을 할머니가 그렸다고 해서 또 얼마나 놀랐었는지요. 할머니의 모습이 평소와 달라 보였습니다. 요즘도 할머니가 그린 그림이 가족밴드에 올라오는데, 할머니 그림 실력은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할머니 하면 생각나는 몇 가지 추억을 적긴 했는데, 사실 그것보다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둘째딸 예순의 차남 함건범 올림)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황민호 옥천신문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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