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봉열(80, 옥천읍 문정리)씨 이야기

제7회 지방선거가 끝났습니다. 옥천지역 지방선거를 거론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지요. 옥천군의회 초대 의장(1991년), 초대 민선 옥천군수(1995년)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 류봉열 씨(80)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옥천군수 3선 연임(1995년, 1998년, 2002년)이라는 기록까지 세운 그의 이력 자체가 옥천지역 지방자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995년 제1회 지방선거가 끝났을 때 한 방송사 기자가 류 씨를 찾아왔습니다. '충북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 기초자치단체장 인터뷰가 목적이었습니다. 충북지역 기초자치단체장 중에서 3선 연임에 성공한 사람은 류봉열 옥천군수, 이시종 충주시장(현 충북도지사) 두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이 시장이 중도 사퇴하고 총선에 출마했기에 끝까지 임기를 채우며 '유종의 미'를 거둔 사람은 류 씨가 유일했습니다.

2002년 제3회 지방선거에서 3선 연임으로 옥천군수에 취임했을 때의 일입니다. 이날 류 씨는 아내와 함께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렸습니다. 공무원이었던 남편을 전염병으로 잃고 3남매를 올곧게 키워준 어머니. IMF 사태로 400명의 공무원을 구조조정할 때 군수 남편의 강권으로 가장 먼저 명퇴의 아픔을 겪어야 했던 교사 출신 아내. 일견 화려해 보이는 공직자 인생의 뒤안길에는 가족의 눈물과 한숨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류 씨는 서너 해 전부터 파킨슨병과 투병중입니다. 7년 넘게 비서실장으로 동고동락했던 진유환 씨가 류 씨의 근황을 알려오며 은빛자서전에 추천해주셨습니다. 감시와 견제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불가피하게 악연 아닌 악연을 맺었던 옥천신문의 오한흥 대표와 함께 류 씨를 찾아갔습니다.

▲ 류씨가 거실 벽에 걸린 십자가 앞에 서있다. 신앙생활은 노년의 그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는 듯 하다.

 

이광수의 <흙>, 심훈의 <상록수> 읽으며

나는 1939년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문화 류씨가 모여 살던 군북면 지오리였는데 아버지(류인창)가 안남면사무소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기에 안남면 연주리가 출생지가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정순금)는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는데, 나는 장남이었다.

내가 세 살 때 충격적 사건이 터졌다. 촉망받는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만주에서 시작되어 한반도 전역을 휩쓸었던 전염병인 장질부사에 걸리는 바람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남동생은 유복자로 태어났다.

옥천읍 삼양리로 삶의 터전을 옮기신 할아버지(류경택)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나는 죽향초, 옥천중, 대전고를 다녔다. 중학생 시절 도서관 대출을 관리하는 학예부장을 맡은 덕분에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이광수의 <흙>에 나오는 허숭, 심훈의 <상록수>에 나오는 박동혁, 채영신을 나의 롤모델로 삼았다.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958년 우리 가족은 황무지를 개간해 약 2만평의 전답과 임야를 조성했다. 소작인 4~5명과 함께 3천평의 논농사를 지으며 포도, 자두, 복숭아 등 과수도 가꾸었는데, 이 작은 동산에 '에덴농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4-H 기술교환 농장으로 지정받는 바람에 4-H운동에도 뛰어들었다.

나는 1959년 충남대 축산학과에 입학했다. 22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 1965년 2월에 졸업했다. 그해에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농촌지도소에서 농촌지도자로 일했다. 1967년부터 이듬해까지 8개월 동안 필리핀 세이비어대학으로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17년 동안 옥천과 영동에서 근무한 나는 농촌지도소 소장을 마지막으로 1982년 공직을 그만두었다.

농산물 수출, 조립식 주택 등 회사를 경영하며 뉴옥천라이온스클럽 초대 회장으로 지역에서 봉사하다 1991년 지방선거에 출마해 옥천군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옥천군의회 초대 의장, 충북지역시군의회의장단협의회 부회장, 옥천군재향군인회 회장, 평화통일자문회의 옥천군협의회장 등을 맡았다.

'할아버지의 손자'로, '어머니의 아들'로

1995년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가 열리면서 세 번 연속 옥천군수로 봉직한 것은 피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었다. 지금 되돌아보니 충북 최고 득표율, 3선 연임 등의 기록은 나 혼자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먼저 나와 운명을 같이 했던 가족의 도움이 컸다. 결국 가족의 인생이 모이고 모여 내가 선거에서 주민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할아버지(류경택)의 역할을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당시 '거간'으로 불리던 옥천 우시장의 중개사였다. 전국 5대 우시장으로 꼽히던 옥천 우시장의 대부로 통했던 할아버지는 체격은 보통이었지만 완력과 기개가 넘쳤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밀고 나갈 줄 알았던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술을 워낙 좋아하셔서 장날 우시장에 나온 주민들에게 술 한 잔 사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마도 많은 어르신들이 '류경택의 손자'였기에 나를 찍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나를 '토박이 농사꾼'으로 조련한 분이기도 하였다. "농촌에서 공무원을 하려면 농사일에도 만능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신 덕분에 낫질, 톱질, 쟁기질은 물론이고 가마니와 돗자리 짜는 일, 똥지게 짊어지는 일까지 배웠다. 6.26전쟁이 일어난 12세 때는 화목을 구하기 위해 산에도 올라갔는데, 할아버지는 나에게 맞춤형 지게까지 만들어주셨다. 그때 키운 체력 덕분에 대전고 시절 '깡패 잡는 주먹'으로 불리며 협객 흉내를 낼 수 있었다.

▲ 어머님과 할머님.

어머니(정순금)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스무 살에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는 5년 뒤 전염병으로 남편을 잃었다. 어머니는 자식을 셋이나 키울 자신이 없었기에 유복자인 남동생을 떼어내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삼남매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아무도 몰래 매질을 하는 등 '아버지 없는 자식들'을 정말 독하게 키웠다. 우리 삼남매는 "자신의 말과 행동에 스스로 책임지라"는 어머니 말씀을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덕분에 나는 나이보다 빨리 어른이 되었다.

어머니는 남을 위한 봉사와 구제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1978년 한국부인회에서 '착한 어머니상'을 받았을 정도였고, 이 단체의 옥천지회장도 맡았다. 6.25전쟁 당시 30대 시절에는 국민방위군으로 끌려와 거지 같이 헐벗은 모습으로 옥천을 지나던 젊은 사람들에게 밥을 해 먹여서 보내기도 했다. 아마도 많은 주민들이 '정순금의 아들'이었기에 나를 찍었을 것이다.

■ "천사 선생님 남편이 출마 했대요"

아내(박복임)의 역할이 어쩌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릉 출신인 아내는 천안복자학교의 국어교사였다. 수녀가 되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그런데 의사인 장인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부모가 신자가 아니면 수녀가 될 수 없던 모양이다.

수녀의 꿈을 포기했을 무렵 아내는 이미 30세의 노처녀였다. 당시 나는 대전으로 통근하고 있었다. 내가 천주교 영세를 받을 때 대부(代父)였던 제과점 성심당 사장님이 아내를 소개해주었다.

1968년 30세 동갑내기였던 우리 두 사람은 평생의 인연을 맺었다. 결혼과 함께 아내는 옥천으로 전근을 왔다. 1968년부터 1998년까지 약 30년 동안 청산중과 동이중만 빼고 군내 거의 모든 학교에서 아내는 국어교사로 근무했다.

아내는 가는 곳마다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천사 선생님'으로 불렸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학생들을 위생실로 몰래 불러서 먹이곤 했기 때문이다. 먹을 음식이 부족하면 짜장면을 시켜서라도 먹였다.

"천사 선생님 남편이 군수 출마 했대요."

실제로 많은 유권자가 했던 말이다. 그 말의 위력은 엄청났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당선의 절반은 아내 몫이었다고 생각한다.

숙부(유인영)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숙부는 옥천군청 공무원이었다. 하지만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군청 앞에서 시계포를 운영했는데, 동창을 비롯한 주민들이 읍내에 나오면 반드시 들르는 사랑방 구실을 했다. 그렇게 쌓은 숙부의 인맥도 선거 당시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 군수 재임 시절의 류봉열씨 사진이 거실 벽면에 걸려있다. 그 앞에 그의 신앙생활을 보여주는 성경책이 놓여있다.

 

■ 고마운 이들 밥 한 끼 꼭 대접하고 싶어

선거운동과 공직생활 중 큰 도움을 받았던,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는 사람은 가족 외에도 많았다. 그 중에서 굳이 한 사람을 꼽으라면 진유환 비서실장이 떠오른다. 주변에 지연, 혈연, 학연을 초월한 합리적 사람을 비서실장으로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많은 사람이 그를 지목했다. 처음에는 2년 동안만 일하고 원래 업무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약 9년을 나와 함께해주었다. 이런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군수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여생 동안 꼭 하고 싶은 일은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다. 내년이면 내 나이 음력으로 팔순이 된다. 지금 앓고 있는 병을 이겨내고 고마운 분들을 모시고 식사를 할 수 있는 자리를 꼭 마련하고 싶다. 요즘 인생이 참으로 공허하다는 것을 느낀다. 인생이란 결국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인데, 고마운 사람들 모시고 밥 한 끼 꼭 대접하고 싶다.

나는 많은 돈도 벌지 못했고 재산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선거로 졌던 빚은 모두 갚았다. 플러스도 없고 마이너스도 없는, 모든 것이 제로(0) 상태로 돌아왔다. 지금은 40년 공직 생활을 했던 아내의 연금으로 살고 있다. 더 이상 욕심낼 것도, 집착할 것도 없다. 남은 인생 아내와 함께 서로 의지하며 담담하게 살다 갈 것이다.

나는 가훈을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으로 정했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그랬듯이, 내 자녀들에게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지라'고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무엇이 되라'고 하거나 '무엇을 하지 말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그들의 선택을 존중했고, 끝까지 믿고 기다려줬다.

세례명이 '바오로'인 장남 재훈은 1998년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됐다. 미국에서 5년 동안 머물다가 귀국해 충주의 성당에서 성직을 수행하고 있다. 젊은 시절 3년 동안 수도원에 들어가 수사를 꿈꿨던 차남 재영은 하늘의 뜻이 있었던지 세상으로 돌아와 회사원으로, 장녀 현승은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재영이 1남2녀, 현승이 1남1녀를 낳아주었다. 모든 것이 고맙다.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해주신 아버지

둘째아들의 감사편지

아버지는 세 살 때 무서운 전염병으로 부친(저에게는 할아버지)을 하늘나라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당시 전염병으로 동네 사람 절반이 죽어나갔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가족이 전염병에 걸렸는데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살려놓고 돌아가셨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셨고요.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아버지. 처음 선거에 나간다고 하실 때, 그리고 재선에 도전한다고 하실 때 온 가족이 반대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는 단식투쟁(?)까지 감행하셨지요. 물론 나중에 아버지의 진심을 이해한 뒤에는 모두 유세를 도왔습니다. 유세차도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저는 손나팔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외쳤습니다.

"저는 류봉열 후보의 아들입니다. 우리 아버지, 부지런하고 정직하고 효자입니다. 열심히 일할 테니 꼭 뽑아주십시오."

어린 시절부터 예의, 규범, 절제, 중용을 강조하신 진심을 믿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해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남은 인생 건강 회복하셔서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차남 재영 올림)

▲ 젊은 시절 류봉열씨 가족 사진.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취재재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박누리 옥천신문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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