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인생은아름다워(16)]"욕심 부리지 않고 손해 보듯 사는 게 진정한 성공"

전북열(84, 옥천읍 가화리)씨 이야기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l승인2019.12.22l수정2019.12.21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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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가화리에 사는 전북열 씨(84)입니다. 그는 평생을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살아왔습니다.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도 드라마 같은 절정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1975년 죽향초등학교 축구부 전국대회 우승 신화 당시 감독으로 활약했던 순간을 그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교감 고시를 통과하기 위해 아내와 각방을 쓰고 앉은 채로 자면서 공부하다 코피를 흘리는 등 '자기와의 싸움'을 치열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니 혼자 이룬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중국 고서 <전국책(戰國策)>에 백락일고(伯樂一顧)라는 고사가 나옵니다. 아무리 뛰어난 천리마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소금수레밖에 끌지 못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죽향초 축구부 감독으로 불러준 이원종, 장학사로 추천한 윤창섭, 한벌초 축구부 감독으로 경쟁자였지만 교육감 시절 스스럼없이 대해준 김천호, 정년퇴직 이후 옥천노인대학 학장, 삼락회옥천지회 지회장, 옥천향교 전교 등으로 봉사하게 이끌어준 유무현 등 선배와 동료 교사들의 배려와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현재는 옥천노인장애인복지관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친구처럼 지내는 금슬 좋은 아내,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육남매가 있어서 그는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손해 보듯 살아왔다는 그의 인생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봤습니다. 은빛자서전에 전북열 씨를 추천해주신 옥천신문 독자 전완화씨에게 감사드립니다.

▲ 전북열·조정애씨 부부가 거실 벽에 걸린 커다란 묵주 목걸이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30년 전부터 옥천성당에 출석하고 있는 부부에게는 신앙생활이 큰 힘이 되기도 한다.

 

■ 군서에서 대전까지 자전거로 학교 다녀

나는 1935년 옥천군 군서면 상중리에서 태어났다. 농사를 짓던 아버지(전금용)는 군서면 은행리에서 시집온 어머니(서순덕)와의 사이에서 7남매를 낳았는데, 나는 여섯째였다. 위로 누님 셋, 형님 둘이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 하나가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셨고, 둘째형은 6.25전쟁 때 전사했다. 동생은 건설회사 착암(암석을 폭파하기 위한 구멍을 만드는 일)기사로 일하다가 사고를 당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사실 '전북열'은 매우 희귀한 이름이다. 이름에 '북(北)' 자가 들어간 경우는 드문 일인데, 아마도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전국에서 내가 유일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군서면 주재소 지서장이었던 일본인이 자주 놀러왔는데, 마침 태어난 나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한국 사람이라면 결코 이런 이름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큰형(전성남)이 홀로 남은 어머니를 모시고 가장 역할을 했다. 큰형은 농사를 지으면서 정미소도 운영했고 소 장사도 했다. 옥천 우시장에서 구입한 소를 소몰이꾼을 고용해 경기도 평택까지 몰고 가서 비싸게 팔도록 했다. 큰형은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도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던 나에게 일부러 일을 시키지 않았다. 덕분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를 몰고 들에 나가 실컷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군서초등학교, 대전사범병설중학교(나중에 대전사범은 공주교대, 중학교는 충남여고가 되었다)를 졸업하고 대전사범에 합격했다. 자전거를 타고 비포장 신작로로 통학하다가 나중에는 통근열차를 이용해 학교를 다녔다.

1957년 3월 30일 대전사범을 졸업한 나는 첫 발령을 받은 이래 약 40년을 교사로 근무했다. 송남초(경남 남해), 이수초(충북 영동), 회남초(충북 보은) 등 타지에서 근무한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기를 고향 옥천에 있는 군서초, 군북초, 우산초, 삼양초, 신선초, 청산초(교장), 죽향초(교장) 등에서 보냈다. 교감이 되기 전에는 3년 동안 장학사로 봉직하기도 했다.

교사로 발령받던 해에 네 살 어린 군서초 후배 조정애와 결혼했다. 부산으로 사업하러 떠난 장인을 따라 갔던 아내는 동래여중을 다니다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족과 함께 귀향한 장인은 옥천읍과 군서면에서 양조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내의 사촌오빠가 내 친구였는데, 배가 고프던 시절이라 친구 따라 고두밥을 얻어먹으러 양조장에 갔다가 아내와 재회했다.

전국대회 우승한 죽향초 축구부의 전설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을 꼽으라면 죽향초등학교 교사 겸 축구부 감독으로 활동한 시기(1971~1976년)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죽향초 이원종 교감이 축구부를 지도할 교사가 필요하다며 요청하는 바람에 부임한 이후 6년 동안 활동했다. 당시 내 나이 37~42세로 의지와 열정이 한창 넘치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 기간에 죽향초 축구부는 전국소년체전 2회 우승, 시도대항 선수권대회 1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이원종 교감은 '숭배'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내가 정말 존경하던 선배 교사였다. 대전사범 시절 축구부에서 활약한 사실을 거론하며 감독으로 와 달라고 간절히 요청하니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는 점심시간에도 축구부 아이들과 어울리며 각자의 특기와 장단점이 무엇인지 파악하려 노력했다. 나는 이 교감과 함께 관련 서적을 구해 읽으며 축구 전술도 연구하고 작전도 짰다.

큰 대회를 앞두고 합숙생활을 할 때는 아이들과 동고동락했다. 아이들의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개구리를 직접 잡아와 끓여서 먹이기도 했다. 담력을 키워주기 위해 늦은 밤에 모두 깨워 공동묘지까지 달려가기도 했다. 라이벌 상대팀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경북 풍기까지 가서 연습하는 장면을 몰래 살펴보기도 했다. 일종의 정보전이었다.

"계속 움직여라. 절대 운동장에 가만히 서 있지 말거라. 동료가 패스하면 그냥 서서 기다리지 말고 '마중'을 나가서 공을 받아라. 항상 상대의 움직임을 살펴라. 그리고 상대에 '업히지' 말고 '업어야' 한다."

당시 연습이나 경기를 할 때 내가 해주었던 말이다. 선수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마중'이나 '업다'라는 표현을 썼던 것 같다. 그런 노력과 정성을 기울인 덕분인지 4~5년이 지나면서부터 죽향초 축구부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4~1975년 전국소년체전에서 충북 대표로 출전해 군 단위 학교로는 드물게 우승컵을 차지했다. '죽향초 축구부 돌풍 신화'는 신문과 방송에 대대적으로 소개되었고, 옥천 읍내 중심가에서 시가 행렬이 펼쳐지기도 했다. 주민들이 선수들과 교사를 향해 박수를 치면서 외쳤다.

"죽향초 만세! 옥천 만세!"

당시 활약했던 축구부 선수로는 정기동, 최상국, 남기영, 신상근, 홍승훈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국가대표가 세 명이나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6학년 시절 내가 담임을 맡았던 정기동은 청주 대성중, 청주상고, 포항제철 축구팀을 거쳐서 국가대표 골키퍼로 활약하기도 했다. 전국대회를 앞두고 기량이 뛰어난 충북의 다른 학교 선수들도 합류했는데, 그 중에는 청주 한벌초의 최순호도 있었다

▲ 전북열·조정애씨 부부의 가족사진. 막내 아들이 결혼하기 전이라 막내 며느리가 나오지 않은 사진이라며 아쉬워했다.

 

■ 200회 넘는 주례사에 꼭 들어가는 말들

지금까지 200회 이상 결혼식 주례를 섰다. 처음에는 가까운 친구나 제자의 부탁을 받고 시작했는데, 하객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면서 요청이 늘어났다. 준비해간 주례사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현장 상황이나 분위기를 고려해서 탄력적으로 진행했는데, 그것을 인상적으로 보셨던 모양이다.

여러 차례 주례를 서다 보니 혼인 서약과 성혼 선언문은 안 보고도 줄줄 외울 정도가 됐다. 나는 "어떠한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고 존중하며 어른을 공경하고 진실한 남편과 아내로서의 도리를 다 할 것을 맹세"하는 혼인 서약과 성혼 선언문을 장롱 속에 넣어두지 말고 거실이나 침실에 걸어둘 것을 당부한다. 신랑과 신부를 한껏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주례사의 첫 번째 메시지는 "욕심 부리지 말고 살자"이다. 80년 넘게 살다 보니, 조금 손해 보듯 사는 것이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먼저 타인을 배려하며 손해 보는 듯이 살아 보니 신기하게도 오히려 좋은 결과로 이어지곤 했다.

두 번째 메시지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자"이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긍정적 사고와 태도가 필요하다. 상대가 발언할 때 가능하면 "맞습니다", "그렇습니다"라고 반응해주는 것이 좋다. 상대가 뭔가를 요청할 때도 "안 됩니다"라고 즉답하는 것보다는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좋다.

세 번째 메시지는 "3가지 비밀은 반드시 배우자와 공유하자"이다. 금전(金錢)의 비밀이 없어야 한다. 배우자와 공유하지 않는 비자금은 부부 갈등의 원인이 된다. 이성(異性)의 비밀이 없어야 한다. 옛날 애인이 있더라도 결혼 이후에는 배우자 몰래 만나면 안 된다.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신뢰가 깨진다. 처소(處所)의 비밀이 없어야 한다.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문상을 왔다고 거짓말하면 안 된다.

'욕심 부리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욕심 부리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얼굴이 환해진다. 마음에 쌓여 있던 독소도 사라진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활짝 펴고 다니게 된다. 그런 마음의 상태는 반드시 얼굴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남은 인생도 욕심 부리지 않으며 살다가 죽고 싶다.

지난해(2017년)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례(回婚禮)를 치렀다. 회혼례를 치르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우선 부부가 모두 생존해 있어야 하고, 이혼하거나 재혼하지 않아야 한다. 자녀에게도 같은 기준이 적용되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큰 불행한 사고가 없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회혼례를 치를 수 있었던 우리 부부에게 결혼은 축복이고 영광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욕심 부리지 않고 산 것에 대한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아내 조정애와의 슬하에 6남매를 두었다. 희숙, 옥, 미옥 세 딸에 이어 아들 용대가 태어났고, 딸 미경과 아들 광대가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이 다시 9명의 손주(5남4녀)를 낳아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 막내 아들 부부가 선물한 감사패

 

타인에겐 너그럽게 자신에겐 엄격하게

■ 육남매의 감사편지

아버지의 장점을 몇 가지 언급하는 것으로 감사편지를 대신할까 합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자주 칭찬하셨습니다. 과묵함, 강인함, 든든함이라는 미덕에 자상함이라는 미덕까지 더해지며 아버지의 노년은 더욱 빛날 수 있었습니다. 아니 이미 오래 전부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흥겹고 유쾌하게 애정을 표현하며 사시기로 결심하신 듯했습니다. 어머니의 영원한 친구이자 유쾌한 동반자가 되어 노년의 로맨스를 만끽하셨습니다. 행복한 부부의 모습으로 우리 육남매의 표상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우리 육남매에게 늘 말씀하셨지요. 욕심 부리지 말고 손해 보듯 살라고, 그렇게 사는 것이 결국 이익을 얻는 삶이 될 것이라고. 하지만 타인에겐 너그럽게 대하되 자신에겐 엄격하게 대하라고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전쟁과 가난을 겪으신 세대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아버지도 특별히 자녀들의 경제적 자립을 역설하셨습니다. 덕분에 우리 육남매가 건실한 생활인으로 살아갈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평소 자기 관리도 철저히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건강을 관리하는 일에 많은 정성을 기울이셨습니다. 아침과 저녁에 규칙적으로 운동함으로써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우리 육남매로 하여금 가장 크게 반성하게 만드는 대목이었습니다. 부모님이 건강하게 인생을 즐겁게 보내시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면서 우리 육남매의 크고 넓은 그늘이 되어주실 것에 미리 감사합니다.

▲전북열씨 집에는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이 곳곳에 걸려있다. 사진은 부부와 막내 아들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 전씨는 막내 며느리가 (위)가족사진에 나와있지 않다며, 이 사진을 꼭 실어달라고 말했다.
▲ 독서를 하며 여가를 보내는 전북열씨.
▲ 전북열씨는 퇴직 후에도 활발한 사회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집 거실 한 편 서랍장 위에 노인대학교 교장 명패와 함께 가족들의 이름과 가훈이 적힌 도자기, 가족사진 등이 놓여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취재재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박누리 옥천신문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객원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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