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18)] 옥천에서 산 60년,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일세!"

문병규(81, 옥천읍 금구리)씨 이야기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l승인2020.01.13l수정2020.01.13 21:53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문병규(81, 옥천읍 금구리)씨 이야기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 이모 찾아 60년 전 옥천행
북한 출신, 고아로 세파 헤치며 살아온 행복한 팔십 인생!

이번에 만난 사람은 옥천읍 금구리에 사는 문병규(81)씨 입니다. 그는 북한 출신, 고아원 출신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옥천에 살던 이모를 찾아오면서 인생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북한 출신은 생활력이 강하다"는 아내의 긍정적 신뢰와 기대를 주문(呪文) 삼아 더욱 성실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5남매를 공부시키려고 경부고속도로 공사판에서 일할 때는 주야간 근무를 자청해 '월 40일 근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고아원 출신이었기에 눈빛만 봐도 상대의 심리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고, 그것을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긍정적 마인드로 키워낼 수 있었습니다. 평남 진남포 출신 고아가 옥천에 와서 아내를 만나 5남매와 그 배우자(10명), 손주(10명)까지 총 22명의 대가족으로 거듭난 사연을 들어봤습니다.

▲ 문병규씨 집 마당에는 몇 해 전 심은 감나무, 대추나무가 소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크진 않지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내는 나무처럼, 그도 화려하진 않지만 제 자리에서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 여든이 넘은 지금도 하루 3만보 이상 걷고 자전거 타기, 그라운드 골프 등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성실히 무언가를 해내는 것이 그 삶의 미덕일지도 모르겠다. 지난달 31일 감나무 가지가 드리운 자택 대문 옆에서 문씨가 파란 하늘을 보며 활짝 웃고 있다.

 

■ 진남포, 용두동 그리고 앙카라 고아원

나는 1938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했는데, 아버지(문정빈)와 어머니(임명숙)는 생활 터전을 용두동에 잡았다. 여름이 되면 드넓은 배추밭 가운데 위치해 있던 둠벙에서 아이들과 어른들이 어울려 목욕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큰아버지와 사촌형들이 살고 있던 진남포에 놀러 갔던 추억도 아스라이 떠오른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탄 아버지와 나는 진남포역에서 내렸다. 역에서 하차해 아버지 손을 잡고 작은 언덕을 넘어가면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바닷가 마을에 있던 큰집에는 두 명의 사촌형, 한 명의 누이가 있었다.

당시 큰 사촌형은 20대의 청년이었는데, 진남포제련소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촌형들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사촌동생을 데리고 여기저기 놀러 다녔다. 바닷물이 빠지는 썰물 때가 되면 게를 잡으러 갔다. 여름에는 모기향을 피워놓고 시원한 우물물에 담가두었던 수박을 꺼내서 먹기도 했다.

내가 예닐곱 살 때였을 것이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와 함께 급히 진남포에 갔다. 당시 아버지가 너무나 서럽게 울어서 어린 나도 따라 울었던 것 같다. 젊은 나이에 가장이 된 큰 사촌형의 이름은 문병철이었다. 혹시 사촌형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한 적도 있었다.

평화롭고 행복했던 유년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 네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재혼도 하지 않고 아들을 홀로 키우던 아버지마저 내가 열세 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종암초등학교 5학년 때 전쟁이 일어나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발안을 거쳐 수원으로 피난을 갔는데, 아버지는 그 이듬해에 돌아가셨다.

조실부모(早失父母). 졸지에 고아가 된 나는 미군부대 주변을 떠돌다 수원의 한 고아원에 들어갔다. 터키 군인들이 운영하던 '앙카라 고아원'에는 약 100명의 고아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터키 군인들은 '후퇴를 모르는' 용감한 부대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일상 속에선 수시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터키 군인들은 얼마 후에 의정부로 주둔지를 옮겼다.

나는 앙카라 고아원에서 생활하며 매산초등학교, 수원북중학교, 수원농업고등학교를 다녔다.

 

▲ 문병규씨

 

■ 1958년 12월 5일 옥천역에서 내리다

195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살길이 막막했던 나는 군 자원입대를 결심했다. 마침 병무청이 동대문구에 있었기에 자원입대 절차를 마치고 용두동을 방문했다. 전쟁이 일어난 초등학교 5학년 때 피난을 가느라 떠났던 용두동을 8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찾은 것이다.

"네가 정말 병규란 말이냐? 몰라볼 정도로 컸구나!"

여전히 용두동에 살고 있던 동네 주민들이 '청년으로 성장한 소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의 단서를 건네주었다.

"병규야, 마침 작년에 네 이모가 너를 찾아 여기 왔었다. 지금 살고 있는 주소를 적어주면서 네가 여기 오면 알려주라고 했어."

"이모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디라고 하시던가요?"

"충청북도 옥천이라고 했어."

그해 12월 5일 옥천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나는 이날을 절대 잊지 못한다. 내가 옥천과의 60년 인연을 맺은 날이기 때문이다. 이모(임용숙)와 이모부(조준태)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종이를 오른손에 꼭 쥐고 수원역에서 출발한 나는 이날 오후 옥천역에 도착했다. 마침 이날은 옥천 장날이었다. 이모가 살고 있는 석탄리로 가기 위해 인파를 헤치며 읍내를 가로질러 걸었다. 중간에 위치한 영남방앗간에 들어가 이모와 이모부의 이름을 불러주며 아느냐고 물었지만 모른다는 답변만 들었다.

문득 제31회 지용제 프로그램 중 하나인 '정지용 고향집 가는 길'이 떠오른다. 올해 5월에 진행된 이 프로그램은 옥천역에서 내린 정지용 시인이 고향집까지 걸어갔던 여정을 똑같이 답사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다음은 그날의 여정을 기록한 옥천신문 기사다.

"옥천역에서 길을 건너자마자 현재의 우체국이 있다. 그 건너편은 옛 경찰서 터였다. 옛 우체국 터는 지금의 박덕흠 국회의원 사무실이 있는 건물이었다. 그 터를 지나 옥천읍내로 들어서려면 건너야 하는 금구천. 금구천을 건너려면 옥천교를 건너는데, 본래 1917년에 건설했다. 옥천 최초의 병원인 삼산의원(현 국민은행 자리)과 옛 옥천읍사무소(옛 대가식당, 현 공영주차장) 터와 옥천여중 자리에 이르러 연못이었다는 설명과 천주교 성당 자리에 있던 일본 신사도 빼놓을 수 없는 흔적이다."

옥천역에서 내린 정지용 시인의 답사 여정은 그의 모교인 구읍의 죽향초를 거쳐 그가 태어난 생가에 도착하는 것으로 끝났다. 공교롭게도 1958년 옥천역에 내린 내가 걸었던 여정과 거의 비슷하다. 물론 나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구읍과 수북리를 지나서 석탄리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 문병규씨 부부와 큰 딸 내외, 손자가 함께한 중국여행에서.

 

■ 가장(家長)의 이름으로 힘들 줄 모르고

묻고 또 물어서 마침내 석탄리에 도착했다. 이모는 장정이 되어 나타난 조카를 부둥켜안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네가 정말 병규니? 고생 많았다."

"이모님, 잊지 않고 저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너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네가 아기였을 때 내가 너를 업어 키웠단다."

이날을 계기로 옥천은 나의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었다. 1959년 8월 17일 나는 해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1962년 8월 16일까지 진해에서 정확히 36개월을 근무했다. 해병대를 LST에서 육지까지 실어다주는 상륙정이 나의 근무 공간이었다.

당시 해군의 군기는 무척 셌다. 하지만 고아원에서 단련된 눈치 능력 덕분에 군대 생활이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 실제로 나는 당시 표정이나 말투만으로 상대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대 이후 "군대에서 도전정신을 배웠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군대 동기 모임을 아직도 갖고 있는데, 세월이 흘러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 지금은 4명이 만나고 있다.

1960년 11월 16일 나는 결혼했다. 군 복무 중에 이모의 중매로 석탄리에 살고 있던 동갑내기 최복수와 평생의 연(緣)을 맺었다. 가장이 된 나의 가장 시급한 임무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었다. 제대 직후 대전에 있는 주류회사 선양의 주정공장에 입사했다. 이듬해 장녀 혜영이 태어났다.

대전 생활은 4년 만에 끝났다. "옥천으로 돌아가서 살자"는 아내의 간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마침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어서 인부로 일했다. '고아원 눈치'로 배운 타인에 대한 배려, '군대 밥' 먹으며 배운 '하면 된다' 정신이 여기서도 발휘되었다. 꾀부리지 않고, 창의적으로 열심히 일하자 현장 감독의 신뢰를 얻었다. 당시 일당이 500원이었는데, 나는 750원을 챙겨주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어느 날 현장감독이 한 달 동안 내가 일한 것을 정산하다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이유는 내가 '월 40일 근무'를 한 것으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터널을 뚫느라 주야간 작업을 가동했는데, 나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하여 야간작업에도 참여했다. 당시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현장감독 경력 15년 만에 월 40일 일한 사람은 처음 봅니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후에 나는 한국전력 수금원으로 일했다. 차녀 숙영, 장남 용환, 삼녀 소영, 사녀 수정이 차례로 태어났다.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5남매를 가르쳤다. 당시 우리 가족은 교육청 앞 주택에서 살았는데, 4녀1남이 나를 닮아서 기억력이 좋았던지 모두 공부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학교에 다녔다.

▲문병규씨와 절친한 친구이자 동생,. 김성환(왼쪽)씨가 사진을 함께 찍었다. 지난 5월 지용제 당시 옥천신문이 주최한 여울길 걷기 행사에 참여했을 때 모습이다

 

■ 나를 행복하게 만든 아내의 주문(呪文)

"당신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내가 나에게 가끔 해주는 말이다. 단 한 명이었던 식구가 아내,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주까지 포함해 22명 대가족으로 늘어났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실제로 나는 가을에 김장할 때 대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서 시끌벅적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두 사람을 꼽으라면 아내와 이모라고 말하고 싶다. 아내는 정직, 성실, 절약의 정신으로 내조하며 아이들을 바르게 키워주었다. "북한 출신은 생활력이 강하다"는 아내의 긍정적 신뢰를 주문(呪文)으로 삼아 더욱 성실하게 살 수 있었다. 내가 옥천에 오고 나서 5년 뒤에 별세할 때까지 친자식과 조금도 차별하지 않고 아낌없이 모정(母情)을 나눠주신 이모님은 내 평생의 은인이다.

나는 아내 최복수와 사이에서 5남매를 얻었다. 이들이 다시 10명의 손주(3남7녀)를 낳아주었다. 후손들과 더불어 오랫동안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희생, 헌신, 배려의 마음 고맙습니다

■ 장남 용환 씨의 감사편지

아버지. 어릴 때부터 저에 대한 아버지의 배려는 각별했습니다. 어릴 적 장에서 썰매 날을 사다가 저를 위해 직접 멋있는 썰매를 만들어 주셨어요. 겨울철에 그것을 탈 때마다 철사 썰매를 타던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마도 일찍 고아가 되셨기에 자식만큼은 더 많은 부모의 사랑을 누리게 하고 싶었던 듯합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벌려고 타지 생활을 오랫동안 하셨습니다. 그래서 명절 때도 차례만 지내고 곧장 근무지로 출발하곤 하셨어요.

당연히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딸이 결혼하고 손자 손녀가 생긴 후에도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 직장 생활을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희생과 헌신으로 우리 가족이 행복해질 수 있었다고 믿기에 다시 한 번 깊이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부모님 연세가 많다 보니 자식으로써 늘 건강에 신경이 쓰이곤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아프면 자식들 힘들다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건강관리와 질병예방에 각별히 신경을 쓰십니다.

덕분에 부모님도 건강하시고 건강한 부모님을 바라보는 자식들도 마음이 편합니다. 젊어서는 자식들에게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어서 고생하시고, 지금은 자식들 마음 편하라고 건강에 신경을 써 주시니 이 은혜 어찌 다 갚을까요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취재재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사진 박누리 옥천신문 기자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한겨레신문 주주 되기
한겨레:온 필진 되기
한겨레:온에 기사 올리는 요령
<저작권자 © 한겨레: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마포구 효창목길 6 (공덕동 116-25) 한겨레신문사 주주커뮤니케이션팀  |  전화 : 02)710-0124  |  등록일 : 2015년 1월 15일  |  발행일자 : 2015년 1월 1일
등록번호 : 서울 아03523  |  발행인 : 양상우  |  편집인 : 김광호  |  에디터 : 이동구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광호
편집위원 : 김경애, 김국화, 김동호, 김미경,김태평, 서기철, 심창식, 정혁준, 허익배   |  객원편집위원 : 김혜성, 박효삼, 안지애, 양성숙, 유원진, 최성주, 하성환
Copyright © 2020 한겨레:온.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