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별! 오동진은 누구인가(3)

-1920년대 남만주 정세와 독립운동 정치지형 하성환 객원편집위원l승인2020.01.27l수정2020.01.27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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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주의 계열 오동진 장군이 속한 ‘통의부’와 복벽주의 계열 전덕원이 속한 ‘의군부’의 유혈 충돌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당시 중립을 지키고 있던 통의부 무장부대 일부가 1923년 8월 ‘통의부’를 이탈하여 새로운 항일독립운동단체 ‘참의부’를 조직했다.

참의부 조직 건설에서 선두주자는 통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 백광운이었다. 백광운은 서로군정서 출신으로 본래 복벽주의자였지만 통의부와 의군부 충돌 과정에서 중립을 지켰다. 나아가 통의부와 의군부 간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다.

백광운의 참의부 건설에는 상해 임시정부와 관련이 깊다. 상해 임시정부 학무차장이자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 사장이던 김승학은 통의부와 갈등이 진행되던 와중에 제1중대장 백광운과 제3중대장 박응백에게 선을 대었다. 그리하여 임정고수파로서 상해 임정 요인 김승학은 1923년 12월 2일 백광운과 김원상을 만주에서 상해로 불러들인 것이다.

▲ 상해임시정부 직속 무장부대 참의부 제4대 참의장 김승학(일명 김희산)이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 직후 모습.

(출처 : 독립기념관)

상해 임정 요인 김승학을 만난 뒤 남만주로 돌아온 백광운은 자신이 지휘하던 통의부 1중대 병력과 제2중대 대한독립단의 이웅해파, 제3중대 천마산대 병력 그리고 유격대와 독립소대를 통의부에서 분리시켜 ‘참의부’를 건설한 것이다.

1923년 8월 ‘참의부’ 창립 전인 4월에 백광운은 '남만군인대표' 명의의 「선언서」와 통의부에서 이탈한 제1중대, 2중대, 3중대, 유격대, 독립소대 대표로 구성된 '육군군사회의' 명의로 「南滿軍民에게 警告」를 동시에 공표했다. 「선언서」에선 참의부가 상해 임시정부의 직할부대임을 천명했고 「警告」에서는 동족상잔을 일삼는 통의부를 "야욕의 소굴"로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1923년 4월 「선언서」 이후 통의부 제5중대(중대장 김명봉) 역시 임시정부 군무부 소속에 동의하며 통의부를 탈퇴, 참의부에 합류했다. 참의부는 1923년 6월 24일 통의부 제1중대, 2중대, 3중대, 5중대와 독립소대, 그리고 유격대 대표가 참석한'육군장교회의'에서 참의부 조직을 결성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상해 임시정부에 알리자 상해 임정은 1923년 6월 26일자로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 육군으로 참의부를 승인했다.

통의부 중대장 백광운이 주도해 만든 참의부는 1923년 국민대표회의 직후 유일하게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했던 독립운동단체였다. 참의부 본래 명칭도 ‘大韓民國 臨時政府 陸軍駐滿 參議府’였다.

그러나 항일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벌어진 살육전은 멈추질 않았고 비극은 확대되었다. 먼저 통의부 무장부대가 통의부에서 뒤늦게 이탈한 통의부 제5중대장 김명봉을 1923년 8월 반역자로 처형했다. 그리고 통의부 제6중대장 문학빈은 한 달 뒤 9월에 참의부 조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백광운(일명 채찬)마저 살해한 것이다.

▲ 의병 출신이자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참의부 제1대 참의장 백광운은 김동삼과 함께 백서농장을 일궈 백서농장 농감의 지위에 올랐던 열혈 항일투사였다. 그러나 공화주의 계열 통의부와 복벽주의 계열 의군부 간 갈등과 유혈투쟁이 전개되는 와중에 중립을 지키다가 통의부를 이탈해 상해 임시정부의 지지와 연계 속에 참의부를 건설했다. 그러나 같은 독립군인 통의부 동지들에 의해 피살되는 참극을 맞았다. (출처 : 독립기념관)

국민대표회의 당시 통의부는 위임통치를 주장한 이승만을 배격하고 임시정부를 고쳐서 다시 쓰자는 개조파에 속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성과 없이 무산되자 통의부는 상해 임시정부를 임시정부로서 자격이 없다며 그 존재를 부정했다.

따라서 임시정부를 지지하며 임정 산하 육군으로 자리매김한 참의부와 임시정부를 부인했던 통의부의 충돌은 독립운동 전선의 분열 속에서 어쩌면 예견된 참사였을지도 모른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무산되고 그에 따른 전체 항일독립운동 전선이 분열되는 것과 통의부-참의부 분열은 관련이 매우 깊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고 이후 임시정부 개조파가 권력을 장악한 뒤 이승만 탄핵과 함께 정부조직을 내각책임제로 개편했다. 그리고 정의부 이상룡을 초대 국무령으로 추대했다. 이어서 통의부를 계승한 정의부와 북만주 항일세력인 신민부, 그리고 참의부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지만 정의부 김동삼, 오동진, 이탁, 신민부 김좌진은 국무위원 참여를 거부했다.

▲ 경북 안동 출신 항일독립지사 석주 이상룡 선생은 나라가 망하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집단 망명을 단행해 우당 이회영 선생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3500명을 길러냈다. 경학사 - 서로군정서 - 통의부 - 정의부를 지도했으며 일가 전체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존경받고 있다.

(출처 : 독립기념관)

특히 임시정부 참여를 두고 정의부 내 중앙행정위원회와 중앙의회의 분열은 심각했다. 결과적으로 정의부 출신 이상룡조차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국무령을 사임할 정도로 당시 임시정부는 사분오열된 상태였다.

거족적인 3・1 만세 운동의 희생을 딛고 성립된 통합 임시정부는 파쟁과 독립운동 노선 상의 다툼으로 대립과 갈등만 낳은 채 단일한 대오를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이러한 정치정세는 1923년 국민대표회의 결렬을 초래했고 이것은 고스란히 남만주 항일독립운동 단체의 분열과 불화, 그리고 같은 항일독립군들끼리 죽고 죽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했다. 1923년 하반기 남만주 항일무장단체인 통의부와 참의부 간 대결은 불화를 넘어 돌이킬 수 없는 적대적 관계를 연출한 것이다.

이후 통의부와 참의부는 남만주 한인사회에서 항일독립운동 단체로서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상호 비방전을 전개하였다. 통의부는 참의부를 향해 '광복대업의 반역자'로 비난했고 참의부는 통의부를 향해 상해 임정을 부인, 파괴하는 '국적(國賊)'으로 비난했다. 백광운은 매달 김승학이 운영하던 『독립신문』사에 거금을 찬조하였고 『독립신문』은 이에 호응해 통의부를 비난하는 기사와 성토문을 실었다.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가 통의부-참의부로 분열되자 통의부는 통의부 결성 당시 참여하지 않았던 남만주 일대 여타 독립운동단체들을 규합해 1924년 10월 통합회의를 개최했다.

통합회의에서 항일독립운동 단체 대표들은 새롭게 통합된 군정부(軍政府) 성격의 '정의부(正義府)'를 1924년 11월 24일 출범시켰다. 정의부는 출범 직전 통의부를 비난했던 상해 『독립신문』 기사를 반박하면서 『독립신문』 구독을 금지시켰다. 그러자 『독립신문』 사장 김승학은 1924년 11월 29일자 『독립신문』 178호 1면에 사임한다는 특별광고를 게재했다.

참의부는 1925년 1월 15일 輯安縣 楡樹林子에서 대회를 열어'참의부'를 '진동도독부'로 명칭을 바꿨다. 그러나 참의부는 진동도독부로 개칭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1925년 2월 27일 고마령 전투에서 일제의 기습을 받고 제2대 참의장 최석순과 주요 간부들이 전사하는 참변을 겼었다.

집안현 고마령 산중에서 군사작전회의를 개최하다 평안북도 초산경찰서 소속 일제 경찰의 불의의 습격에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다. 군사회의에 참가한 60명 간부들 가운데 42명이 제대로 대응 사격도 못한 채 피살되는 참변이었다. 참의장 최석순을 포함해 42명이 피살되고 3명이 피체되었으며 15-16명 대원만 간신히 피신해 목숨을 부지했다.

참의부가 당한 1925년 2월 고마령 참변은 통의부(정의부)와 참의부 간 정전 평화회의를 여는 계기로 작용했다. 1925년 3월 19일 정의부 중대장 문학빈과 참의부 제2사령장 심용준은 그간의 반목과 대립을 즉시 중단하고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정전협정 후 참의부는 1925년 4월 26일 명칭을 진동도독부에서 '大韓臨時政府駐滿督辦府'로 개칭하였다가 6월 26일 다시 원래 명칭인 참의부로 개칭하였다. 1923년 6월 26일 참의부 출범 이후 1년이 지나 진동도독부(1925년 1월) - 독판부(1925년 4월) - 참의부(1925년 6월)로 세 번 명칭이 바뀐 것이다.

참의부가 고마령 전투에서 크나큰 전력 손실을 입은 지 한 달 뒤인 1925년 3월 북만주에서는 러시아에서 돌아온 독립군 부대를 통합해 김좌진의 신민부가 결성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중후반엔 참의부-정의부-신민부 3부가 바야흐로 만주 항일독립운동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1920년대 독립운동 정치지형은 참의부(1923)-정의부(1924)-신민부(1925)로 개편되었다. 이들 3부는 군정부(軍政府) 성격으로 민정조직과 군정조직을 아울렀다. 즉, 민정조직으로서 관할지역에 대해 자치행정과 군정조직으로서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는 등 무장투쟁을 병행했다.

참의부-정의부-신민부 3부는 각기 지방 대표대회를 통해 남북만주 동포사회를 대표하는 임원을 선출했으며 입법부-사법부-행정부를 두어 공화주의 자치정부를 지향했다. 자체 관할구역 동포사회를 대상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징집을 통해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참의부-정의부-신민부 3부가 과거 무장투쟁 중심에서 관할지역 내 자치행정을 중요시하는 투쟁 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일제 식민 통치가 갈수록 강대해져 가는 현실에서 이러한 항일독립투쟁 전략의 전환은 장기적인 전망 하에 남북만주 한인 사회에 인적・물적 기반을 견고하게 다지기 위한 방편이었다.

군정부로서 3부는 공화주의 이념을 추구한 자치정부로서 그 기능을 실천하고자 애썼다. 남북만주 한인사회 동포들을 보호하고 생계를 유지하며 한인사회 발전과 이주민의 생활 향상을 도모하는 데 주력하였다.

참의부 관할구역은 집안현을 중심으로 무송현, 장백현, 안도현, 통화현, 류하현 등 압록강 접안지역이었으나 점차 집안현, 환인현, 임강현 중심으로 관할지역이 바뀌었다. 반면에 남만주 일대에서 가장 세력을 떨쳤던 정의부 관할구역은 하얼빈, 액목현, 북간도 이남 남만주 전체를 통치구역으로 삼았다.

실제로 정의부는 1924년 성립 초기 8개현에서 1926년 말 경엔 27개현으로 관할구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전 통의부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을 이어받은 탓에 급속히 확장할 수 있었다.

조선일보, 일본 영사관 자료, 만선일보,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등 조사기관에 따라 인구수에 차이가 크지만 1919년부터 1926년까지 남북만주 한인 인구는 50만 명에서 70만 명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정의부 관할 한인 인구는 76,810명 정도로 추산된다.

특히 주목할 것은 관할 구역 내에서 초중등학교를 직접 세워 국어를 가장 중요과목으로 하여 역사, 지리 등 민족교육을 실현하였다. 1920년대 후반까지 정의부가 주관한 학교만도 최소한 22개교였고 교원 33명, 학생수 883명이었다. 한때 북쪽 지도자 김일성이 다녔던 길림성 화전현 화성의숙 역시 정의부가 세운 민족학교였다.

참의부는 학교수 2개, 학생수 49명, 신민부는 학교수 10개, 학생수 288명이었다. 이들 민족학교를 통해 독립군을 지속적으로 길러내 배출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교사와 학생들은 독립군이나 마찬가지로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섰다.

초등교육은 의무교육으로 하였고 세금 성격으로 의무금을 가구당 연간 6-7원 정도를 거뒀다. 만주로 이주한 동포들 절대 다수가 소작농으로 궁핍한 처지였음에도 항일독립투쟁에 대한 동포사회의 지지와 열정은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참의부-정의부-신민부 3부는 1920년대 후반 민족유일당 운동의 흐름에 맞춰 1928년 5월 정의부 김동삼이 주도해 3부 통합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정의부 현익철, 고활신, 참의부 심용준, 신민부 민정위원회가 통합해 국민부(남만주)를 1929년 4월 조직했다. 반면에 정의부 김동삼, 지청천과 참의부 김승학, 신민부 김좌진 등 군정위원회가 통합해 1928년 5월 혁신의회(북만주)를 결성했다.

국민부는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여 민정 조직으로서 자치행정에 전념했고 군사조직으로 조선혁명군을 두었다. 반면에 혁신의회는 과도기적 조치였으나 결실을 보지 못한 채, 1년 뒤 해체되었다.

▲ 아나키스트 백야 김좌진 장군이

코뮤니스트에게 피살된 산시참 정미소

(출처 : 독립기념관)

참의부 4대 참의장을 지낸 김승학이 남만주로 떠나버렸고 신민부 군정위원회 측 김좌진은 1929년 아나키스트와 연대해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했으나 1930년 1월 코뮤니스트에 의해 피살되는 비극을 맞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의부를 이탈한 김동삼조차 1931년 일경에 피검되면서 과도기 단체로서 혁신의회는 해체되었다.

이후 한족총연합회 소속 지청천, 신숙 등이 주도하여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을 결성해 한국독립군을 조직했다.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은 1930년대 초 남북만주 항일독립운동, 바로 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 조선혁명군 이진탁, 양세봉 장군이 지휘한 영릉가성 전투(1932), 흥경성 전투(1933)와 한국독립군의 지청천, 김창환 장군이 지휘한 쌍성보 전투(1932), 대전자령 전투(1933)가 대표적이다.

▲ 1930년대 초 양세봉 장군의 조선혁명군과 지청천 장군의 한국독립군이 일본군을 무찌른 전적지 지도.

동북항일연군 보천보 전투는 1930년대 후반으로 북쪽 김일성과 관련된 사건이다.(출처 : 독립기념관)

이미 살펴보았듯이 1920년대 남만주 정치정세를 규정하는 내적 규정 요인은 국민대표회의(1923) 전후 상해 임시정부의 분열과 갈등이었다. 통의부-참의부 분열은 직간접적으로 임정의 분열에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이와 달리 1920년대 남만주 정치정세를 규정하는 또 다른 요인이자 외적 규정력으로 삼시협정(三矢協定)과 중국 동북군벌의 조선인 탄압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삼시협정(三矢協定)은 1925년 6월 11일 三矢宮松(朝鮮總督府 警務局長)과 于珍(奉天全省 警務局長)이 맺은 협정으로 본래 명칭은 '不逞鮮人の取締方法に關する朝鮮總督府奉天省間の 協定'이다. 삼시협정의 본질은 만주 일대 항일운동단체를 일소하는 것과 이주 한인들을 단속 내지 추방하는 것이다.

삼시협정은 8개 조항 본문과 12개 조항 시행세칙으로 구성돼 있는데 8개 조항 본문 내용은 만주 일대 항일독립운동가들 단속에 대한 내용이다. 다시 말해 일제의 지시에 따라 만주 일대 군벌들이 항일독립군들을 체포해 일본영사관에 넘긴다는 것이다.

시행세칙에선 이주 조선인에 대한 인구조사와 거주증명서 발급 그리고 거주지를 이동할 경우 이주증명서를 통해 이주 조선인들을 통제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냈다. 실제로 삼시협정이 체결된 직후 1925년 하반기 만주 봉성현(鳳城縣)에서 이주 한인에게 요구한 입적비는 奉票 35원이었다. 만주로 이주하는 한인들을 경제적으로 부담을 지워 이주를 제한하고 통제하려는 의도였다.

또 다른 사례로 요령성은 1926년 1월 한인단속규칙을 발표했는데 그 하부기관인 각 현에서도 항일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훈령을 발표했다. 한인은 누구나 예외 없이 중국복장을 해야 하며 20세 이상 한인은 중국 복장으로 찍은 사진을 현에 제출할 것을 지시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인 지주들은 현 내에 조선인 소작농 1만 명에게 일제히 소작료를 인상하였고 소작기간도 단축해버렸다. 장백현도 마찬가지였다. 만주로 이주하는 경우 조선 국내 일제 경찰서장의 신원증명서를 요구하거나 신원이 확실한 조선인조차 면장이나 구장의 보증을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이는 만주 일대 이주 한인들의 생계를 위협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항일독립운동단체의 인적・물적 기반을 와해시켜 일제의 불안 요인을 제거하려는 속셈이었다. 나아가 장차 도래할 만주 침략의 명분을 쌓기 위한 일본 제국주의 침략성을 드러낸 협정이었다.

삼시협정(1925) 이전에도 일제는 동북만주 일대에 이주 한인들과 항일독립군들을 탄압하는 정책을 취해 왔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중국인 마적을 매수해 훈춘사건(1920)을 조작했다. 훈춘 주재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게 하여 일본군의 만주 출병의 구실을 마련하고자 획책한 사건이었다.

훈춘사건을 계기로 1920년 자행된 경신대학살은 일제가 음흉한 의도로 기획한 참상이었다. 동북만주 일대 항일독립군의 인적・물적 기반이 된 이주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조선인 마을을 전소시킴으로써 해외 독립군 기지를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만주 침략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1920년대 중국 동북 군벌과 봉천성 군벌들은 일제의 요구에 순응하여 이주 조선인에 대한 탄압을 수시로 자행하였다.

중국 군경은 항일독립군에 대한 단속을 빌미로 한인 마을을 수시로 수색하였다. 나아가 항일독립군을 체포해 일본영사관으로 이첩했으며 항일근거지를 색출, 항일단체를 해체시켰다. 따라서 1920년대는 일제의 교활한 탄압책동과 만주 군벌들의 엄중한 단속이 횡행하던 시절의 연속이었다. 훈춘사건과 경신참변, 그리고 삼시협정을 거치면서 만주 전역은 항일독립군들에게 가혹한 정치정세로 다가왔다.

그러나 가혹하게 조성된 정치정세 속에서도 이주 한인들은 수전(水田) 농업에서 탁월한 기술을 보유한 탓에 중국 당국은 이주 한인들을 보호하려는 배반된 정책을 취하기도 하였다. 중국당국은 일제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처지에서 한 편으론 이주 한인들을 탄압했고 다른 한 편으론 수전 농업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주 한인들을 보호하는 이중정책을 구사하였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도 이주 한인들은 최선을 다해 황무지를 개간하는 등 자신들의 경제적 토대를 이국 땅 만주에서 착실히 구축해 나갔다.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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