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옥주(83, 동이면 적하리)씨 이야기

이번에 소개하는 사람은 동이면 적하리(연줄)에 사는 최옥주씨(83)입니다. 지난해 91세에 세상을 떠난 남편과의 사별의 아픔을 겪은 그녀는 유난히 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봄이 오면 마당 가득 꽃씨를 뿌리거나 늦가을에 캐놨던 알뿌리를 심곤 했습니다. 덕분에 봄이면 노란 수선화가 거실 앞 담장에 곱게 피어났고, 보랏빛 꽃잔디가 사립짝 입구를 찬란하게 수놓았습니다. 함박꽃이며 해당화도 다투어 피어나 그녀를 기쁘게 했지요. 여름이면 민들레, 채송화, 봉숭아가 꽃의 제전을 펼쳤고, 가을이면 백일홍과 화초가지와 이름 모를 꽃들이 풍성하게 피어났습니다.

최옥주 씨는 슬하에 5남매를 두었습니다. 장녀 정숙, 장남 장희, 차녀 명숙, 차남 석희, 삼녀 혜숙은 그녀를 기쁘게 했고, 그녀의 인생을 화사하게 수놓았던 또 다른 꽃들이었습니다.

이번 은빛자서전은 특별한 사연을 안고 탄생했습니다. 대전에서 자서전 작가로 활동하는 작은며느리 이기숙 씨가 시어머니의 구술을 받아 작성한 원고를 보내왔습니다. 앞으로도 은빛자서전에 후손과 독자의 많은 참여가 있기를 바랍니다.

▲ 최옥주씨.

 

■ 옥천 노총각에게 시집간 17세 낭자

1936년 옥천군 군북면과 대전시 판암동 사이에 있는 세천에서 태어났다(지금은 '대전시 동구 세천동'이지만 전에는 '충청남도 대덕군 동면 세천리'였다).

나는 어머니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조차 없다. 11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왜 어머니와의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 것인지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사진이라도 있으면 보고플 때 들여다보며 울기라도 하겠는데 그 흔한 사진 한 장이 없다. 왜놈들이 물러가고 막 해방이 됐을 때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고, 나는 12세에 서울 고모가 데려가셨다. 그 곳에서도 먹고 살기가 힘들어 고모가 소개해 주는 대로 남의 집 애를 봐주러 가게 됐다.

다행히도 변호사인 주인 남자는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넉넉하게 챙겨주었다. 나는 그 집에서 어린 애를 봐주며 공부도 했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도 갖게 됐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세상의 중심에서 살 수도 있고 평생 변방에서 빌어먹다 하찮게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아가 어디에서 살든 자존심을 잃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배운 사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삶의 자세를 배울 수 있었으니 살면서 누구를 만나는가는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터득했다.

15세 때 6.25전쟁이 터졌다. 주인 내외는 내게 본견으로 지은 치마, 저고리 등 새 옷을 한보따리 싸주며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갑자기 일어난 전쟁이라 서울은 아수라장이 됐다. 거리는 피난 가는 사람들로 꽉 찼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물어물어 고향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오는 동안 남의 집에 얹혀 잠을 청하게 되면 그 대가로 옷 한 벌을 꺼내주고 또 꺼내주다 보니 집에 도착했을 때는 그 곱던 옷이 두어 벌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먼 길을 걸어 무사히 집까지 올 수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아득하고 대견하기만 하다.

"너도 이제 시집갈 때가 됐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아버지를 만나 두 해를 함께 살았는데 느닷없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일찍 시집 간 언니를 통해 중매가 들어와 혼삿말이 오간 모양이었다. 얼굴도 본 적 없고 어디서 어떻게 사는 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한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옛날에는 사주만 받아들여도 당연히 혼인을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결국 생판 모르는 옥천군 청성면 합금리로 시집을 가게 됐다.

그 때 나이 17세였고 남편은 나보다 9세나 많은 26세 노총각이었다. 금강유원지에서 말재 산을 넘어 한참을 걸어가다 보면 금강줄기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배를 타고 건너면 바로 합금리다. 그리 깊은 골짜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시집가서야 알았고, 내가 그 벽촌에서 40년을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최씨가 아들 내외의 결혼사진을 펼쳐 보이고 있다. 최씨는 이번 은빛자서전 글을 쓴 둘째 며느리 이기숙씨에 대해 '정말 착하고 너무 예쁜 며느리'라며 한참 칭찬을 늘어놓았다.

 

■ 담배농사 짓다 독사 물려 죽을 고비도

일찍 혼자된 시어머니는 일보다는 술 드시는 걸 즐겼고 남편 또한 술을 좋아해 일 하다가도 술자리만 나면 일어설 줄을 몰랐다. 남의 땅이라도 있으면 어떡하든 빌려 일구려는 나를 시어머니는 못마땅해 하셨는데 그것이 자존심 상하는 짓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나는 담배농사를 지었다. 정부에서 수매를 해주어 돈벌이가 되었기에 그 힘든 담배농사를 수십 년간 했다. 담뱃잎을 따기까지 모종하고 그것을 포트에 옮겨 심었다가 다시 밭에 이식하고 최종적으로 밭고랑에 심었다. 한여름에 잎을 따야 하는데 녹색빛이 나면 늦추지 말고 따줘야 한다. 무성한 이파리 사이 고랑에 들어가 그 큰 잎을 따려면 바람이 통하지 않아 숨이 턱턱 막혔다. 온 얼굴이며 손이며 몸뚱이에 진액이 척척 달라붙어 따갑기도 했다. 냄새는 또 얼마나 고약했는지 모른다.

밤이면 담뱃잎을 일일이 엮어서 건조실에 매달아놓고 불을 때야 한다. 건조가 되면 한주먹씩 돌돌 말아 무릎에 놓고 꼭꼭 쟁여서 매짓는데 키나 색을 잘 맞추어 수납해야 제 가격을 받는다. 수납은 12월에 차를 불러 싣고 옥천까지 가서 했다.

고추나 깨, 팥 농사는 합금리 낮은 땅을 얻어서 지었지만 논농사는 강 건너 되빼미 골짜기 논을 얻거나 삭골 산 중턱 논을 얻어서 지었다. 대부분 마을 사람들이 강 건너에 땅을 가지고 있어 배를 타고 함께 일하러 가야했는데 사공을 불러 배를 부리게 했다. 사공에게는 수곡이라 하여 집집마다 1년에 보리쌀 한 말씩을 주었다. 장마가 져 물이 많을 때 배가 떠내려가지 못하게 큰 나무에 엮어 매놓는 일을 했다. 물이 많아 혼자 강을 건널 수 없을 때 마을 사람들을 한꺼번에 실어다주고 실어오는 일을 했다.

작은 배인 우배도 있어서 물이 많지 않을 때는 혼자서 그 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갔다. 하루 종일을 강 건너에 가서 일을 하니 점심을 싸가야 했다. 소쿠리에 보리밥을 담아 된장이나 풋고추 등을 반찬으로 가져가 겨우 요기를 했다.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하고 돌아오면 겨우 돌밖에 안된 큰 아들이 하루 종일 젖을 못 먹고 할머니가 주는 보리밥만 먹어 소화를 못시키니 노랗게 설사를 하고 몸이 배배 꼬이도록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그 모습을 봐야하는 마음이 얼마나 쓰라리고 아팠는지 모른다.

마을 앞 좋은 땅은 주인들이 농사를 짓고, 삭골 산 중턱에 있는 논을 우리가 얻어서 벼를 심었는데, 그것을 집으로 끌어오기까지 얼마나 고된지 지금도 생각하면 까마득하다.

산 중턱에서 지게에 볏단을 얹어 지고 내려와 배에 싣고 마을 앞으로 오다가 물이 얕아 배가 걸리면 다시 볏단을 내려놓고 배를 물 깊은 곳으로 끌고 가 또다시 볏단을 옮겨 싣고 집 앞까지 와서 지게로 마당까지 가져와 널었다. 그렇게 하다보면 날이 어두워져 달이 훤하게 떠있기 일쑤였다. 늘어놓은 볏단이 마르면 페달 밟는 탈곡기로 훑어 벼를 애써 다 말려놨는데 어느 해는 장대비가 내려 다 쓸어가기도 했다.

농사를 짓는 동안 잊지 못할 끔찍한 일도 겪었다. 독사에 물린 것이다. 담뱃잎을 수확하고 그 자리에 콩을 심으려고 풀을 매고 있던 어느 저녁 무렵 갑자기 손등이 따끔했다. 독사가 풀 사이를 지나다 물은 것이었다. 얼른 피를 빼고 옷을 찢어 손목을 묶은 뒤 집에 왔는데 금세 손등이 부어오르고 어깨까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손을 씻으려고 세숫대야에 담그려는데 들어가지 않아 그만둘 정도로 커진 손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휩싸였다. 얼른 택시를 불러 옥천 성모병원으로 가 치료를 받았다. 한동안 부기가 빠지지 않아 무척 고생했다.

▲ 최씨가 두 아들의 대학 졸업사진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 70세 때까지 전국 공사판 돌면서 일해

돼지새끼를 장에 내다 팔기 위해선 새벽 4시에 집을 나와 강을 건너 말재를 넘어 옥천까지 가야했다. 남편이 세 마리, 내가 세 마리 자루에 넣어 지게에 지고 30리 길을 걸어 옥천 장에 가면 거간이 흥정을 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사이 남편은 막걸리라도 마시러 가지만 나는 혼자 남아 국수 한가락도 못 먹고 마냥 기다려야 했다. 올 때는 돼지 먹이로 보리 딩개를 사서 한가마니씩 지고 또다시 30리길을 걸어야 했다. 새벽에 호롱불을 밝히고 보리밥 한 술 뜨고 나갔다가 밤 중 호롱불 켜졌을 때 집에 들어올 만큼 고된 하루를 보낸 것이다.

남편 담배 값이라도 벌어보자고 담배 소매를 하기도 했다. 구읍까지 가 어렵게 담배를 떼어 사랑방에 놓고 일하러 다녀오면 속 좋은 남편은 그 비싼 500원짜리 파랑새 담배를 오는 사람마다 하나씩 공짜로 주었다. 새마을 담배는 그보다 쌌는데 비싼 걸 나눠주고 있으니 내 속이 얼마나 탔겠는가.

그 험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밤을 낮 삼아 죽는 줄 모르고 일을 한 까닭은 자식들을 키우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숯다리미로 말끔하게 다린 교복을 입고 학교 가는 애들을 보면 그렇게 뿌듯하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5남매 모두가 공부를 잘해 항상 우등상을 타왔고 모두 6년 개근을 했다. 청마국민학교가 강 건너에 있어 비가 많이 와 배가 뜨지 못하면 학교를 못 가는데 그 날은 결석으로 치지 않으니 애들이 방학을 맞은 듯 좋아했다. 이제는 청마국민학교도 폐교가 돼 옻 체험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시어머니는 결혼 첫날부터 33년을 함께 살았다. 86세에 돌아가시기 전 3∼4년은 대소변까지 받아내야 했다. 40년을 살았던 합금리를 떠나 동이면 학사골로 이사 오면서 8촌 당숙과 식당일을 시작했다. 8년 동안 지속한 식당 일 덕에 땅을 사 오늘의 적하리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러다 아는 이를 통해 전국 고속도로 공사 현장을 다니며 벽면을 정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거친 콘크리트 벽면을 시멘트로 발라 반질반질하게 정리하는, 여자가 하기에는 조금 험한 일이었다. 서울 한강 다리 일을 할 때는 유람선을 타고 들어가 일했다. 구미 낙동강 다리 공사 때는 높은 장비를 타고 올라가 강 한가운데서 일을 하기도 했다. 저녁때면 숙소로 와서 잠을 자는데 온 몸에 시멘트 가루가 달라붙어 얼굴이며 피부가 거칠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일을 3년 했는데 그 때 나이가 68세였다.

그 후에도 김치공장, 순대공장에 나가 3년 더 일을 했다. 나이 들어 일을 했어도 젊은 사람보다 더 바지런하게 했다. 손도 빨라 십장이며 사장들이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어디서 일을 하든지 내 몫을 충분히 다 해냈고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자존심을 잃지 않고 일을 한 그 때의 당당함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허리 협착증이 오고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했을 때 일을 계속 하면 폐를 끼치겠다는 판단을 하고 70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앉아 남들처럼 즐기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 최옥주씨가 이야기 중 잠시 집 거실에 앉아 쉬고 있다. 그 뒤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 그라운드 골프, 트로트 배우며 즐겨요

집에 있자니 이것저것 배울 기회가 생겼다. 그동안 정신없이 일만 하느라 내가 좋아하는 노래 배울 새도 없었고, 운동은 엄두도 못 냈다. 마침 동이면에 그라운드 골프장이 생겨 그 곳을 다니게 됐다. 76세에 골프채도 처음 잡아보고 운동 규칙이며 명칭도 처음 듣고 배웠다. 세상을 사는 또 다른 재미를 느끼게 되고 실력이 느니 동이면 대표로 전국 대회에도 나갔다. 덕분에 진천 등 타 지역까지 가보았다. 좋은 점수를 내서 상을 받기도 하였다.

동이면 다목적회관에서 진행하는 노래교실에 나가 노래도 배웠다. 어쩌다 마을에서 관광을 가면 목청이 좋다고 자꾸 노래를 시키곤 했는데 아는 곡이 많지 않아 아쉬웠다. 그런데 노래교실에서는 최신 트로트도 가르쳐주니 즐겁기 그지없었다. 요즘은 금요일마다 마을회관으로 강사가 와서 체조도 가르쳐주고 색칠공부며 꽃 접기, 고무찰흙으로 만들기 놀이도 가르쳐준다. 치매 예방 차원에서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나이 들어서 할 일 없이 앉아있는 것만큼 안돼 보이는 게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뭐든 배우고 익히는 것이 참 좋다. 그 좋은 세상을 83세인 내 나이에도 즐기고 있으니 이 세상이 고마울 따름이다.

평생 고생만 하던 남편이 지난해에 91세로 세상을 떠나자 너무나 불쌍하고 허망하여 한동안 삶의 의미를 못 느끼고 있었는데 그 또한 겪어내야 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내 나이도 적지 않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나 사는 날까지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더 열심히 운동하고 곱게 늙는 하루하루를 보내 참 잘 살다 갔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게 마지막 소원이다.

▲마당에서 손빨래 중인 최씨.
▲ 최씨의 집 마당은 예쁜 화단과 파, 배추 등을 심은 텃밭으로 가득하다.
▲ 최씨의 집 마당은 예쁜 화단과 파, 배추 등을 심은 텃밭으로 가득하다. 예쁜 화단 뒤로 배추밭이 보인다.
▲ 최씨가 배추밭에서 포즈를 취했다.

 

 * 글 이기숙 작은며느리, 사진 박누리 옥천신문 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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