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 - 인생은 아름다워(26)] 어디선가 꽃씨 날아와 강가에 핀 노란 꽃처럼

은빛자서전 스물 여섯 번째 주인공, 여경자(80, 동이면 조령2리)씨 이야기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l승인2020.04.02l수정2020.04.0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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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난 사람은 동이면 조령2리(새재마을)에 사는 여경자 씨(80)입니다. 학교 문턱도 넘어보지 못한 열여덟 나이에 신랑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하늘 아래 첫 동네'로 시집왔습니다. 오지 중의 오지인 새재마을에서 남편과 함께 땀흘려 일하며 7남매를 낳았습니다. 땅 한 뙈기 없다 보니 셋째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쌀밥 한 번 먹이지 못하고 보리밥과 고구마만 먹으며 살았습니다. 황혼의 나이에 입학한 청춘학교에서 한글을 배워 삐뚤빼뚤 몇 편의 시를 쓰면서 인생 최고의 행복을 맛봤습니다. 이번에 장야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손녀 성영선 양(13)이 할머니에게 감사편지를 보내왔습니다.

▲ 팔십 평생 까막눈으로 살던 여경자씨에게 광명이 찾아왔다. 지난해 마을에서 진행된 청춘학교를 통해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여경자씨가 지난해 청춘학교 활동 책자를 읽고 있던 중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 꿈속에서라도 어머니 얼굴을 보았으면

나는 1940년 영동군 학산면 지내리에서 태어났다.

친정은 가난한 농사꾼 집안이었다. 나는 세 자매의 막내였는데, 불행이라는 불청객이 우리 가족을 연이어 찾아왔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두 언니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내가 여섯 살이 되던 해에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나에게는 한(恨)이 있다.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얼굴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그게 지금까지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어머니는 '곽씨'라는 성만 가지고 있었을 뿐 유일한 혈육에게 당신의 이름조차 남겨주지 못하셨다. 꿈속에서라도 어머니 얼굴을 뵙기를 기원했지만 그 소원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다.

아버지(여하현)는 새 아내를 맞아 슬하에 4남매를 더 두셨다. 막내였던 내가 졸지에 5남매의 맏이가 되었다. 친엄마를 잃은 나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물에 콩 나듯이 메마를 수밖에 없었다.

6.25에 대한 기억도 별다른 것이 없다. 살던 동네가 오지 중의 오지인데다 너무 가난했기에 피난을 갈 필요가 없었다. 우리 마을을 지나가던 인민군들이 신발도 벗지 않고 우리 집 방안에 들어와 하룻밤 묵고 떠난 것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다음은 늦은 나이에 배운 한글로 직접 써본 시다.

강가에 노랑꽃
예쁘게도 피었구나

어디서 날아왔니
메마른 자갈밭에
아름답게도 피었구나

강가에 노랑꽃
젊은 시절 나와 같구나

▲ 여경자씨가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가난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행복했던 시절

나는 열여덟 살이 되던 1957년 가을에 옥천군 동이면 새재마을(조령2리)로 시집왔다. 군대에 가 있던 신랑의 얼굴 사진으로 맞선을 대신했고, 혼례식도 신랑의 휴가 기간 중에 치렀다. 양가의 고모가 중매를 섰는데, 우리 고모가 설명한 '중매의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신랑이 아주 잘 생겼어."

신랑은 잘 생겼는지 몰라도 시댁 역시 지독하게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에서 시할머니, 시아버지, 시누이가 살고 있었다.

새재마을은 친정보다 더 오지 중의 오지였다. 마을에 들어가려면 높은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새소리밖에 나지 않는다 해서 '새재'라고 불렀다. 나는 영동에서 심천역까지 열차로 이동한 다음 가마를 타고 우산리를 거쳐 금강 여울을 건넜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넘어 마을에 도착했는데, 마을 뒤쪽에 금강과 보청천이 버티고 있었다. 산촌(山村)이자 강촌(江村)인 새재마을은 말 그대로 하늘 아래 첫 동네였다.

혼례식을 치르고 귀대했던 남편(성연호)이 몇 개월 뒤에 제대했다. 우리 두 사람은 부모가 물려준 땅 한 평 없는, 말 그대로 맨바닥에서 살림을 시작해야만 했다. 더욱이 시댁에는 약간의 빚까지 있었다.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건강한 몸뚱이가 우리의 유일한 삶의 밑천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정말 열심히 일했다. 남의 논밭에 가서 일해주고 품삯을 받았고, 남는 시간에는 비탈진 땅을 일구어 깨와 콩 등을 심었다. 추수를 해놓으면 심천에서 장사꾼들이 곡물을 사러 왔다. 남의 소를 키워주고 대가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한 푼 한 푼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빚도 갚았고 한 뙈기 한 뙈기 땅도 사기 시작했다.

열심히 일해서 행복했던 그 시절을 나는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한 바 있다.(원문 그대로 전재했다)

지개우에는 훌처이지고
반닥었는 고무신

머리우에는 밥을 이고
머리에는 술도 이고

무재밭에 가서
일을 했다
나는 행복했다

▲ 여경자씨가 거실에 걸린 가족사진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 날마다 안부전화 걸어오는 고마운 7남매

우리 부부는 모두 7남매를 낳았다. 장남 재영, 장녀 금년, 2남 은영, 2녀 미숙, 3남 현영, 4남 대영, 3녀 미애가 차례로 태어났다. 지금도 자식들에게 가장 미안한 것은 한창 커야 할 때 먹을 것 제대로 먹이지 못한 것이다. 셋째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끼니를 보리밥과 고구마로 버텼기 때문에 쌀밥은 아예 구경할 수 없었다. 얼마나 질렸는지 요즘에도 자식들이 고구마는 잘 먹으려 하지를 않는다.

보리는 쌀처럼 바로 밥을 지어 먹을 수 없다. 우선 물에 불려 박박 문지른 다음 솥에 넣고 쪄야 했다. 더욱이 그때에는 동네에 우물이 없어서 강에서 식수를 길어다 먹어야 했다. 겨울에 강물이 얼어붙으면 얼음에 구멍을 뚫었는데, 그것이 마을 사람들에겐 우물인 셈이었다. 나는 강물을 담은 동이를 머리에 이고 미끄러운 빙판길을 걸어서 산기슭 가장 위쪽의 우리 집까지 날라야 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새재마을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농사만 지으며 먹고 살던 마을에 새로운 소득원이 생긴 것이다. 금강 상류에 큰 다리가 건설되고 금강유원지가 들어섰는데, 동네 아낙네들이 너나없이 옥수수를 쪄서 이 유원지로 행상을 나가기 시작했다. 봄에는 취와 고사리 등 산나물을 채취해 머리에 이고 가서 팔았다. 가지고 나가면 1시간 안에 모두 팔려나갔다. 이것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칠 수 있었다.

자식들은 좋은 학교를 보내주지 못했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다. 7남매가 모두 마을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우산초등학교와 동이중학교를 다녔다. 나중에 태어난 동생들은 그나마 고등학교까지 다녔지만 먼저 태어난 형과 누나들은 더 이상 가르치지 못했다. 그래도 7남매가 다투지 않고 서로 의좋게 지내니 고마울 따름이다. 자식들은 매일 아침 안부 전화를 하고 내 생일 때는 온 식구가 여행을 가거나 작은 잔치를 연다.

▲ 청춘학교 책자 중 여경자씨가 쓴 글과 사진이 실린 페이지.

 

■ 청춘학교에서 깨우친 한글로 써본 시

팔십 평생 까막눈으로 살았던 나에게 광명이 찾아왔다. 대전의 한 여고에서 교장을 하다 퇴직하고 귀촌한 오광식 이장님이 지난해에 청춘학교를 열어주셨다. 우리는 이곳에서 한글교실과 한지공예 등 다양한 공부와 체험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한글교실에서 한글을 깨우쳤다. ㄱ, ㄴ, ㄷ 등 자음과 ㅏ, ㅓ, ㅗ 등 모음을 가지고 평소 쓰는 말과 나의 생각을 문자로 써 보는 과정이 참으로 신기했다. 한글로 내 이름을 쓰는 순간 짜릿한 감동이 밀려왔다. 다만 받침, 그 중에서도 쌍받침을 쓰는 것이 여전히 헷갈린다. 예를 들면 '젊다'라고 써야 할 때 쌍받침 ㄹ과 ㅁ의 순서가 자꾸만 바뀌곤 한다.

청춘학교에서는 반장과 부반장도 뽑았다. 선생님들이 수업을 시작하며 출석부에 적혀 있는 우리 학생들의 이름도 불러주셨다.

"여경자."

나는 학생의 마음으로 대답했다.

"네."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이루지 못한 학생의 꿈을 7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이루었다. 이 나이에 누가 내 이름을 불러주겠는가. 내심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한지공예 시간에는 팔각대상도 만들었다.

지난해 가을에 이장님 자택 잔디마당에서 청춘학교 교육과정 발표회가 열렸다. 나는 연분홍 저고리와 진분홍 치마를 꺼내 입었다. 자식들이 꽃다발을 들고서 축하해주러 왔다.

술과 담배를 너무 좋아했던 남편은 환갑을 넘기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나와 함께 살고 있는 3남 현영 부부를 비롯해 7남매가 모두 12명의 손주를 낳아주어 감사하고 행복하다. 다음은 인생을 돌아보며 써본 시다.

오늘 하루가 지나는구나
비가 오는 구나
가는 해 잡지 못하고
한 많은 우리 인생이
이렇게 가고 마는 구나
젊은 시절 강에서 도실비 잡고
산에 가서 나물 뜯던 그 기운
어디 가고 힘없는 사람이 됐을까
나뭇가지에 참새가 울고 있었다
처량하게

▲ 여경자씨가 직접 쓴 시가 담긴 액자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천만 번이라도 말할 수 있는 "사랑해요"

■ 손녀가 보내온 감사편지

오늘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반겨주시는 할머니. 여름날 더우면 덥다고 시원한 음료를 꺼내 주시고 추운 겨울날 추우면 춥다고 꼬~옥 안아주시는 할머니. 우리를 위하여 언제나 묵묵히 뒷바라지 해주시는 할머니의 사랑받는 존재로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요.

저는 할머니 방에서 뒹굴뒹굴 할 때가 제일 행복해요. 처음에는 매일 한 시간씩 할머니 방에서 안마도 해드리고 말동무도 해드리라는 아빠의 말씀에 반강제적으로 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야 게임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당연히 지민이와 함께 제가 할머니에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제가 처음 일어나 걷고 말하고 어린이집 다닐 땐 저보다 힘도 세셨던 할머니. 그런 할머니가 언젠가부터 허리도 굽으시고 아프다고 하시기 시작하셨죠. 그런 말씀을 하실 때 할머니 모습은 아주 작고 작아 보여요. 할머니도 늙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이 아파요.

할머니에게 '사랑합니다'라고 천만 번이라도 말할 수 있지만 오늘은 그냥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우리 가족 옆에서 지금처럼 행복하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 손녀 성영선 올림

▲ 여경자씨 방에는 여씨가 쓴 시가 담긴 액자와 함께 손녀 성영선양이 쓴 시 액자가 함께 걸려있다.
▲ 글을 쓰고 있는 여경자씨.
▲ 책을 살펴보고 있는 여경자씨.
▲ 여경자씨가 쓴 시

 

글 정지환 객원기자·사진 박누리 기자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객원기자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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