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자서전-인생은 아름다워(33)] 남의 맘 아프게 할일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

서른 세번째 주인공 신용란(89, 동이면 적하리)씨 정지환 옥천신문l승인2020.06.12l수정2020.06.12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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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세번째 주인공 신용란(89, 동이면 적하리)씨

이번에 만난 사람은 동이면 적하리에 사는 신용란 씨(89)입니다. 신 씨의 장남인 김성장 충북문화재단 이사는 동이초, 동이중 재학 때 장래 희망란에 '화가'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희망과 달리 금오공고 기계과에 진학했고, 거기서 문학 하는 선배들을 만나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직업군인 생활을 마치고 공장에 취직해 용접공으로 살다가 스물일곱 살에 충북대에 합격해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시, 소설, 평론 등 마음 가는 대로 그저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를 좋아했습니다. 언제인가부터는 붓글씨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는데, 고(故) 신영복 선생의 서체와 사상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림이든 글이든 글씨든 모두 '쓰는' 행위이니 그는 결국 원래 희망대로 붓과 더불어 살고 있습니다. 그런 김 이사의 삶의 뿌리는 어머니 신용란 씨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신용란 씨가 늦은 나이에 배워 그린 산수화 실력은 동이면 몇몇 마을회관에 작품이 전시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눈물은 한때 우리가 바다에 살았다는 흔적', 어머니의 성과 어린 시절 자기 이름을 합성한 '신성주'로 SNS에서 활동하는 김성장 이사의 두 번째 시집 제목입니다. 김 이사에게 어머니 신용란 씨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삶의 원동력인 '눈물'이자 '바다'입니다

 

■ 담배 대농이자 비단장수인 아버지 덕분에

나는 1931년 충청북도 제천군 한수면 명오리에서 태어났다(행정구역 조정으로 명오리를 비롯한 제천군 한수면 6개 리가 1987년 충주군 동량면으로 편입되었다).

아버지(신원소)와 어머니(윤귀홍)는 슬하에 7남매를 두었는데, 나는 셋째였다. 위로 언니 2명(순례, 용희), 밑으로 남동생 4명(용관, 용덕, 용근, 용옥)이 있었다. 큰언니 순례는 일제강점기에 우리 식구가 중국 길림성에 살고 있을 때 평양으로 시집갔다. 해방을 맞아 우리 가족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소식이 끊겼다. 정부가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추진할 때마다 접촉 신청을 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남한에는 아직도 6남매가 생존해 있다.

부모님은 일꾼을 두 명이나 두고 담배 농사를 크게 짓던 대농(大農)이었다. 지붕이 높은 담배 건조실이 두 채나 있었다. 일꾼들이 밭에서 가져온 담배 잎들을 굴비처럼 새끼줄로 엮은 다음 건조실에 매달았다. 담배 농사 규모를 말할 때 '단'이라는 말을 썼는데, 우리 집은 6단을 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단이 대략 1천300포기라고 하니 상당히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어린 내 눈에 비친 아버지는 선비이자 한량이었다. 담배를 비롯한 농사는 전부 일꾼들에게 맡기고 사랑방에서 한문 서적을 읽었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겼던 아버지는 장기간 출타를 하시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중국을 왕래하며 비단 등 각종 옷감을 거래했던 것 같다. 덕분에 가끔 비단 옷을 얻어 입을 수 있었다.

 

■ 충북 제천에서 중국 길림성으로 집단이주

어느 날 중국에 갔던 아버지가 젊은 도시 여자를 데리고 왔다. 사람들은 그녀를 '하얼빈 여자'라고 불렀다. 하얼빈 여자가 신고 온 구두의 뒷굽은 무척 높았다. 댓돌에 놓여 있던 '뾰족 구두'가 너무 신기해 둘째 언니와 함께 몰래 뒤뜰로 들고 가서 신어 보았다. 하지만 몇 발자국도 걷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발목이 접질려 며칠 동안 고생했다.

딸만 내리 셋을 낳은 어머니를 대신해 아들을 얻어 가문을 잇겠다는 것이 아버지가 하얼빈 여자를 데려온 명분이었다. 하지만 하얼빈 여자는 딸을 낳았다. 그나마 그 아이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설 자리를 잃은 하얼빈 여자는 어느 날 조용히 사라졌다.

이후 어머니는 보란 듯이 아들 넷을 내리 낳았다.

아마도 1930년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중국 길림성으로 집단 이주했다. 중국을 오가며 장사를 하던 아버지가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았다.

할아버지가 가산을 정리한 다음 며느리와 그때까지 태어난 5남매 손주를 거느리고 국경을 넘어 길림성으로 갔다. 고향에 비해 추울 때는 더 추웠고, 더울 때는 더 더웠다. 나는 우리 가족이 정착한 그 지역의 이름을 '소성'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중국에 와서도 일꾼을 두고 담배 농사를 지었다. 우리 가족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친가와 외가의 5촌 당숙과 8촌 오빠들도 하나둘 고향을 떠나 중국으로 왔다. 적응력이 빠른 한 젊은 5촌 당숙은 우리의 면서기에 해당하는 총공서의 직원으로 취직했고, 8촌 오빠들은 만주국 수도였던 신경(新京)으로 가서 군인이 되기도 했다.

여기서 나는 학생과 교사의 대다수가 조선인으로 구성된 소학교에 다녔다. 전교생이 약 1200명이나 되는 제법 큰 학교였는데, 우리 집은 학교 정문 바로 앞에 있었다. 만주국과 관동군이 길림성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조선인 교사와 학생은 서로를 일본 이름으로 불러야 했다. 예컨대 교장 선생님은 '고토', 국어 선생님은 '기무라', 체육 선생님은 '에도'라고 불렸다. 학교는 물론이고 마을에도 일본 경찰이 수시로 드나들며 조선인을 감시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45년 급작스럽게 해방을 맞았다. 항상 반듯하게 제복을 차려입고 긴 칼을 차고 다녔던, 그래서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가장 두려워했던 경찰서장의 흐트러진 모습에서 해방을 실감할 수 있었다. 경찰서장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목재소 앞마당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었는데, 그 옆 땅바닥에 아무렇게 벗어놓은 제복과 칼이 있었다. 당시 나는 소학교 4학년이었다.

▲ 신용란씨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가족사진

 

■ 남편의 이발관과 요리집이 파산한 이유

우리 가족의 귀향은 환희와는 거리가 멀었다. 중국에서 재산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도망치듯 고향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거의 폐허로 변한 큰 기와집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초여름이 되면 화사하게 연꽃을 피워내던 예쁜 연못도,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던 담배 건조실도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이런 말을 하면 욕을 얻어먹을지 몰라도,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만든 해방은 나에게 '웬수'였다. 그나마 중국에선 소학교에 다닌 덕분에 모국어인 조선어는 물론이고 중국어와 일본어도 조금씩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배움의 길을 중단하게 된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학업도 중단한 채 살고 있던 상황에서 6.25전쟁이 터졌다. 가장 먼저 완전 무장한 인민군이 들어왔고, 그들이 물러난 얼마 뒤에는 국군과 미군이 들어왔다. 이 와중에 젊은 사람들이 많은 고통을 겪었다. 인민군은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젊은이들을 차출해갔고, 국군과 미군은 '빨갱이 색출'을 내세워 마을에 불을 질렀다.

나도 사돈댁 처녀와 함께 의용군이 있다는 괴산까지 인민군에게 끌려가다가 새벽에 몰래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자라 등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봐도 놀란다고, 이후부터 할아버지는 마루 밑에 굴을 파 놓고 군인들이 나타났다는 소리만 들리면 스무 살 처녀인 나를 그곳에 숨기기 바빴다.

그렇게 꽃다운 나이를 전쟁과 빈곤의 포로로 허송하던 나는 25세가 되던 해에 고향을 떠났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출향(出鄕)이 아니었다. 집에서 가사를 돕던 나는 고종사촌 올케의 중매로 청주로 시집을 갔다.

신랑은 청주에서 이발사로 일하던 김일영이라는 남자였는데, 나보다 여덟 살이 많았다. 고향 전주에서 어린 나이에 원하지 않은 결혼을 했던 그는 일본에 돈 벌려고 갔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해 청주에 와서 살고 있었다.

나는 우암동에서 셋방살이로 신혼살림을 시작한 후에야 이 모든 사실을 알았다.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에 독립하지 못하고 남편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여자의 운명이 서러웠다. 하지만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동안 남편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싹트는 신기한 변화도 경험했다. 남편은 아버지처럼 키는 크지 않았지만 제법 미남이었다.

한 가정의 주부로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끼고 또 아끼는 절약이었다. 장녀 성희, 차녀 성옥, 장남 성장이 차례로 태어났다. 풍족하진 못했지만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종업원으로 일하던 남편도 독립해 우암동에서 '현대이발관'을 운영했고, 장사가 잘 되자 종업원을 고용해 옆 동네에 '고려이발관'을 개점했다. 나중에는 청주상고 앞에 중국요리집도 냈는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파산하고 말았다.

어느 정도 먹고 살만 해지자 남편은 한량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이발관과 식당의 운영을 종업원들에게 전부 맡겨놓고 당구장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 나중에는 당시로선 구경하기 힘들었을 골프장에까지 진출했다. 그 사이에 식당 운영을 책임지고 있던 종업원이 밀가루와 설탕을 외상으로 구매하는 등의 방식으로 돈을 빼돌리기 시작했다. 결국 남편은 무책임 경영의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는데, 한 채 남은 집을 팔아 부채를 청산하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 아무리 어려워도 양심적으로 살아야 한다

1966년 우리 가족은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 용죽마을로 이사를 왔다. 청주에서 거리로 나앉은 채 갈 곳을 몰라 하던 우리 가족에게 "옥천으로 가서 살라"고 추천한 사람은 이 마을 출신인 이해택 씨였다.

빈털터리였던 남편은 마을회관에 의자를 놓고 주민들의 머리를 깎아주며 새 인생을 시작했다. 이발 요금은 가을에 곡식으로 받았는데, 쌀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보리나 잡곡이었다. 나중에는 현재 살고 있는, 마을 입구에 있던 집에 가게를 차렸다. 과자, 사탕, 라면, 음료수와 술도가에서 떼어온 막걸리를 팔았다. 그렇게 푼돈을 모아 아이들을 가르쳤다.

옥천에 이사 와서 한겨울에 막내아들 성용을 낳았을 때의 일이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동네 주민 중 한 명이 산모가 불쌍하다며 동네를 다니며 추렴한 쌀 두 말을 가져다주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황규상 씨가 그 주인공인데, 아직도 그 분의 부인을 만날 때마다 "정말 고마웠다"는 인사를 드리곤 한다.

장남 성장과 막내 성용의 성격은 대조적이었다. 성장이 과묵하고 내성적이라면 성용은 활달하고 외향적이었다. 특히 성장은 밖에서 화나는 일이나 억울한 일이 있어도 꾹 참고 집으로 돌아와 혼자서 눈물을 흘리며 삭이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 흐릿한 등잔불과 호롱불 아래서도 열심히 책장을 넘겼다.

동이초와 동이중을 졸업한 성장은 전국의 '머리가 좋지만 가난한' 학생들이 간다는 대구의 금오공고에 2등으로 합격했다. 하지만 성장은 나중에 다시 공부해 충북대에 들어갔고, 졸업한 다음 국어 선생님이 되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마을 주민들이 우리 집으로 몰려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 내 인생 최고의 보람과 행복을 느꼈다.

"아들이 학교 선생님이 됐으니 김일영 씨 정말 출세했네. 술 한 잔 사시오."

하지만 가난은 쉽사리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자식들 결혼할 때마다 이불 한 채 해주지 못해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

나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5남매를 얻었다. 장녀 성희(1녀), 차녀 성옥(2녀), 장남 성장(2남), 삼녀 성란(1남), 차남 성용(1남)이 7명의 손주를 낳아주었다. 5남매에게 이 세 가지만은 꼭 지키라고 가르쳤다.

"첫째, 양심적으로 살아라. 아무리 어려워도 다른 사람을 속이지 마라. 둘째, 인사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라. 어른을 만나면 하루에 열 번이라도 고개를 숙여라. 셋째,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말거라.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나 눈물 흘리게 하는 일은 아예 하지 마라."

▲ 신용란씨

 

장남이 '엄마'에게 보낸 감사편지

아흔 살을 앞둔 당신의 삶, 이제 곧 죽음이 닥쳐오리라는 걸 예감합니다. 평생 입원 한 번 한 적 없이 살던 당신이 얼마 전 장 스탠스 시술을 하게 되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에 삽입되어 있던 가스배출 호스를 스스로 뽑으시고 더 이상의 검사와 치료를 그만두겠다는 당신의 단호한 삶의 자세를 보면서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좋은 시절을 만났더라면 당신의 삶이 좀 더 풍요로웠을 거라 생각합니다. 당신은 아주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가끔씩 풍요롭고 즐거운 시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대체로 가난 속에서 근근이 사셨습니다. 배움에 대한 갈망, 예술에 대한 이해, 넉넉한 삶에 대한 희망을 모두 채우지 못한 채 당신께서 이승의 삶을 접는다 생각하니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주 사려가 깊고 그 누구에게도 실수를 하지 않으려 애썼으며 그 누구도 욕하지 않고 사신 분입니다. 당신은 내가 이 세상에서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 견결하고 따스한 심성을 가지셨던 분입니다. 게다가 몸도 아주 건강하시어 자식들에게 아무런 불편을 주지 않은 채 지금도 홀로 자신의 삶을 꾸려 가십니다.

나는 당신의 건강이 당신의 심성에서 왔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 그것이 사사로운 일과 행동에 영향을 주고 몸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라 여겨집니다. 어찌 감동적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고맙다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남은 삶이 편안하고 행복하길 빌어 봅니다.

장남 성장 올림

 

[편집자주] 정지환 기자는 1993년부터 월간 말, 오마이뉴스 등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안티조선 전문기자’라는 애칭을 얻는 등 우리 사회에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논쟁적 기사를 남겼다. 2004년에는 입법전문지 '여의도통신' 창간을 주도하기도 했다. 2010년 사회적 좌절을 맛보고 ‘감사’를 만나면서 기업, 학교, 군대, 지자체 등에서 1000회 넘게 '감사' 강연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1인기업 감사경영연구소 소장과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을 바꾸는 감사 레시피’, ‘30초 감사’, ‘감사 365’ 등 10여 권의 저서가 있다.

* 이 글은 옥천신문(http://www.okinews.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정지환 옥천신문  lowsaeja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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