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대학 친구도 IMF 금융 위기를 맞으며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납니다. 친구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을 물려받아 플라스틱 원재료를 사출 업체에 공급했고, 사출 업체는 가공품을 기업에 납품한 후 어음으로 결제 받는 게 관행이었습니다. 당시에는 3개월짜리 어음이면 양호한 편이었지요. 이 어음을 당장 현금화할 수 없으니까 어음 할인을 받아서 사용하거나, 공장과는 외상 거래를 합니다.

공장은 외상이 많은 부실한 업체와 거래를 끊고 싶어도 그동안 쌓인 외상값을 받기 위해 또다시 외상을 주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외상은 늘어만 갔지요. 그러다 금융위기를 맞자 어음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외상값 받으러 전국을 돌아다녔지만 똑같은 피해자들이라 비빌 언덕도 없었습니다.

이 친구가 플라스틱 재료를 공급하였기에 녹즙기나 믹서 업체들과 연이 닿았고, 녹즙기를 수입해간 말레이시아 바이어에게 다른 제품을 소개하려고 하니 도와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렇게 알게 된 말레이시아 화교 친구가 Mr Danny입니다. 수입해간 녹즙기에 이상이 있거나 A/S를 받으려면 제게 연락을 했지요.

말레이시아는 1511년 포르투갈의 침략부터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일본을 거쳐 또다시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957년에야 독립을 이룩한 입헌 군주제이며 연방제인 나라입니다.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은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깨끗하고 조용하며 교육환경이 좋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제가구 사업을 운영하던 대만인 친구가 싱가포르와 다리로 연결된 도시 조호바루에 있었고 Danny가 쿠알라룸푸르에 살고 있어서 말레이시아는 여러 번 갔었지요.

동남아시아에선 원주민과 화교 사이에 갈등이 많습니다. 특히 인도네시아에선 경제력을 장악한 화교를 향한 테러가 종종 크게 보도되기도 합니다.

말레이시아의 주요 인종은 말레이인 67%, 중국계 25%, 인도계 7% 정도로 알려졌지만 화교들의 우월한 경제력 때문인지 대도시에선 거의 반반 정도로 생각되었습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주석 가공품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지요. 쿠알라룸푸르라는 도시가 처음 중국인들에 의해 주석광산이 개발되면서 제1의 도시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중국계는 말레이인을 게으르다고 생각하고, 말레이인은 중국계를 돼먹지 못하다는 편견이 일상화되었으며, 종교도 불교와 이슬람으로 다르다 보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두 친구 모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불간섭 그리고 상호 인정! 말은 그래도 편견은 존재하는 듯했습니다.

Danny는 유기농 식품 사업을 하였습니다. 부유층에 유기농 채소와 과일을 호주에서 수입해 제공하고 자기 회사 브랜드로 관련 식료품과 퇴비 등을 판매하더군요.

다시마 우엉 등에 관심을 갖고 한국을 몇 번 방문했고, 특정 회사의 비스킷을 원해 제가 가져다준 적도 있었습니다.

의사소통과 시간 제약을 받지 않는 나를 만나 매우 편했던 모양입니다. 항상 한국의 유일한 친구라며 치켜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니까요. 영상 10도에서도 심정지로 얼어 죽는다는 대부분의 더운 나라 친구들은 영하의 한국 겨울을 두려워하는데 이 친구는 유일하게 한국의 겨울 날씨를 무척 좋아하였습니다.

인천국제공항이 생기기 전이라 김포공항은 픽업도 용이하였고, 술집을 찾는 스타일도 아니어서 저도 편했습니다. 제가 쿠알라룸푸르에 가면 역시 공항에 와주고, 바쁜 일이 있을 때는 버스를 타고 내리라는 곳에 있으면 되었습니다.

▲ 전설의 스타 장국영 사진:Baidu 백과

 

전직이 가수였다는 곱상한 외모의 Danny는 홍콩 배우이자 가수인 장국영을 연상시켰습니다. 방송에 출연하는 유명 가수는 아니었고 음식점이나 바에서 노래하던 가수였답니다.

▲ 1997년 콘서트에서 공연 중인 장국영 사진 : 위키백과

 

부인은 여리하고 작은 키의 Danny와는 반대로 크고 남성적인 외모였습니다. 키도 Danny보다 크고요. 하지만 어투는 조용하고 낮으며 행동은 무척 조신한 반면에 Danny는 빠르고 시끄럽고 급한 성격입니다. 처음 만났을 무렵 아들은 영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나이 차이가 나는 딸은 회사 카탈로그에 사진을 실을 정도로 귀여운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우리가 만나던 시기에는 디지털카메라가 출시되기 전이고, 당연히 스마트폰도 없던 시대라 Danny와 찍은 사진이 없어 증명할 수가 없으니 상상에 맡깁니다.

이해관계나 상거래 없이 그저 친구처럼 안부를 전하고 도움을 청하면 기꺼이 마주하던 Danny로부터 도움을 크게 받는 일이 생겼습니다.

편집 : 김동호 편집위원

김동호 편집위원  donghokim7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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