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군 이원면 곽래의(1940~)

옥천군 이원면 곽래의(1940~)

"어르신 인물이 좋으셔요. 고생 안 하신 분 같아요."

나이든 내가 낯선 이들에게 간간이 듣는 말이다. 고생 없이 80을 넘길 리가 만무하지만 문득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틀린 말은 아니다. 어린 시절 두 끼 밥을 먹던 집의 아들이었다. 그 땐 한 끼도 제대로 챙겨먹기 어려운 집이 더 흔하던 시절이다. 나는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출신으로 8남매 중 7번째, 6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시골 마을에서 괜찮은 집이라는 소리 듣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 소유인 논 27마지기에 밭 2500평을 경작하였지만 천수답이라 수확량은 겨우 식솔들 밥 먹는 것에 그칠 정도였다. 대부분 밭농사로 변변한 수확이 없던 때라 천수답 논에 조 나 메밀을 심어도 물이 충분하지 못해서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 소출을 기대하긴 힘든 때였다. 좁쌀 밥 보리밥이나 실컷 많이 먹으면 그나마 천운이었다. 그 당시가 겨우 두 끼 먹던 집이 마을에서 방귀깨나 끼는 집이라는 소리 들었던 곤궁한 삶의 여건들이었다.

 

■ 수리시설 덕분에 보릿고개를 면했다

6.25 직후 내가 판단하기에 역대 국회의원들 중에서 농민들을 위해 실질적으로 혜택을 준 최고 은인은 신각휴의원이다. 그는 옥천읍 매화리 출신으로 당시 곽정길 옥천농고교장과 결선에 맞붙었다. 두 분은 관 개입 없이 깨끗하게 경선을 했는데 "곽 교장선생님은 고지식해서 졌다."고 어른들이 말하셨다. 신각휴씨는 자유당 시절에 야당의원으로 당선된 후 선진국 3개국을 견학하였다. 수리 시설 견학을 다녀와서 야당의원으로 6.25 이후 수리시설을 만들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수리시설 공사를 시행해서 개심 저수지를 만들었다. 안동댐과 대청댐이 건설되기 전에 조성했으니 상당히 일렀다.

할아버지를 따라 구경을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개심저수지가 완공된 이후에 초등학교 소풍지가 되었다. 이후에 금강양수시설 공사를 진행하면서 순전히 이원 사람들을 인력 동원해서 완공했다. 어른들은 농사짓지 않는 철엔 공사에 참여해서 돈을 벌었다. 쌀도 흔했고 돈도 흔했기에 이원은 부자마을이 되었다. 신각휴의원 덕분에 물이 흔해져서 밭을 논으로 바꾸어서 벼농사를 지었다. 맘껏 벼농사를 지을 수 있어서 이원 사람들은 일찌감치 보릿고개를 졸업했다. 우리 70대, 80대는 그 고마움을 뼛속 깊이 알지만 40대 50대만 해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곧 선거철이 다가오지만 민심을 기억하는 진정한 일꾼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 선각자 한 명의 선행이 이원을 키웠다

우리 이원 사람들에게 은인인 신각휴의원 못지않은 선구자적 역할을 한 분이 더 있었는데 주재옥씨이다. 수원에 있던 서울대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내려와서 농사를 지으며 동네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분은 일본에 가서 복숭아 가지(호끼)를 접목해 얻은 묘목을 가지고 와서 주민들에게 분양했다. 이원사람들이 보리농사를 지으면 실제소득이 거의 없다고 봐야하는데 복숭아 농사로 대체한 이웃은 보리수확 대비 무려 5배에서 많게는 10배의 수익을 올렸다.

이원에 또 한 분의 선구자가 계셨다. 동이면이 포도품질로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이원중학교 서무과장 하던 분인 정종택선생님이 일본에 가서 포도 묘목을 구해와서 산머루에 접목을 해서 성공했다. 그래서 동이면에 먼저 포도품종 개량이 이루어졌고 이어서 이원 전체에도 퍼졌다. 나는 그러한 과정을 보면서 성장했다. 선각자 한 명의 선행이 많은 사람들을 빈곤에서 구하게 한 것 말이다.

 

■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나는 이원 초등학교와 이원 중학교를 거쳐 옥천 농고 마지막 졸업생이 되었다. 옥천농고가 상고로 전향해서 농과 상과 축산과가 있었는데 나중에 축산과는 없어졌다. 1960년 졸업하던 해에 벼 나락을 가득 보관 중이던 사랑채에 갑자기 화재가 발생해서 모두 불타버렸다.

집에 돈이 궁해져서 아쉽게도 대학진학을 못 하게 되었다. 한 순간에 인생이 뒤바뀌는 운명을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경험하고 말았다. 활활 타는 불속에 청춘의 꿈도 태워버릴 수밖에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체신대학 시험을 봤는데 충·남북 합쳐서 대전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 당시 체신대학은 서울대 못지않을 정도로 출세가 보장되었다. 총 200명이 시험에 응시했는데 200:1 의 경쟁률을 뚫고 대전고 출신 1명만 합격하였다. 그는 내 옆자리에서 시험을 봤는데 책들을 보자기에 싸 가지고 왔으니 시골 출신이 틀림없다고 짐작했다.

체신대학 시험도 낙방하고 나는 군대갈래? 취직할래? 양자택일을 선택해야 했다. 돈이 있으면 취직이 쉬운 시절이었지만 나는 군입대를 선택했다. 육군을 지원했으나 5·16혁명 직후라 있는 집 자식들이 빽을 써서 자원한다고 받아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공군 일반병으로 지원해서 필기-신체-면접을 거쳐 12월에 입대해서 꼬박 39개월을 근무하고 제대했다. 왜 그런고하니 소련이 큐바에 미사일을 설치해서 미국과 대치하는 큐바사태가 발발해서 한국도 영향권 아래 놓였기 때문에 3개월을 더 복무했다. 힘없는 한 사람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군에서 나의 업무는 비행기를 정비하는 일이었다. 제트 전투기 F86D 전천후 요격기를 주로 정비했는데 군대생활 할 때 표창장까지 받았다. 사실은 죽도록 고생했었다. 비행기를 몇십 대 정비했는데 인테이크(intake 흡입구)와 테일 파이프(tail pipe- 배기가스 나오는 곳)를 정비복을 입고서 터빈 힐(turbine wheel)을 보면서 매일 20대 정도를 3시간에 걸쳐서 정비하는 업무였다. 혼자서 온몸이 흠뻑 땀에 젖을 정도로 비행전 점검을 아침마다 진행했다. 산소공급과 연료공급도 업무 중 하나였는데 2인 1조 근무로 계기판을 한 명이 보고 다른 사병은 가득 주입하고 끊는다. 싱글(single-한 덩어리)이 40키로 무게에 길이가 40미터인 호스를 드롭 탱크(drop tank)까지 끌어다가 한 번에 주입을 끝내야 했다.

큰형은 장남이라서 부친이 학교를 끝까지 가르쳐 옥천군청 공무원이 되었다. 부친은 농사지을 자식으로 둘째와 넷째 형을 지목해 초등학교만 졸업시켜서 두 형님들은 공부 못한 한을 돌아가실 때까지 마음에 품으셨다. 다시 셋째와 다섯째 형도 소정의 공부를 마치고 체신공무원이 되었다. 막내아들인 나는 제대 후에 직장을 구할 때 형들이 공무원 시험을 치라고 권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공무원 형들이 생활이 어려워 때때로 집에서 나무땔감하고 쌀을 갖다먹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공무원의 위상이 지금과는 달라 공무원 직업이 싫어서 제대 후에 나는 아이디얼, 드레스 미싱회사 중 아이디얼 미싱회사에 면접시험을 보고 입사했다. 충청남북도 권역으로 시험보고 천안으로 발령받았다. 판매과에서 외판사원이 주문을 맡아오면 출고계약서를 작성하고 기사와 다니면서 수리기술도 배우고 수금도 하는 전천후 업무였다. 회사가 대리점을 개인에게 넘기는 바람에 8년 만에 그만두었다. 회사 옆 식당에서 밥을 대놓고 먹었는데 24살 아가씨가 식당일을 돕고 있었는데 너무나 이뻤다. 결국 결혼에 골인해서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운명은 그렇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천안 문화동에 집을 장만했고 큰딸 작은딸 막둥이 아들을 보았다.

 

■ 애들 가르칠 욕심으로 밤잠 줄여가며 부지런히 살았다.

천안생활을 툴툴 털고 이원 본가로 내려와서 3년 동안 농사를 지어보니 빚만 늘었다. 에라 안되겠다 싶어 청주방송총국의 KBS 외근사원으로 옥천출장소에 취업했다. 1985년부터 하루에 150가구씩 다니면서 수신료를 받는 업무였다. 사무실 출근은 일주일에 두 번만 하면 되는데다가 300만원 수금하면 13% 수수료를 받았기에 어지간한 공무원보다 낫다. 수금사원일 때 내근사원의 자녀 2명이 대학학자금 혜택을 받았는데 외근사원은 아무 혜택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외근노조를 직접 결성해서 청주방송국 옥천출장소 외근노조 분회장이 되어서 1993년 데모를 혹독하게 주도하였다. 데모후 외근사원도 대학생 1명, 고등학생 1명의 학자금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덕분에 애들 셋 다 대학을 졸업시켰다. 막내아들은 옥천고 수석졸업 후 충남의대 졸업해 의사가 되었다.

논농사 10마지기 2천 평과 복숭아농사 2천 평을 경작했다. 돈이 된다 해서 꽃사슴도 키웠다. 송아지 가격이 50~60만 원대일 때 꽃사슴 새끼 한 마리가 200만 원대였는데, 암놈2 마리, 수놈 1마리 가지고 시작했다. 새벽 4시에 기상해서 5키로 떨어진 곳에 가서 떡갈나무잎이나 칡 등 사슴이 먹을 풀을 한 경운기 해다 놓고 출근하면 4~5일 먹일 수 있었다.

 

■ 사슴 키웠던 이야기도 해보자면

처음에 사슴 3마리로 시작해서 꽃사슴 29마리와 엘크 1마리 그리고 잡종 1마리 해서 모두 31마리로 늘려놓았다. 문제는 사슴 마릿수가 늘어나니까 새끼 낳다가 죽는 불상사가 자주 발생했다. 내가 출근한 후 집사람이 사료를 많이 줘서 사슴 궁둥이(엉덩이)에 기름이 꽉 끼게 되고 골반이 안 열려 난산을 겪는다. 어느 해인가 3마리나 사산되어서 속이 많이 상하기도 했다. 되도록 사료를 조금 먹이고 대신에 풀을 많이 먹여야 새끼도 숭덩숭덩 낳을 수 있다. 소도 사료를 많이 주면 비육해서 새끼 낳기가 힘든 것처럼, 경험해보니 너무 잘 먹여도 새끼를 낳지 못 하는 게 확실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뭐든 지나치면 탈이 난다.

그 당시 칠방리에서 4곳, 솔티, 장화리, 백지리에서 각 1곳, 장화리 2곳 해서 이원에서는 총 아홉 집이 사슴농장을 운영했다. 꽃사슴 농사는 결국 손해를 보게 되었고, 시베리아 엘크는 녹용 생산이 많아서 재미 좀 보았다. 타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단체로 사슴피를 마시러 와서 짭짤한 수입이 되었다. 그런데 KBS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에서 사슴피 속에 기생충이 있다고 방송이 나오자 수요가 뚝 끊겨서 한순간에 망해버렸다. 그런데 사실은 1년에 2번 사슴에게 주사를 놓는데 기생충을 대부분 박멸하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방송에서 잘 나오면 인기가 확 생기고 잘못 보도되면 진실이 가려져서 날벼락 맞듯이 망해버린다. 방송에 나오는 사람도 말조심해야 하고 소비자들도 무조건 믿는 것도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2004년도 60세의 나이에 정년퇴직을 하였는데 퇴직 몇 해 전부터 집사람이 홍가네 아구찜식당을 운영하는 것을 도왔다. 2년 후 대전 관저동으로 식당을 이전해서 둘째 딸과 함께 식당 운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하던 사슴농사와 과수원을 접었다. 지금은 이원분회 부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노인들에게 복지지원이 잘되도록 활동하는 중이다

 

■ 나의 자그마한 소망이 있다면

신각휴의원의 공덕비를 세우는 일이다. 내 예상으로는 칠방리 원동 구룡 지탄 백지 포동은 100% 환영할 것 같다. 강청리 동량골 소재 곽씨문중 재실이 충청북도 지정 지방문화재이기 때문에 2017년에 몇 억 지원받았다. 내가 종친회장하면서 진입로 확포장과, 재실 수리 명목으로 도비로 보수공사를 진행했던 경험이 있다. 그 경험을 참고하여 내년에 우리 이원 노인회를 통해서라도 기획서를 제대로 준비해서 문화관광과에 제출해서 신각휴 공덕비를 건립하도록 노력해보겠다.

신각휴라는 개인을 기리는 마음을 넘어 '사회의 선행자'를 귀히 모시는 풍토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개인의 삶이 곧 사회의 역사가 된다. 여든이 넘은 우리들의 인생이 모여 이원의 역사 옥천의 역사가 되었듯이 말이다.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작가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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