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태(89, 이원면 신흥리)

▲ 이정태님(89, 이원면 신흥리)

이원 신흥리 마을회관에서 삼십 보를 걸었다. '유공자의 집'이라는 명패가 걸린 초록 대문 집. 문을 슬그머니 열었더니 대문 앞의 백구 한 마리가 컹컹 짖는다. 덩치는 크지만 눈망울이 순해서 한번 짖더니 이내 멈췄다.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집안으로 들어갔다. 쇼파에 앉은 어르신의 수줍은 미소에 덩달아 옅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어르신이 들고 나온 상장 하나, 표창장이다. 1979년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서 사우디 주재 한국 대사(유영수)에게 받은 표창장이었다. 열사의 나라에서 건설역군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무언의 손짓이었다.

▲ 출입국 사실 증명서, 25년간 해외 근무했던 나의 이력들

뼛속까지 이원사람

가는귀를 먹어 희미하게 들리지만 분명 백구 짖는 소리다. 낯선 사람이 왔다는 신호다. 무료한 일상에 낯선 사람도 반갑고 그 사람이 나의 지난 인생을 물어봐서 더 반가웠다. 나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표창장을 슬그머니 들고 나와 낯선 이 앞에 내밀었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나도 치열하게 살았던 그 시절을 다시 기억하고 싶었다. 나의 역사는 잊혀졌다. 과거로 돌아가는 건 아픔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히려 희망이다. 나도 아흔의 할아버지가 아닌 때론 '이정태'로 기억되고 싶다. 식구들에게 이미 잊혀 진 표창장, 나의 치열했던 과거를 오랜만에 회억해본다.

나는 1932년생이며 본적은 서정리이다. 이원국민학교가 올해 100주년 기념인데 나도 이원국민학교 23회 졸업생이다. 아직 마을에는 그 시절 같이 학교를 다녔던 동무들이 간간이 살고 있다. 너무 오랜 기억이라 그니들 이름은 기억 못하지만 얼굴을 보면 알듯 모를 듯 희미한 그림자로 남은 동무들이다. 이원 초등학교는 옥천에서 손꼽히는 오래된 학교다. 시골에 학생이 없어 교적비만 남긴 채 폐교되는 학교들이 늘고 있는데 100년의 명맥을 유지하는 이원초등학교는 자부심을 주는 모교다.

나는 9남매로 태어났고 밑에 남동생과 열두 살 차이가 난다. 그 사이에 있던 동생들을 영유아기에 먼저 떠나보냈다. 그 시절은 크게 아프면 속수무책 다들 손도 못쓰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3남매로 자랐다.

나는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아 기계를 잘 만졌다. 문짝 짜는 기술도 일본사람에게 착실하게 배우면서 기술 좋다는 말을 듣곤 했다. 내가 해외 건설현장에서 총 반장 노릇을 할 수 있던 것도 유년시절부터 돋보였던 손재주에서 비롯되었다.

군대생활도 부산 80통신 기기창 본부에서 목공일에 투입되기도 했다. 창설군대라 할 일이 많았다. 6.25때 입대해서 3년간 공비 토벌 작전에도 투입 됐다. 그 후 포항에서 휴전을 통보 받았다.

결혼은 25살에 장모님께 스카웃되어 아내를 만나게 됐다. 나를 어여삐 보고 딸을 주신 장모님도 내 인생의 은인이다. 장모님과 우리 어머님이 형님 아우님 하며 지내는 사이라 서로 니집 자식 우리 식구로 달라하시며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내가 봉 잡은 셈이다. 아내는 얼굴처럼 마음씨도 예뻐서 살림 잘하고 내조를 잘했다. 당시만 해도 해외 나가있는 남편이 보내준 돈을 흥청망청 쓰고 남편의 피 땀 흘린 노력을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주부들이 간간이 있었다. 반면에 아내는 그 돈으로 대식구를 봉양하고 시동생들 우리 아이들 여의 살이 까지 다 시켜주었다. 지금은 나이 들어 귀도 구실을 잘 못해 희미하게 들리고 교통사고로 몸도 불편하다. 그런 내 옆에서 든든한 친구로 65년을 함께하는 아내가 너무 고맙다.

▲ 국가 유공자의 집 명패, 건설역군으로 유공자로 소박하지만 자존심을 지키며 살았다

 

■ 치열했던 시간, 25년간 해외 건설 현장 근무

나는 이원출신이지만 1970년부터 1995년까지 25년간 해외 건설현장에서 근무했다. 괌의 닛꼬 호텔 다이쪼 호텔 건축 공사에 기술자로 참여했다. 객실 500개 규모의 큰 호텔을 600명의 인부 총 반장으로 공사 현장을 이끌었다. 인부 수급도 사장이 중국에 가서 200명 내가 한국에서 250명 현지 로컬 150명 인부를 썼다. 규모가 큰 호텔이었다. 한국에서 모집은 내가 면접 보고 사장이 같이 나와서 인부를 데리고 들어갔다.

해외는 각국의 인부들이 모여 일하는 현장이라 언어도 문제지만 의식이나 감성이 달라

호흡 맞추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서로 불만 있을 때는 콜라 한잔씩 돌리며 마음을 풀어 주었다. 필리핀 친구가 나를 아버지라고 따를 만큼 현장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려고 애썼다. 돈 벌겠다고 타국에 와서 한낮의 폭염과 싸우면서 일하는데 서로 의지하고 독려 하는 게 절실했다. 그렇게 서로 다독이며 일을 하면 공사 공정도 빠르고 완성도도 높아진다.

해외 나가면 당연히 영어 때문에 고생을 한다. 나도 한국에서 데려간 후배 녀석이 영어를 더듬거려도 의사소통이 되어 녀석에게 배우면서 익혔지만 결국 현장에서는 경험에는 못 당한다. 그래서 수백 명의 인부들 가운데 총 반장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인부들 중에는 이태원 똘마니 출신들도 더러 있었다. 힘자랑은 하지만 일머리가 없어 가르치면서 일을 시켰다.

당시 나는 3천불정도 급여를 받았다. 건설경기 좋을 때라 해외에서 치열하게 일했다. 밖에서 돈 버는 일도 힘들지만 남편 없이 살림하면서 대 식구들 건사하는 아내가 더 고생이 많았다.

해외 나가 있으면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는 가족들 생각에 외롭지만 견뎌야 했다. 가고 싶다고 바로 떠날 수 없는 머나먼 이국땅에 왔다. 향수에 취할 겨를도 없이 열심히 일하고 고국에 있는 아내에게 돈을 부쳤다. 가장으로서의 자부심이 있었다. 괌 사우디 하와이에서 시골에서 상상도 못 해 보았던 호텔을 건축하는 일을 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밖에 나가 실감 했다. 해외 근무는 3년이 넘어가면 영주권 문제로 다시 집으로 왔다. 돌아와서 2년 3년 후에 다시 해외로 나가게 되었다. 그 2-3년 동안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못 다한 효도도 하고 아이들 성장하는 것도 지켜보았다.

아내 혼자 고생하며 식구들 뒷바라지 하느라 힘들었다. 집에서 3년을 보내고 다시 나갈 때면 허허로운 가슴을 달래느라 속울음 삼키기를 수 십 번 했다. 아내도 필시 그 마음을 삭히느라 애간장이 다 녹았을 것이다.

돈만 부치는 가장 역할밖에 못했다. 작고 여린 여자가 어머니 봉양에 시동생들 우리 5남매 까지...손에 물마를 날이 없었다. 고마운 사람이다. 힘들어도 웃어주는 상냥한 말씨의 아내가 우리 집안의 대들보였다.

 

무해무덕한 인생

우리 집도 내가 갓난아이 때부터 살았으니 90살이 되었다. 해외는 하와이를 마지막으로 다녀와서 집을 지었다. 나와 같이 나이 먹는 우리 집은 초가집에서 지붕을 개량하고 내 어릴적 뛰어놀던 마당을 그대로 두었다. 이제 시간을 거슬러 우리 아이들이 휴가 때면 우리 집으로 와서 마당을 차지한다. 모닥불 피워 캠핑할 만큼 안락한 공간이 되었다.

우리 집은 나를 고스란히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친구다. 갓난아이였던 내 숨소리까지 기억하는 유일한 친구, 우리 집. 그 친구 다음으로 나를 잘 아는 친구 이정규, 유년시절 부터 이원초등학교 까지 같이 다녔던 친구. 대전에서 간간이 나를 보러 온다. 90이 넘어도 나를 찾아오는 친구가 있어 기쁘기 그지없다.

청춘을 해외에서 일만 하면서 보냈다. 자조 섞인 푸념으로 나같이 일 많이 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피 땀 흘려 일했고 그 덕분에 돈 꾸러 다닐 일이 없다. 열심히 살아온 대가다.

아이들 또한 내 인생의 귀한 결실들이다.

다들 순하고 착한 우리 5남매, 인세 인석이 인수 호선 인숙이

김장 날이면 마당 한가득 모인다. 김치공장처럼 푸짐하게 100포기씩 만들어 잔칫날과 다름없다. 마당에서 고기 구워 먹고 밤새 놀다간다. 대문 앞의 백구도 사위가 데려다 놓았다. 우리부부에게 적잖은 위안이 되고 든든하다. 낯선 이한테는 짖어대고 얼굴 아는 이한테는 꼬리 흔드는 귀여운 녀석이다. 방학이나 휴가 때 손주들이 시골 할아버지 집으로 와주는 것만도 반갑고 기쁜 일이다. 언젠가 우리 부부가 떠나더라도 우리 아이들이 이 집에 모여 캠핑 하고 김장 하면서 우애를 나누는 것을 본다면 우리 부부는 저 멀리서 그저 행복할 것이다. 아이들을 보면 행복하고 지난 시간의 어려움이 씻겨 내려간다.

내 인생이 무해무덕 하다. 이만하면 됐다. 자존심을 지킨 90년이다.

▲ 남매가 모여 마당 한가득 차지했다. 김장하는 날은 우리집 잔칫날이다.

 

 두 분이 계셔서

김장 날이면 다들 개선장군처럼 모여 잔치를 벌입니다.
어머니가 김치공장 같다고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휴가 때면 그 어느 휴양지보다 좋은 이원집
마당에 모여 모닥불 피워 캠핑을 합니다.
고기도 구워먹고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누고 너무 행복합니다.
두 분이 계셔서 저희들이 이원 집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아버지가 계셔서 어머니 걱정을 덥니다.
어머니가 계셔서 아버지 걱정을 한 시름 놓습니다.
두 분이 그 집에 계셔서 감사합니다.

젊은 시절 해외에 나가 일하시느라 힘드셨을 아버지
아버지를 보내고 혼자 남아 대가족을 건사하신 어머니
두 분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이제야 그 깊은 사랑을 알게 됩니다.
오래오래 옆에 계셔 주세요.

-인세 인석 인수 호순 인숙 올림.-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작가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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