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 장군의 이중서훈 문제가 선결되어야

2019년 겨울부터 보훈처는 잘못 서훈된 독립유공자를 찾기 위한 전수조사를 실시했다. 전체 독립운동가 중 초기 서훈자들과 그동안 친일 논란이 있었던 인물을 1차 재조사 대상에 포함했다. 그런데 거기에 최진동 장군이 포함되었다. 2019717일 자 서울 신문의 최진동 장군 친일 의혹 보도 등 논란이 있는 인물이라 재조사에 포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은 2020년 여름 국가보훈처 서훈심시위원회가 최진동 장군의 서훈을 취소한다는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전광석화 같은 진행이었다. 이 절차는 국가의 행정 행위다. 공적 기구에서 그런 결정을 하려면 그 과정 중에 해당 유족들한테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동안 어떤 사료가 추가로 확인되어 그런 결정을 하려고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줘야 한다. 그리고 유족에게 소명할 기회를 주고 답을 받는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런데 그런 과정도 없이 보훈처 서훈심사위원회가 일방적으로 서훈 취소를 결정했다. 중국과 한국, 미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후손 중 누구도 보훈처의 연락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몇 달에 걸친 전문가 검토와 서훈심사위원회 회의 자료 준비하는 과정에서 후손들에게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고, 내부에서 준비한 편향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서훈 취소가 결정되었다는 뜻이다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행정 행위다. 보훈처가 중심이 되어 진행하는 최진동 장군 친일 결정 과정을 지켜보면서 서훈심사위원회 내부에서 누군가 이 과정을 주도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그동안 내부에서 주도하지 않으면 진행할 수 없는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9년 서울신문 기사 건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기사를 빌미로 다음해 전수조사에 명단을 올린 것은 더 황당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보훈처 서훈심사위원회라는 공적 기구가 정해진 절차와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졸속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심사위원회 내부에서 최진동 장군의 친일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비상식적으로 밀어붙였다는 생각이 들어 지난 몇 년의 시간을 다시 돌아보았다.

최진동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레닌에게서 권총과 군복을 선물받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최진동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레닌에게서 권총과 군복을 선물받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북간도 봉오동을 신한촌으로 개척한 최운산 장군은 1912년부터 봉오동 군사학교를 열어 독립군을 양성했고, 1915년 토성과 대형 막사를 건축해 독립군기지를 완성했다. 1919<대한군부도독부>가 창설되었고, 1920년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가 창설로 이어졌다. 봉오동·청산리 독립전쟁에서 대승 뒤에 간도 제1의 거부 최운산 장군의 장기간에 걸친 헌신이 있었다. 그동안 봉오동 독립전쟁에 관한 학계의 연구가 부진하여 연변 도태 최우삼의 아들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최명철 4형제의 업적이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2016년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가 창립 이후 당시 북간도의 정치사회적 배경을 밝히는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연구작업을 통해 최근에야 봉오동 독립전쟁의 역사와 최진동,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업적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봉오동전투에서 승리한 독립군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는 총사령관 최진동, 참모장 최운산, 참모 최치흥, 연대장 홍범도, 연대장 김좌진... 등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192012월 임시정부 군무부가 발표한 공식 문서에도 사령관 최진동, 연대장 홍범도로 기록되어 있다.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에서 2016년부터 봉오동전투의 현장을 여러 차례 답사하여 봉오동전투의 현장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10km정도 산으로 들어간 곳임을 밝혀냈다. 새로운 사료 발굴을 통한 학술연구와 더불어 독립전쟁의 현장을 확인하여 북간도 무장독립전쟁사를 구체화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2015년 연구작업 중에 최운산 장군의 8개의 異名(명길明吉, 문무文武, 만익萬益, , 고려高麗, , ) 중 하나인 최문무가 이중으로 서훈이 된 것을 발견하였다. 최문무 후손의 서훈 신청이 아니라 2008년 보훈처 연구진이 독립운동 사료를 확인해 최문무를 애국장으로 서훈하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보훈처가 자체 발굴한 독립유공자라니! 정말 반갑고 고마운 마음으로 보훈처에 최운산과 최문무가 동일인임을 알렸다. 그런데 의외의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2008년 최문무가 서훈이 된 후 보훈처 직원이 연변에서 가서 최문무의 후손을 찾았고, 2009년부터 그 후손이 국내에 들어와 유족연금을 받으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사료를 통해 확인한 최문무의 업적은 최운산과 활동과 업적이었다. 만주 무장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여러 역사학자도 최문무와 최운산이 동일임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보훈처는 지금도 최문무와 최운산은 다른 인물이라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황당한 일이다. 앞으로 여러 가지 확인을 통해 수정해야 할 일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최문무의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연변 출신의 독립군 후손 모임에 최문무의 외손자라는 류모 씨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최문무의 친손자도 한국에 들어왔는데 외손자가 수급권자로 연금을 받고 있어 6촌 간 불화가 심한 것도, 최씨가 보훈처에도 여러 번 문제를 제기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2018년 가을 가짜 독립유공자를 주제로 다큐를 제작하던 ebs 다큐 제작진이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류 씨와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런데 그는 최문무의 독립운동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최문무의 외동딸이라고 주장하는 등 거짓말도 했다. 제작진이 그의 거짓 답변을 지적하며 진실을 요구하자 그는 잠시 보훈처 관계자와 통화한 뒤 취재를 거부했다. 보훈처 담당자가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보훈처와 함께 대응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제작진을 향해 자신은 보훈처와 역사학자 박 모 교수가 인정해준 사람이니 그들에게 가서 확인하라며 큰소리쳤다고 한다.

이해할 수 없는 행태로 자신이 가짜일 가능성을 스스로 확인해준 것이다. 그 후 취재진이 보훈처에 정식 인터뷰를 요청했다. 2009년 연변에 가서 그가 후손이라고 인정한 보훈처 연변지역 담당자 안모 씨를 만나기 위해 보훈처를 방문했으나 그녀는 취재진에게 거칠게 대응하며 끝내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무장투쟁을 전공한 역사학자 박 모 교수가 이 과정에 개입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보훈처 직원과 연변에 동행해 류씨가 최문무의 후손이 맞다고 인정한 역사학자 박모 씨가 2019년 서울신문에 최진동 장군의 친일이라고 제보한 보훈처 서훈심사위원장이 동일인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몇몇 의문들이 한꺼번에 해소되었다. 사실 지난 몇 년간 그가 보훈처 서훈심사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장기간 봉오동의 독립군을 먹이고 입힌 최운산 장군의 부인 김성녀 여사와 <대한북로독군부> 참모 최치흥의 서훈을 막고 있었다. 그가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최우산 장군, 왼편에 여운형 선생이 함께 있다.
1922년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최우산 장군, 왼편에 여운형 선생이 함께 있다.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삼형제와 온 집안이 함께 독립운동을 한 것이 역사적으로 다 밝혀져 있는데도, 김성녀 여사의 서훈이 옳다는 다른 역사학자들의 의견서마저 무시당했다. 위원장인 그가 주도하여 서훈심사위원회에서 김성녀 여사와 최치흥의 서훈이 번번이 부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친일로 알려진 인사들에 대해 시민단체가 고발해도, 후손들이 스스로 가짜임을 밝혀도 한 인물이 친일로 결론이 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유명 예술가 등 사회적 이슈가 된 인물들의 친일 논란도 그동안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그런데 왜 최진동 장군에 대해서는 그렇게 급하게 결론을 내려고 애쓰는지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터다.

지난 몇 년간 최운산 장군 후손들이 국가보훈처에 최운산과 최문무의 이중 서훈에 대해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했고 이후 최진동 장군이 친일이라는 이야기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실 그동안 역사학계에서 봉오동전투와 최운산 장군의 업적에 대해 박 교수는 최운산이 군자금 좀 댄 것이 뭐 대단하냐며 폄훼한다는 말을 여러 사람을 통해 전해들었다. 무장투쟁에서 군자금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닌가? 무장력을 가진 군대를 유지하려면 얼마나 비용이 많이 드는지 알고 있는 만주무장투쟁사를 전공한 역사학자가 할 수 없는 언행이었다.

그동안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의아했다. 그는 우리를 만날 때마다 자신은 봉오동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계속 강조했다. 북간도 무장투쟁사를 전공한 역사학자가 독립전쟁의 1회전봉오동을 모른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그가 봉오동보다 청산리에 관심이 더 많은가 보다 생각하며 무심히 넘겼었다. 그렇지만 왜 계속 최운산 장군을 무시하는 언행을 하고, 최진동 장군이 친일이라는 소문을 주변의 역사학자들에게 퍼드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울신문 기자에게 최진동 장군이 친일로 결정난다고 확언하여 기사를 게재케 하고, 그 기사를 빌미로 재조사에 포함시키는 등등 지난 몇 년의 일련의 행동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정말 궁금했었다. 그동안 최진동 친일 논란과 최운산 최문무 이중 서훈 문제가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아마 그는 최진동 장군이 친일로 결론이 나면 그의 동생인 최운산도 그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최운산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세상에 알려지고, 최문무가 곧 최운산이라는 것이 알려지는 사태를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2009년 최문무의 후손을 찾는 과정에서 박 교수가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지는 지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최문무의 가짜 후손으로 짐작되는 사람은 10여 년 전 국내에 들어와 정착하고 장기간 유족연금을 수령하고 있다. 만약 잘못된 일이라면 단순한 실수라고 덮고 지나갈 수 없는 사안이다. 당시 보훈처 담당자에게 책임을 묻고, 함께 검증작업을 했던 역사학자의 책임소재도 거론될 것이다.

최진동 장군은 역사의 피해자다. 중국의 문화혁명기에 공산주의를 반대한 지주였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몰렸고, 이후 연변 역사학자들의 개인적인 욕망과 편파적 작업에 친일파로 폄훼당했다. 후처인 어린 부인이 낸 국방헌금 100원 등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소한 가십에 불과했을 이야기들이 연변 역사학자들의 개입으로 친일의 증거로 과장되었고, 이런저런 에피스드들이 몇십 년 동안 정리되지 못한 채 한국에서도 한 역사학자의 개인적인 욕심에 동원되는 불행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보훈처 서훈심사위원회가 친일의 근거로 내놓은 반민특위 자료, 동아일보 헌금 기사 등은 이미 논란을 거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90년대에 판명된 것들이다. 추가된 자료 중 1926년 중국 측에 잡혀 3년간 투옥 후 출소하면서 연길관청, 즉 중국에 제출한 자술서를 마치 일제영사관에 제출한 것으로 사실을 왜곡했다. 또한 당시 죽음을 앞두고 와병 중인 최진동 장군이 사망 몇 달 전 선무활동을 했다는 정황상 거의 불가능한 주장과 친일신문인 만선일보에 최진동 장군 사후에 일제가 조의금을 보냈다는 기사가 친일의 근거라고 했다.

국가보훈처 서훈심사위원회는 최진동 장군을 친일이라는 결론 하에 그동안 제기됐던 자료들을 다 끌어모아 비상식적인 몰아가기로 친일이라 판정했다. 당시 일제는 최진동 장군이 살던 도문시의 집 옆에 3층짜리 요정을 지어 일거수 일투족을 내려다 보며 감시하고 그를 회유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인물이다. 만약 당시 최진동 장군이 친일이 사실이라면 그의 생전에 더 많은 내용이 만선일보 여기저기에 대문짝만하게 실렸을 것이다. 겨우 사후 조의금으로 기사로 문제 삼는가!

최진동 친일 논란이 불거진 과정을 다시 돌아보면 서훈심사위원 한 사람이 왜곡된 내용을 신문사에 제보해 사회적 논란을 만들고, 그 논란을 근거로 재조사에 포함시키고, 신문기사는 또 하나의 증거 자료로 축적되었다. 그리고 심사위원장인 자신이 서훈심사위 회의에 영향력을 발휘하여 서훈 취소 결정을 끌어냈다. 비록 지금 결정적 증거를 제시할 수 없지만 국가보훈처 서훈심사위원회라는 공적 장치가 한 특정 학자의 편견과 주장에 좌우되고 있음을 목도하면서 역설적으로 그것이 가장 큰 증거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이러한 논란의 가장 큰 배경에 서훈심사위원회 구조와 편향된 운영 방식에 있음을 확인했다.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한 역사학자 장기간 서훈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심사절차와 과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동안 역사계 주변에서 보훈처 서훈심사위원회 위원 구성과 운영에 대한 불공정에 대해 오랫동안 지적하고 있었다.

최진동 장군 친일 논란은 앞으로 후손들의 소명과 학자들의 논의를 거쳐 제대로 정리되어야 하고, 최운산과 최문무의 이중 서훈 문제도 다시 구체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보훈처 공훈심사위원회는 공정한 심사를 진행하고 있는지, 서훈심사위원회 위원들은 충분한 연구를 바탕으로 공정한 심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지, 이제 챙기고 살펴보아야 한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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