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아버지 최봉우
20대의 아버지 최봉우

2차 대전 막바지인 1944, 일본 유학생들은 모두 학도병에 징집 당했다. 와세다대학교 정치학과 학생인 최봉우도 더 이상 징집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만주의 삼림지대에서 비밀리에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장투쟁을 지휘하는 최운산 장군의 큰아들이 일본군 군복을 입을 수는 없었다. 3학년을 마친 이버지는 대학 졸업을 포기하고 봉오동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일본으로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봉오동으로 돌아갈 때도 주저함이 없었다.

최운산 장군과 김성녀 여사는 유학 때문에 미뤄둔 아들의 혼인을 빠르게 준비했다. 키가 커서 마음에 들었던 정혼자, 훈춘의 명망가 차정천(車正天)의 셋째 딸 연순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스물넷, 어머니가 스물이었다. 당시로는 늦은 결혼이었다. 그러나 해방이 얼마 남지 않았던 당시 연변은 이미 공산당이 세력을 주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지주의 큰아들, 일본 유학생 출신의 젊은이에게 만주는 결코 안전한 지역이 아니었다. 학병을 거부하고 돌아간 고향에서 신혼생활을 즐길 새도 없이 아버지는 결혼 1주일 만에 간첩이란 누명으로 잡혀갔다.

당시 간첩은 때려서 죽이는 게 불문율이었다고 한다.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이 가해졌다. 매질하던 간수들은 아침이면 쓰러져있는 최봉우를 발로 툭툭 차며 생사를 확인해보곤 했다. 거의 두 달간 계속되는 매질에도 끈질기게 목숨이 붙어있자 간수들 사이에서 이상한 말이 돌기 시작했다. 누군가 최봉우가 태어나던 날 봉오동의 초모정자산 꼭대기에 서기가 돌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기억해 낸 것이다. 신성한 산의 정기를 받은 사람을 죽이면 죽인 사람에게 해가 돌아올지 모른다며 겁을 먹은 간수들이 자기가 당번일 때는 죽이지 않으려고 매질의 강도가 점점 약해졌다.

그러나 어차피 살아서는 감옥에서 나갈 수 없다는 판단을 한 젊은 최봉우는 죽음을 선택했다. 아편을 감옥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는 아편이 여러 용도로 쓰일 때였고 양귀비를 재배하는 집도 많을 때였다. 아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던 할머니는 몰래 아편을 반입해주었다. 아버지는 죽을 결심으로 수십번 사용할 수 있는 아편 덩어리를 한꺼번에 삼켜버렸다. 치사량의 아편을 섭취한 최봉우가 사경을 헤매자 간수들은 집에 가서 죽게 하려고 수레에 실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들이 집으로 실려온 그날 밤 최운산 장군은 아들을 두만강 건너로 피신시켰다. 바로 아래 동생인 봉학이 형을 업고 어둠속에서 두만강을 건넜다. 강변의 허름한 움막에서 신혼의 아내가 남편을 숨겨놓고 간호했다. 그런데 정말 초모정자산의 정기를 받은 탓이었을까 최봉우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살아났다. 죽을 작정으로 먹었던 아편이 오히려 진통과 항염의 치료 효과가 있어 고문으로 인한 장독이 빠르게 치유되었고, 다시 정상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마다 약과 독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아편처럼 잘 쓰면 약이 되고 못 쓰면 독이 되는 게 약리의 기본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시곤 했다. 그리고 당신이 젊을 때라 회복이 빨랐던 것도 있었겠지만 아마 우리 집안이 체질적으로 회복력이 좋은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 최운산 장군도 여러 번 감옥에 갇히셨고 매번 고문을 당해 수레에 실려 나오셨는데 오래지 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무도 모르게 변장하고 이름을 바꿔 다시 무장투쟁에 뛰어드셨다는 것이다.

 

사실 할아버지 최운산장군은 1924~19263년간 투옥 당하신 것을 시작으로 1937, 1939, 1945년 순국 직전까지 모두 여섯 차례 감옥살이를 하셨다. 일생에 걸친 투옥과 고문에도 대한민국의 독립을 향한 의지는 한 순간도 꺾이지 않으셨다. 그러나 아무리 회복력이 좋은 체질의 최운산 장군도 마지막엔 결국 고문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셨다. 더구나 해방 직전인 1945년 7월의 일이니 너무나 가슴 아프다.

두만강변의 움막에서 아내의 보살핌을 받으며 고문의 장독을 극복한 최봉우는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평양으로 피신했다. 당시 평양에는 인민군 대좌인 손위 처남 차홍균이 있었고, 유학시절 친구 심종운과 결혼한 누이 최옥순이 살고 있었다. 공산당 간부의 친구와 큰외삼촌의 도움으로 최봉우는 평양에 정착할 수 있었다. 건강을 회복하고 이름을 최치영으로 바꾼 아버지는 평양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취직해 새 생활을 시작했다.

편집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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