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녹화하고 있는 한아
                                                           오디션 녹화하고 있는 한아

 

할미의 선물

만12세가 되어가는 한아는 프랑스계 한국인으로 중국 북경에서 태어났고, 북경과 상하이에서 6년을 살다가 2015년에 엄마 오빠와 함께 미국으로 가서 현재 헐리우드 복판에서 훈련하고 있다. 아빠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함께 미국으로 오지 않고 프랑스로 가버렸다. 그래서 한아는 매년 여름방학과 겨울 방학이 되면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프랑스에 가야하게 되었다. 덕분에 프랑스어를 잘 하게 되었는데, 프랑스에 가는 것이 재미없고 싫은데도 가야한다. 공부를 좋아하는 한아는 미국에서 엄마 곁에서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오디션을 준비하며, 강아지 테디하고 노는 것을 좋아 한다.

한아는 모습이 한국아이 같고, 입맛도 한국 음식 그중에서도 매운 김치와 육개장을 좋아한다. 엄마와 할미 덕분에 한국어를 잘 구사하여 한국 분들이 한아를 잠깐 보면 한국아이로 착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는데, 그건 한아 안에 백인의 피가 흐르는 것과 관련되어 얼굴이 햇빛에 노출되면 백인 피부 같이 깨점이 쉽게 생긴다는 사실이다. 태양이 강렬한 캘리포니아에 이사와서 자외선 차단제를 열심히 바르게 했는데도 깨점이 자꾸 생기더니 이제는 깨점박이 얼굴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게 한아의 매력 포인트가 되었다. 깨점박이 한국형 얼굴은 드물기 때문에 동양적으로 귀엽게 생긴 한아의 얼굴을 보면 누구나 다시 찬찬히 보고 싶게 된다. 깨점박이 얼굴 한아의 산뜻한 표정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코로나가 시작된 후 한아는 온라인으로 단과 대학인 LACC(Los Angeles Community College)에서 TV Production 과목을 선택해서 자기보다 나이가 열 살, 스무 살, 많은 사람들과 공부를 하더니 좋은 성적으로 코스를 끝냈다. 그런데 온라인으로 수업할 때 한아는 비디오를 끄고 자기 얼굴을 보이지 않고 했다. 자기 얼굴이 여덟 살짜리 같이 보이기 때문에 안보여 주기로 했다고 한다.

한아는 어릴 때부터 사십대 같은 말 표현을 하곤 했다. 한 번은 상하이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엔젤 유치원”에 다닐 때 일어난 일인데, 어느 날 한아가 엄마 휴대폰을 빌려달라고 하더니 선생님에게 한글로 문자를 보낸 것을 엄마가 나중에 발견했다. “선생님이 너무 쎄게 말할 때는 저는 무서워요. 좀 더 부드럽게 말을 해주시면 좋겠어요. 저는 선생님을 사랑해요.” 그 문자를 보내고 난 후부터 아침에 유치원에 갈 때마다 한아 얼굴에 즐거운 표정이 비치는 것이 보였다. 선생님의 말씨가 부드러워졌음이다. 그렇게 한아는 일찍부터 인간관계를 잘 운영하는 재주가 있었다. (한국의 남존여비 유교전통 속에서 눌려서 자란 할미는 몇 살이 되어서 그런 기술을 습득했을까?” 40대 이후인 것 같다.)

한아 아빠는 프랑스의 고지식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완벽한 것도 충분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동생이 말 할 정도로 초 완벽주의자였다. 함께 살기도 함께 일하기도 어려운 그런 사람이다. 한아 엄마는 한국적인 감성을 가진 2세로 한국인의 정서를 세포 한 개 한 개 속에 담고 있고, 한아는 그런 분위기를 아주 좋아하여 자연적으로 모계 쪽으로 치우쳐 있다.

한아가 미국에 이사 와서 많은 힘든 과정을 지나면서 불같이 화가 폭발하면 집이 떠나갈 정도로 큰소리를 지르며 떼를 쓸 때가 있었다. 그 때마다 할미는 한아를 안아서 문 밖에 내다 놓고 성질이 가라앉을 때까지 있다가 성이 가시면 들어오도록 훈련을 시켰다. 후에 엄마가 한아에게 할미가 그렇게 할 때 어떻게 느꼈느냐고 물으니까 “응, 그래도 할미는 내가 잘못했을 때만 그랬어”라고 답을 했다. 이렇게 해서 한아는 엄격한 할미와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엄마의 품에서 자라면서 혼열아임에도 불구하고 3세들이 흔히 가지게 되는 정체감의 혼란이 없이 잘 자랐다.

한아는 일찍부터 “I am a Korean”이라고 공표한 바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도 원하던 한국을 가서 직접 체험해 볼 기회가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지난 8월에 미국에 코로나 사태가 심각해졌을 때 할미와 함께 엄마오빠와 함께 한국에 가서 한동안 살자고 하니까 펄쩍 뛰며 좋아했다. 그런데 아빠가 변호사를 사서 자기에게 주어진 양육권을 행사하여 아이들이 한국으로 이사 가서 장기체류하는 것을 법적으로 막아버렸다.

인종적 우월감이 있는 그 작자는 자기 아이들이 한국화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는 이번 여름에는 8주간 프랑스에 와야 한다고 했다. 그런 아빠에게 한아는 딱 부러지는 문자를 보냈다. “아빠, 나는 그렇게 오랜 기간을 프랑스에 가서 보내고 싶지 않아요. 단축해주세요. 그게 혹시 엄마의 주장이라면 내가 엄마와 담판을 할 께요. 내가 갈 수 있는 건 딱 6주, 그게 전부에요.  끝.”

작년 8월에 할미가 혼자 한국에 와서 수 개월이 흘러가자 한아는 할미가 자기들을 버리고 간 것이 아닌가 의아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9개월이 지나고 이제, 드디어 코로나 백신 1차, 2차 접종을 하고 미국에 한아를 보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좋아하다가 그런데 할미는 4개월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한아는 결국 할미는 우리를 버리시는가보다 하며 울컥했다. 화상통화로 해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아니야, 나는 한국에 너희들이 올 터전을 마련하고 있어. 한아에게 그렇게 말해줘“ 라고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글쎄 내가 한국에 터전을 잡아 놓은 게 뭐가 있지?”라는 자괴심이 들었다.

그러던 중에 달 반 전에 생뚱스럽게 들리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 “김반아 선생님, 이번에 ‘국무총리 공헌 훈장’을 받게 되셨어요~ ” 도저히 믿기지 않고 실감 나지 않는 소식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캐나다 여권을 가졌기 때문에 자유로이 평양을 다니면서 평화운동을 해 온 사람이고 중립화에 대한 강의를 할 때면 안기부에서 나와 청중석에 앉아서 듣고 있는 것을 보아 왔다. 이 공헌 훈장 수여는 보수 진영에서 추진하는 것이었다. 

공헌 훈장 수상식에 참석한 후에 미국의 가족들에게 돌아가면 건네 줄 선물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국무총리 공헌 훈장과 기념사진들, 그리고 이야기보따리....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알고보니 그 상은 국가 훈장이 아니고 민간 훈장이었고, 그 상을 받도록 나를 추천한 분은 '영성시인'이라고 알려진 분이었다. 내가 하버드 박사라는 이유로 나를 추천했는데, 나와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분들은 내가 그 상을 받는 것을 반대했다. 그렇지만 흑백논리보다는 융통적인 가슴의 원리로 살아 온 나는 그냥 가서 받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수상식이 5월 31일이었고 8분 연설문을 미리 작성해서 보내 달라는 '영성시인' 추천자의 요청에 따라 미리 써서 보내주었다.  그런데 얘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내가 매일 저녁에 영암 구림마을과 죽정마을을 잇는 구림천 산책길을 따라 자전거를 탔는데 5월23일 한 골목에서 튀어 나온 차를 급정거를 하여 피하려고 하다가 넘어져서 중상을 입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목포한국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그 이유 때문에 수상식에 갈 수 없게 되었다.  (하늘의 계획이었다.) 나는 가까운 동지 몇 분들에게 내 대신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고, 동지 중의 한 여성 분은 내가 쓴 8분 연설문을 대신 낭독하고 훈장과 상장을 받아주기로 했다.

수상식 날이 왔고 내가 부탁한 다섯 분이 참석했다. 그런데  행사 도중에  그 분에게서 이상한 분위기의 행사라고 문자가 왔다.  나의 연설문을 대신 낭독하고 훈장과 상장을 받아 온 분이 사진을 찍어서 병원으로 보내 주었다. 읽어보는 순간 내 속에서 역겨운 기운이 올라왔다. 며칠 후에 나의 부탁에 따라 받아 온 일체를 택배로 주최측에 반환하였다. 그 행사의 메인은 나를 추천한 "영성시인"이  '00 문예'라는 단체의 부총재가 되는 행사였다.

첫째로 왜 문예단체에 총재 부총재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김반아의 총리 훈장 수상식은 그 행사의 들러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신기한 것은 그 '영성시인'과 주최측이었던 한국00재단의 사무총장 000 박사에게는 그런 것들이 전혀 이상하지가 않았다. 나는 앞으로 계속 두고 교류하면서 그 분들의 정체와 관계를 살펴보기로 했다.

국무총리 훈장을 목에 걸고, 진보와 보수 사이를 오가며 ,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이 되는 꿈을 함께 꾸어보려고 했던 나의 의도는 내 계획표에서 일단 물건너 갔다. 그 대신에 나에게는 보수 진영에서 활동하는 그 '영성시인'과 새로운 관계가 생겼다. 그녀는 나에게 "자기는 앞으로 절대로 하버드 박사를 추천하지 않겠다며 "참 상종 못할 박사가 하버드 대 출신이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이렇게 말하는 분은 교수로 불리우는 분이었고 보수 진영에서 존경받는 분이다. 지금까지 만나 본 적이 없는 한국사회의 일면을 이렇게 가까이 직면하게 되어 나는 거부하지 않고 계속 탐사하기로 했다. 

손녀 한아는 할미가 다쳤기 때문에 가기 싫은 프랑스를 8주간 가기로 자진해서 결정했다. 엄마가 한국에 가서 두 달간 할미 곁에 있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꺼이 자기의 싫은 감정을 접고 가기로 한 것이다. 생전 처음 스스로 결정한 자기 희생이다. 

“얘들아, 이거 봐. 할미가 그동안 한국에서 너희들을 위한 터전을 잘 만들고 있다고 하늘이 내려 준 상이다.” 라고 훈장을 보여주려던 것이 대폭 바뀌었다.  영암에서 늑골에 네개의 골절상을 입고, 진보에게는 적군이라는 진영에 들어가 맞부딪치며 만들어 가는 할미의 이야기들은 가족과 함께 한국에 정신적 터전을 만들게 하고 있다. (계속)

- 김반아  생명모성연구소 소장

 

편집  :  심창식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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