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의 보물, 최형석 경찰

새벽의 월출산 (출처: 글쓴이)
새벽의 월출산 (출처: 글쓴이)

 

영암한국병원에서의  ‘월출산 명상‘은 큰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월출산의 분홍 하늘 (출처: 글쓴이)
월출산의 분홍 하늘 (출처: 글쓴이)

 

이른 새벽의 고요 속에 병동 밖으로 나가 걸으면서, 급습해오는 산 기운을 활짝 열린 가슴으로 받고 있는 동안에 6.25때 피난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전쟁 중에 일어난 일이었고 나는 만 네 살이었으며 일종의 신비 체험이었기 때문에, 그 사건은 혼자만의 것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었으나 나의 인생의 틀을 세워주었다. 인적이 없는 산 속에서 일어난 것으로 나와 자연과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이었는데, 후에 되돌아보니 종교적인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아버지는 USOM(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to Korea) 관계로 미국에 가계시고, 어머니 혼자 우리를 데리고 ~ 2살짜리 동생을 등에 업고 언니 (5세)와 나(4세)는 손을 잡고 ~ 연로하신 할머니 할아버지와 피난길에 나서게 되었다. 끊어진 한강 다리를 어떻게 건넜는지 기억에 없지만, 폭탄 터지는 소음 속에서 끝없이 이어진 피난민들 속에 묻혀 걷다가 기차를 타고 내려서 또 걸은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충청남도 입장역에서 한 참 걸어들어 간 산속이었다. 헤매던 끝에 어머니는 오두막집 한 채를 발견하였고 모두 환성을 지르며 뛰어 들어갔는데, 한 칸짜리 방은 장판을 깔아본 적이 없는 것 같은 흙바닥이었다. 다행히 집 가까이에 개울물이 흐르고 있었고, 아침에 세수 하러 나가면 작은 산짐승들이 푸다닥 거리며 도망을 간다. 어머니는 불을 지피고 짐 속에 넣어 가지고 온  쌀로 밥을 하실 때면, 나는 행복에 쌓여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동덕여중 교사였고 북아현동 한옥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던 어머니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안방을 내주고 평소에는 건넌방을 사용하며 학교에 출근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보낸 산속 생활은 처음 맛보는 꿈결 같은 시간이었다.  피난민의 대열 속에서 정신없이 걸어온 장면이 끝나고 1막이 내리고 다음 막이 올라가가더니, 깊은 산 속에서 엄마와 평화롭게 보내는 장면이 시작된 것이다.

밤하늘의 가득한 별들과 '쌩~'하는 산기운은 나의 작은 머리 뚜껑을 열고 쏟아져 들어와 나의 허기졌던 속을 담뿍 채워주었다. 이 시기의 경이로운 경험들은 나의 무의식 세계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후에 만난 성현들과 종교의 말씀들은 나의 정신 세계가 성장해 가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나를 개종시키지는 못했다.

나의 삶은 4부작으로 정리된다. 어릴 때 전쟁을 맞아 폭탄 터지는 소리와 밀려가는 피난민들, 육중한 탱크들, 미군이 지프차 타고 지나가는데 흑인을 처음 보고 놀랐던 기억, 그리고 산속의 신비 체험이 1부를 구성했고, 2부는 18세에 부모님 따라 부산항에서 화란 화물선을 타고  40일이 걸려 브라질로 가서 4년을 살고, 캐나다로 다시 이민하여 9년간 살고, 다시 미국으로, 총 3차 이민을 한 것이다. 3부에는 어머니가 토론토에 사시던 동안 1975년에 부녀상봉을 위해 평양방문을 함으로 하여 북녘과의 관계가 열렸고 그로 인해 한국에 사는 외가친척들과의 관계가 일체 단절되었다. 우리 집안 내의 분단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사촌동생의 외아들 영화배우 강동원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4부에는 어머니가 외조부 이종만 선생의 유언을 받들어서 남북의 영세중립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다가 서귀포에서 뇌출혈로 쓰러지신 후, 내가 바톤을 이어받아 남북과 영적 교류를 하고 중립화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요약할수 있겠다.

어릴 때 우주 의식과 연결된 나는 4부 과정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런데로 순탄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언어 체계가 세워지기 이전의 어린아이였지만, 일찍이 체험한 고차원의 진동은 내면에서 사라지지 않고 다사다난한 이민 생활 속에서도 ‘온전성’에 대한 감을 잃지 않고 노를 저어 가게 해주었고, 훗날 남북을 왕래하면서 교류하는 것도 제주도 여행 가는 정도로 수월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교회에 적을 두지 않은 신앙인으로 살아왔는데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외조부도 그랬으니, 대를 물리는 일종의 ‘모태신앙’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생명모성'이라고 이름 지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홍익인간'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 온 것 같다. ‘저 높은 산’을 향하여 기도하는 자세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높은 곳에서 내려와서 세상 사람들과 깊이 만나고 어울려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다. 어머니 일선님은 89세에 뇌수술을 하고는 일기를 쓰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일기장에 “각성”이란 단어가 떨린 필체로 써 있었다. 육신을 가누지 못하게 되어 누워 살아도 깨어 사는 것이 중요했다.

이번에 사고가 일어났을 때, 네 개의 늑골이 골절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는 집에 가서 쉬면 나으려니 했다. 그러나 진통제를 두알 먹어도 계속 아파서 이튿날 병원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목포행 버스 정거장 앞에 가서 보니 바로 곁에 군서파출소가 있어 들어가서 사고에 대해 알렸다. 그러자 그들은 영암 경찰서 교통사고 부서에 연락을 했고 담당 조사관이 배정되었다 최형석 조사관은 전화로 자기소개를 하며 진술조사를 해야 한다고 영암병원 로비에서 만나자고 했고, 한 시간 반이 걸려 조사문을 작성해 갔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더 조사할 것이 있다고 영암 경찰서로 와달라고 했다. 내가 아직 입원하고 있으니 차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2차 조사는 영암경찰서에서 세 시간이 걸려 진행되었다. 최 조사관은 지난번에 작성한 진술서를 보여주며 그때 진술한 말들이 지금도 옳다고 생각하는지 말해 달라고 했다. 나의 손도장이 찍힌 진술서를 받아들고 읽어본 후, “상대 운전자가 일단 정지를 하지 않고 확 튀어나왔다”고 진술한 말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 순간에 내가 그렇게 판단했다고 정정하면 좋겠습니다.“ 라고 했다.

 

- “사고가 난 위치에 대해서 진술한 것은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맞다고 생각합니다.”

- “차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전거를 급정거하다가 넘어지셨습니까?”

“2~3미터 정도 떨어진 것으로 기억합니다.”

- “CCTV에 그 때 사고가 난 장면이 담긴 것을 찾았으니 보여드리겠습니다.”

“아, 시골 길에도 CCTV가 있어요? 보여주세요.”

- “잘 보세요. 여기 자전거가 내려오고 있지요? 그리고 저기 승용차 한대가 골목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지요? 그런데 저 골목은 어머니가 진술한 골목이 아니고 그 전 골목입니다. 그리고 넘어지신 지점은 저 차에서 2~3미터 떨어진 곳이 아니고 12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 부서에서 나가서 줄자로 재어 보았습니다. 여기 사진이 있으니 보세요”

“어쩌면... 정말 그렇네요.”

- “어머니가 다치고 경황이 없으셔서 잘 못 기억하고 계셨어요. 만약에 제가 자전거를 타고 갔다면 저 정도 거리에서는 차가 골목에서 나오더라도 충분히 지나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급정거를 했더라도 넘어지지 않았을 것이고요.“ (그는 영암 식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음, 그렇겠네요.”

-“그러니까 이 사고는 ‘운전미숙‘과 ’부정확한 상황판단‘이라고 보입니다. 동의하시겠어요?”

“네~”  라고 말하는 자신이 허황스럽게 느껴졌다.

 

다음 날 새벽, 다시 병동 뒷쪽으로 나가서 월출산을 바라보며 걷고 있는데, 이번에 일어난 사고 당시의 장면이 슬로 모션으로 떠올랐다. 구림천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는데 오른 쪽에서 승용차가 나왔을 때 나는 깜짝 놀랐고, 접촉사고를 피하기 위하여 급정거를 하다가 넘어졌다. 그런데 왜 CCTV에는 다르게 찍혔을까?

2년 전인 2019년 12월에 LA 부근에서 내가 항상 다니던 24 Fistness (450 N Brand Blvd, Glendale, CA) 에 운동하러 가기 위하여 파란 불에서 길을 건너고 있는데 별안간 오른 쪽에서 승용차 한대가 빨간 불을 무시하고 직진을 해 와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나를 넘어뜨렸다. 내 오른쪽에서 내 손이 차의 앞부분에 닿는 거리에 와서 급정거를 했을 때 나는 내동댕이 치듯 넘어졌고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응급차가 와 있었고, 구급의료대원 두 명이 내 곁에 있었다. 사고 당시 횡단보도를 같이 건너던 사람들이 재빠르게 911에 전화를 걸었고. 뺑소니치고 있는 상대 차를 사진 찍어서 경찰에게 보내 주어 즉시 추격하여 잡았다.

이번에 일어난 사고는 지난번 사고 때 받은 트라우마가 몸세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가 이번 사고도 전에 일어난 사고와 같은 상황이라고 착각하게 만들면서 ‘부정확한 상황판단’을 하게 한 것이다. 12미터 떨어진 거리에서는 여유있게 일단 정지하거나 또는 무리하지 않고 직진할 수 있는 거리었는데 차가 바로 앞에 와있는 것 같은 환각작용이 일어나며 놀라서 넘어진 것이다. 경악스러운 부분은 그 성실한 조사관이 시골길에 설치된 CCTV를 찾아내서 차분하고 공손하게 내가 넘어진 장면을 모니터에서 보여줄 때까지 나는 이번 사고는 절대적으로 상대 운전자 탓이고 나는 피해자라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의 절정은 영암경찰서의 담당 수사관이 보여준 모범적인 자세였다. 시골 길에서 일어난 교통사고 조사에 착수하여 “잘못은 상대 운전자”라고 단호하게 주장하는 칠십대 여성에게 온전성의 화신으로 다가 와서 감화-감동 시킨 최형석 경찰은 영암의 보물, 한국의 보물로 상정할만 한 인물이라고 느껴졌다. 작년 5월에 미국의 흑인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를 땅에 엎드리게 해놓고 무릎으로 9분29초 동안 목을 눌러 질식시켜 죽게 한 백인 경찰 데릭 셔빈(Derek Chauvin)과 확실히 크게 비교되는 경찰관의 모습이다.

병원 로비에서 이동용 프린터를 바닥에 놓고 진술서를 프린트 하는 최형석 조사관 (출처: 글쓴이)
병원 로비에서 이동용 프린터를 바닥에 놓고 진술서를 프린트 하는 최형석 조사관 (출처: 글쓴이)

 

~ 편집 : 허익배 편집위원

김반아 주주통신원  vanakim7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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