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옥 (1924~)

“우리 막둥이 선자, 큰놈은 진순이, 둘째는 윤옥이” 
어르신께 며느리들 이름을 물었더니 이제 며느리는 없고 딸만 남았다고 하시며 한 분 한 분 불러내셨다. 청산면 끄트머리 예쁜 이층집, 키 작은 잔디들이 정갈하게 터를 잡고 앉았다. 어르신 막내아들 이름의 문패가 걸렸지만 주말이면 어르신의 호위무사들이 녹음이 드리워진 뜰에 줄지어 차를 댄다. 어르신은 깊은 세월, 70년을 아내와 둘이 걸었다. 두 손 잡고 작은 소롯길을 지나서 자녀분들과 같이 신작로까지 뚜벅뚜벅 걸어 나오셨다. 한때는 드넓은 바다 위를 헤엄치는 부레 없는 상어처럼 고단하기만 한 시절의 올가미에 갇혀 허우적거린 때도 있으셨다. 지금의 평안을 사모님께 모두 돌리신 어르신, 기개가 남다르셨던 ‘백수를 목전에 둔 사나이’의 무용담은 거침없었다.

 

■ 열네 살, 겁 없는 무용담(관부연락선을 타다) 

칠흑 같은 어둠 저 멀리서 깜박거리는 히로시마항의 불빛이 보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열네 살 까까머리의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전북 부안 촌놈이 신태인역을 출발해서 부산항에 당도, 관부연락선을 타고 드디어 일본에 도착했다. 1924년생인 내가 열네 살 되든 해 어머니에게 일본에 가야겠다는 겁 없는 통보를 했다. 호시절이라도 허락할 부모가 없을 텐데 일제강점기하의 엄혹한 여건에서 어머니는 그 말을 들으시고 내 손바닥에 100원짜리를 얹어주셨다. 내 손가락을 접어 100원짜리를 꼭 쥐게 하시면서 입을 떼셨다. “잘 다녀오너라.” 

어머니는 큰 숨을 들이켜며 애써 마음을 추스르셨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는 어머니께서 손에 쥐여 주신 100원짜리를 호주머니에 넣고 무모한 그 길을 떠났다. 집을 떠나던 날, 내 등에 꽂힌 어머니의 걱정 어린 눈빛을 애써 외면하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일제강점기하에서는 운신의 폭이 작았다. 도항 증명을 내야 배를 태워주었다. 내가 일본에 가기 위해서 넘어야 할 첫 번째 장애물이었다. 도항 증명은 군내 경찰서장이 발행해주거나 동청회사에서 발행해주었다. 사촌 형님이 동청회사를 다녔다. 동청회사는 농촌을 착취하는 회사였지만 그 시절을 살던 많은 사람이 양심대로 살아가기에는 우리 삶의 여건이 너무 척박했다. 사촌 형님도 어쩔 수 없이 호구지책으로 그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나는 덕분에 도항 증명을 받아냈다. 

“형님, 일본 갈랑께 도항 증명 하나 내주시오”

“뭔 소리냐 간도 큰 놈이네, 증명은 내주는데 반드시 살아 돌아오니라.”

쥐방울만 한 녀석이 가방 하나 짊어지고 집을 떠나 3일 만에 일본 히로시마에 도착했다. 구겨진 종이를 펴고 사촌 형님 주소를 읽어 내려갔다. 물어물어 형님 집에 도착했다. 형님이 나를 보자마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3일 동안 완행열차, 덜컹거리는 버스, 3등 칸에 겨우 몸을 기대는 허접한 배를 갈아타면서 일본에 도착한 시골 촌놈의 꾀죄죄한 얼굴은 또 얼마나 가관이었을까.

“병옥아 어찌 된 거냐”

“일본에서 학교 다니고 싶어서 왔습니다.”

형님은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나를 집으로 들였다. 나는 일본 학교에 다니면서 불평등을 신랄하게 맛보았다. 그들이 말하는 조센징이 되어 무차별한 위협에 시달렸지만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하교 후 골목길에서 일본 아이들이 떼로 몰려있으면 당연히 얻어맞기도 했지만, 반드시 한 놈이라도 패주고 잽싸게 도망을 다녔다. 몸이 빠르고 머리가 좋아서 위기의 순간을 잘 모면하면서 1년 가까이 일본에서 잘 버텨냈다. 내가 믿고 갔던 형님이 대학을 동경으로 가면서 나는 히로시마에 혼자 남게 되었다.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다. 3일 걸려서 당도하는 머나먼 그 길을 열네 살의 꼬마가 혼자서 오갔다. 거침없는 그 무용담을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인생에 폭풍우가 몰려올 때는 雄志(웅지)를 품고 관부연락선 3등 칸에서 몸을 도사리던 열네 살의 병옥이를 늘 기억했다. 

중앙대학교 학생증
중앙대학교 학생증


■ 8.15 광복의 기쁨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다시 맞닥뜨린 비극, 6.25

명동 한복판에서 방송이 계속 흘러나왔다. “휴가 장병은 조속히 귀대하라” 1950년 6월 25일, 평화롭던 일요일이었다. 명동으로 책을 사러 나간 길에 느닷없는 방송을 듣고 온몸이 경직됐다. 중앙대학교 2학년 다니다가 6.25사변이 터졌다. 전쟁이 터지고 고향으로 내려오던 그 날 6월 27일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다. 흑석동 집에 이불 보따리며 책들을 후스마(벽장)에 몰아넣고 못질만 한 채 서울과 잠시 이별을 했다. 이미 전쟁의 참상을 맛본 나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우리는 관악산을 넘어 오후 3-4시경에 군포에서 기차를 탔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기차를 타려는 몸부림만으로도 이미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우리는 겨우 기차에 몸을 싣고 대전역에 내렸다. 밤새 주먹만 한 빗줄기가 내렸는지 대전역은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다. 마치 우리 앞날을 예고하듯이 공포와 슬픔을 가득 머금은 대전역은 처연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안심과 우려가 동시에 맞물렸다. 나는 1924년생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몸으로 겪은 나이인데 인생에 몰아쳤던 소용돌이의 괴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중국의 철학자 지셴린의 명문 ‘다 지나간다’를 몸으로 체득했지만 인생은 골목마다 희로애락의 올가미를 걷어내야만 다음 골목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 어머니, 먼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물이 떨어질세라 

어머니를 함축하는 단 한마디, 그리움. 어머니 생각을 하면 먼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한다. 눈동자에 가득 고인 어머니의 얼굴이 눈물방울로 떨어질세라 한참을 올려다본다. 중학교는 고창고보에 갔다. 한 달 한 번씩 머슴이 집에서 쌀가마니를 짊어지고 와서 하숙집 마당에 내려놓았다. 쌀 닷 말이면 한 달 하숙비가 된다. 머슴이 쌀가마니를 싣고 마당에 들어서면 시골 부잣집 아들의 위상도 보이고 자존감도 높아졌다. 쌀가마니 곁의 소담스러운 보자기에는 어머니께서 가지런히 준비해주신 반찬들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어머니 생각에 울컥했지만 큰 숨 들이마시면서 꾹 참았다. 내가 사는 내내 거친 풍파와 싸우면서도 감정의 소용돌이로 고통받지 않고 잘 헤쳐 나온 건 아마도 넉넉한 집안에서 사랑받으면서 잘 자란 덕분이다. 
 

■ 군대 소집영장, 일제 치하 죽음의 그림자 

고창고보 졸업하고 시골에서 농협 금융조합에서 1년간 근무했다. 금융조합 근무 중에 소집영장이 나왔다. 일제하에 소집영장은 죽음을 바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입대 전용 열차, 아직 얼굴에 솜털이 가시지 않는 스무 살짜리 청년들의 얼굴은 빳빳하게 굳어 마른침만 삼키면서 신태인역을 출발, 대전역에 정차했다. 대전역에서 부산행으로 갈아타느라 한두 시간 여유가 있었다. 군대에 끌려가면 죽음이라는 방정식이 우리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을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에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우당탕 난리가 났다. 12명 중 한 녀석이 나보다 먼저 탈출을 시도했다. 녀석은 바로 잡혀서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일본 놈들은 군홧발로 녀석의 얼굴을 사정없이 짓이기고 있었다. 한바탕 난리를 겪은 후라 군용열차 칸은 무거운 정적만 감돌았다. 군 생활은 말해 무엇 할까. 죽음을 담보로 하는 군대 생활은 하루하루 피가 마르고 밤 점호 시간이면 오늘은 이렇게 목숨을 부지했구나 라며 얕은 신음소리로 하루를 마감했다.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스무 살 청년의 하루는 정체된 시간이었다. 
 

 

■ 젊은 날의 초상, 대전에서 터를 일구다 

중앙대학교 2학년 다니던 중에 전쟁이 나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고 나는 결혼, 그리고 대전으로 터전으로 옮기는 여정의 한가운데 서게 되었다. 26살에 작은어머니가 중신을 섰다. 처가 동네에 작은어머니가 살고 계셨다. 그때의 결혼은 집안의 결혼이지 남녀의 결혼이 아니었다. 나와 안식구는 결혼식 당일 첫 대면을 했다. 아내도 한 고향 사람이었다. 결혼식 날 아내 얼굴을 처음 봤는데 연지곤지 찍고 족두리 쓴 모습을 슬며시 보았다. 아내는 시골 처녀라 수줍어서 고개도 못 들고 발그레한 뺨이 스물여섯 청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결혼 후에 대전으로 올라왔다. 결혼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서 호기심만으로 인생을 살 수 없는 여건에 놓였다. 어느 날 나를 찾아온 이가 있었다.

“이병옥 씨 당신과 일해보고 싶소.”

나는 생면부지의 어떤 이에게 사업 동참을 원하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열네 살에 대한해협을 건넜던 나에게 부안은 작은 동네였다. 학교 교사도, 금융회사 직원도 내 호기심을 채우거나 역량을 발휘하기엔 부족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겁 없이 세상을 바라보았던 호기 넘치는 젊은 날의 자화상이었다. 그렇게 운신의 폭을 넓히고 싶은 시점에 대전에서 제안이 왔다. 올라와서 최00 사장을 만나고 그분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 메리야스 업계를 주름잡았던 백양 메리야스의 사장도 최00 사장에게 면사를 배급받으면서 일을 배운 사장이었다. 메리야스 업계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시는 메리야스 업이 대단한 호황이었다. 그 시기에 나를 지목해서 찾아온 것도 사실 고마운 일이었다. 그 최00 사장이 자본 여유가 있어서 메리야스 업 외에 제지공장을 만들었다. 사업수완이 좋은 최 사장의 생각에 제지 시장이 호황의 시대를 맞을 것이라는 예견을 한 것이다.

올해는 결혼 70주년
올해는 결혼 70주년


■ 대전 제지업계의 효시, ‘보문제지’의 총괄 책임자 

일본 강점기에 종이를 만들었던 기술자나 회사들이 해방 후에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우리나라에는 실질적으로 제지를 만들 만한 환경을 새롭게 다져야 할 때였다. 그래서 자본가들이 제지공장에 관심 두게 되었다. 대전 동구 삼성동 보문고등학교 근처에 공장용지를 마련하게 돼서 이름도 보문제지가 되었다. 나는 보문제지의 총괄 책임자가 되었다. 제지 사업 자체 이익이 없어서 아예 전문 화장지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화장지 원료는 펄프를 써야 하지만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다시 펄프 대용 생산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원료를 보니 삼베를 쓰면 될 거 같아서 전국의 엿 장사를 모았다. 그들에게 삼베를 걷어오게 했다. 당시만 해도 삼베로 옷을 해 입거나 집안 용품들을 사용하던 때라 낡아서 버려진 것들을 다 수집하기 시작했다. 낡은 삼베를 갈고 한지를 망치로 쳐서 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너무나 원시적인 방법이었지만 전문지식을 갖춘 기술자가 없으니 그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공식 없이 해답을 도출해내고 있었다. 

1970년대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산업화의 물결을 타면서 모든 산업이 호황의 국면에 들어섰는데 화장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우리는 기술이 부족하다 보니 이미 만들어진 화장지를 연구하면서 후발 주자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당시 그레이하운드라는 고속버스에는 화장지가 비치되어 있었다. 그 버스에 비치된 화장지를 몰래 가져와서 이리 찢고 저리 찢어보면서 테스트를 하기도 했다. 당시는 고속버스 안내양이 있어서 몰래 가져나오면서 ‘도둑이 제 발 저리다’ 고 안내양 눈치까지 흘끔 보면서 추억이라고 말하기엔 참 어설픈 현장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화장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1960년대 보문제지에서 화장지를 생산했다. 신제품이 나올 때는 공장이 떠나갈 듯이 탄성을 지르고 어깨를 겯고 같이 춤을 추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 과정은 결과물이 주는 보상 그 이상으로 우리를 살맛 나게 한다.

젊은 시절의 나는 내가 만든 삶의 방정식대로 운행이 안 되면 타협을 거부하던 때라 태평양제지 상무이사까지 하고 경영의 일선에서는 물러났다. 호기심 많고 영민했던 까닭에 사업제안도 많이 들어오고 관심의 영역도 많았지만 젊은 날의 좌충우돌을 겪은 뒤에는 화장지 총판을 하면서 무리수를 두지 않은 채 70살 정도까지 경제활동을 했다. 호기심 많은 나를 만나 아내도 혼돈의 시간을 속울음 삼키며 잘 참아냈을 것을 안다. 우리 4남매도 아내의 손길로, 우리 부부가 90이 넘도록 해로하는데 든든한 우산이 되어주고 있다.
 
■ 마르코(세례명)의 노년 

엊그제 코로나 백신 주사를 맞았다. 살면서 기막힌 일들을 수없이 경험했지만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까지 마스크를 쓰고 명절에 부모님을 찾지 않는 것이 효도라는 웃어넘길 수 없는 말들이 허공을 떠다니고 있다. 결국 우리가 파놓은 함정에 우리가 빠졌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의 이기심과 도덕적 해이가 오늘의 이 사달을 불러일으켰다는 생각에는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이제 손을 뻗치면 바로 만져지는 아내의 손, 내일모레 백 살이 되는 남자 곁을 아내가 지켜준다. 나만큼 행복한 남자가 몇이나 있을까. 다 우리 각시, 순자 덕분이다. 우리 부부는 70년 묵은 連理枝(연리지)다. 늙은이가 아닌 ‘어른’으로 사는 힘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반쪽짜리, 아내가 곁을 내주어야 비로소 우리가 된다.

오늘 점심도 아내가 끓여주는 된장찌개를 먹고 창가로 찾아드는 햇살을 따라 졸음을 청하고 싶다. 졸음을 타고, 멀리 와 버린 내 고향 부안으로 가보자. 꿈결의 끝에서 그리운 이들을 만나고 싶다. 아, 어머니. 작은 사내아이 병옥이가 되어 어머니 품에 안겨보는 그 꿈을 꾸고 싶다. 달그락거리는 아내의 설거지 소리를 듣고 낮잠을 물린다. 무릎을 ‘탁’치며 혼자 읊조리겠지.

‘아, 여기까지 정말 잘 왔구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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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희 작가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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