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읍 금장로 김영승 1949년

결국, 그 남자의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어머니’ 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이는 사장님,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낸 이심전심이었을까 나도 덩달아 눈물짓고 말았다. 사장님은 오래전 먼 길 떠나신 어머니를 가슴속으로 다시 모셨고 나는 3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마음으로 모셔서 조우했다. 두 분 어머니의 삶은 달랐겠지만 ‘자식을 위해서 헌신하신 어머니’라는 공통분모가 생면부지의 두 사람을 같은 이유로 흐느끼게 했다.

우리는 우리 삶의 경험치 속에서 어머니와의 기억만 불러와도 인생의 8할을 이야기할 수 있다. 울음을 들이키는 데 한동안의 울먹임이 있었고 선생님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삼양국민학교 날쌘돌이였던 기억의 끈을 붙잡고 오래전 추억을 불러 오셨다.

■ 옥천 날쌘돌이 영승이

군대생활 할 때와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를 제외하고 옥천군 외 다른 곳에 주소를 둔 적이 없었다. 나는 삼양국민학교 다닐 때 육상선수였다. 육상선수의 자격으로 청주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선수로의 포부도 있었지만 운동선수로서의 인연이 끝까지 닿지 않아 학창시절 날쌘돌이라는 추억만 남기고 아련한 기억으로 마음 한편에 묻었다. 선수시절에는 100미터 200미터 단거리 종목을 석권했는데 중학교 때 12.6초의 기록을 냈다. 당시 시골학교에서는 전국체전에 나갈 수 있는 기록이었다. 

국민학교 5학년때 읍대항 우승
국민학교 5학년때 읍대항 우승

중학교 때 청주 가서 12.6초를 기록하고 상 받아 왔던 흔적이 학교 어딘가에 남아있다. 1965년 당시는 옥천에서는 우쭐할만한 기록이었지만 잘 달린다고 한들 시골에서나 알아주는 기록이었고 더 이상 넓은 세상에 나가 포부를 펼치기에는 지역적인 한계와 버팀목이 돼 줄 환경의 부재가 나를 안타깝게 했다. 유년시절 나룰 둘러싼 환경은 열악했지만 그 시절 달리기는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 뜀박질할 때는 배고픔도 있고 시골소년의 질풍노도 같던 사춘기 열병도 잠재웠다.

청주고등학교 육상선수
청주고등학교 육상선수

육상선수일 때는 새벽에 일어나서 뛰고 산에 가서 훈련을 받았다. 관성산 훈련장에서 도립대를 거쳐 수북리까지 한달음에 뛰어 다녔다. 돌도 씹어 먹을 수 있는 중학교 때 달리기 연습 마치고 오면 배가 홀쭉해져서 어머니께서 홍두깨로 밀어 칼국수를 만들어주셨다. 홍두깨로 밀어주는 쫄깃한 칼국수만큼 시골에서 뜀박질하는 열다섯 살 소년의 혀를 사로잡는 맛도 없었다. 뜨거운 국수 가락을 입천장을 데어가며 후루룩 불면서 먹고 있으면 어머니는 지그시 바라보고 계셨다. 자식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른 어머니의 심정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 한 대접 먹고 뒤돌아서면 배가 꺼지던 나이라 내 배만 채우고 어머니 배고픈 건 헤아리지 못하는 철딱서니 없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내 대접에 칼국수를 수북이 얹어주시느라 당신은 굶고 계셨다. 아, 그땐 왜 몰랐을까. 철이 없었다는 말로 불효를 면피할 수 없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선수로 뽑혀서 날쌘돌이 소리를 들었다. 리대항 군대항 경기에서 우승하면서 옥천에서 달리기 잘한다고 소문나더니 우연인지 필연인지 운동화 신고 발 빠르게 달린 추억을 뒤로하고 신발가게를 50년 이상 하고 있다. 신발가게를 시작할 때는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문득 생각해보니 아버님이 시장에서 고무신을 팔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무심코 흐르는 핏줄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의 힘이 있다.

■ 고운신, ‘제발 구두 좀 사가세요’

1972년도부터 신발가게를 시작했다. 지금 우리 가게 자리에 페인트 가게 하던 후배가 가게를 놓고 나갔는데 그 후로 50년 동안 내가 터를 장악하고 있다. 후배는 가게를 떠나면서 “형님 그 집 장사 안돼요” 라는 말을 건넸지만 나는 한 터에서 50년간 신발을 팔고 있다. 내가 수완이 좋다기보다 손님 한 분 한 분께 성심을 다한 결과였다. 교복입고 학교 다니면서 운동화 사러 왔던 여학생이 15년이 지나 아이엄마가 되어 자녀를 데리고 가게를 찾아올 때는 뭉클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고객님이 꼬마 아가씨 손을 잡고 들어와  “아저씨, 저 고등학교 다닐 때 여기서 신발 샀어요. 아직까지 계시네요” 라고 한마디 해주면 그것으로 또 그날은 ‘그래 잘 살고 있구나’ 라고 위로한다.

장사는 희로애락의 현장이다.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를 판다. 늘 좋을 수만은 없어 어떤 날은 손님이 들어와서 이 신발 저 신발 수십 켤레를 신어보고 마음에 드는 신발이 없는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뒤돌아 나가면 속에서 부챗살이 올라오지만 그 또한 참아야 하느니라. 켜켜이 쌓여있는 신발들, 아마도 만 켤레는 되지 않을까 짐작한다. 50년 전부터 사고팔며 남은 신발들과 지금 손님을 기다리는 신발이다.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때만 해도 신발은 소비성이 있었다. 지금처럼 다양하게 사람들을 유혹하는 물건들이 많이 없다보니 신발도 패션의 중심이었고 유행의 선도에 설수 있었다. 당시 이웃으로 점포를 운영하던 양복점, 양장점, 동아약국, 미술사(간판점포) 등이 있었다. 다른 가게들은 ‘교적비만 남기고 폐교된 학교’처럼 사라지고 나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틈새에 병원이며 약국들 그리고 편의점들이 들어와 다시 이웃이 되었다. 나는 언제까지 점포를 운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부부의 청춘이 고운신에 다 담겼다.

당시 활황을 걷던 기업인 국제기계, 은성실업 여공들이 월급날이면 삼삼오오 모여 신발을 사러 오는 재미에 우리도 그녀들의 월급날을 같이 기다렸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한 아가씨들이 예쁜 구두 사 신으면서 위로하고 고생한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날이었다. 시골이어도 눈에 띄는 멋쟁이 아가씨들이 있었다. 그 아가씨들이 신발을 사면 그 신발이 유행이 되기도 했다. 벌써 그녀들이 70살의 할머니가 되어 손주들을 돌보고 있을 것이다. 20대 청춘을 불사르며 가족을 위해 헌신하던 그녀들도, 우직하게 한길을 걸으면서 한 터에서 신발을 팔던 우리부부도 우리나라의 성장을 위해 헌신하던 산업역군이다.

훈장 받을 만한 대단한 일은 하지 않았지만 무명인이었던 우리는 삶에 치열했고 성실했다. 그것이 우리가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시골에서 신발 장사를 하다 보니 물건을 가져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서울과 대전에서 물건을 떼 왔고 대전 중앙시장, 서울 동대문시장을 다녔다. 옥천역에서 기차타고 저녁 11시 밤 열차에 올라 새벽에 서울역에 내려 동대문시장을 한 바퀴 돌고 무박으로 다시 옥천으로 돌아왔다. 졸린 눈을 비벼가면서 기차에 오르면 참았던 졸음이 쏟아지고 간간이 옥천을 그냥 지나칠세라 벌떡 잠이 깨서 부리나케 내린 적이 수없이 많다. 신발을 한 포대 가득 싣고 다시 진열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요즘이야 배송절차가 간편해지면서 발품은 덜 팔지만 중국에서 무방비로 들어오는 싼 신발들이 또 우리 같은 영세사업장을 공격하고 있다. 언제 한번 편하게 장사해보려나 하지만 그런 세상은 쉽게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공짜도 없으며 발품과 땀방울을 흘리지 않는 일들은 결과도 오래가지 않는다. 땀 흘린 결과물의 진가를 장사를 통해서도 알게 됐다.

매장사진
매장사진

■ 50년 노포, 옥천의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다

아내와는 이웃 점포의 점주로 처음 만났다. 오빠와 잡화점포를 하던 아내와는 부지불식간에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렇게 이웃으로 서서히 정담을 나누면서 결혼까지 골인했다.

또순이 기질이 있던 아내가 어느 틈에 내 눈에, 그리고 마음에 들어왔고 아내도 싫지 않았는지 내가 건네는 눈빛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운신은 우리 가족의 생계이기도 했고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게 해준 사랑의 공간이었다. 

작은 신발가게는 미래가 보이지도 않았고, 아이를 키우며 신발가게만 하다가 평생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아내는 묵묵히 내조해줬다. 살림이며 장사며 야무지게 잘 해냈다. 우리는 신발가게 하면서도 자식을 해외로 유학까지 보내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시골에서 유학 보내는 일은 사력을 다하는 것 외에도 우리 삶의 일부를 저당 잡히는 과정이 필요했다. 부모로서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헌신을 돌이켜보며 죄스러움에 흐느끼기도 했다.

50년 신발가게 하면서 아이들도 성장하고 우리도 같이 농익어 갔다. 탱탱하던 아내의 얼굴에 주름이 늘었지만 그건 세월이 녹아든 나이테라 우리 신발 사이즈는 그대로지만 우리는 더 넓은 가슴을 갖게 됐고 이해의 골도 깊어졌다. ‘제발 구두 좀 사가세요’ 라던 외침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단골들이 즐비하고 ‘제발 구두 좀 사가세요’ 라는 초창기 간판은 너무 속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간판이라 철면피를 각오해야 했다. 당연히 넘어야 할 과정이었다.

앉아서 오는 손님만 받기에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다. ‘제발 구두 좀 사가세요’ 라는 말이라도 해야 했다. 원래 우리 가게의 이름인 고운신이 무색했다. 그 호기어린 이름은 내 의지의 표명이었다.

신발가게를 하면서도 아이들 유학 보내고 친구 부부들과 같이 여행도 많이 다녔다. 시골살이였지만 열심히 장사하고 돈도 벌고 여행도 많이 다니면서 남들 사는 것처럼 살아보았다. 일흔이 넘은 나에게도 아내와 함께 건강하게 가게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고 아직 사장님으로 불리는 건 자존감을 북돋아주는 일이다.

고운신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내 평생을 다 바친 고운신의 주인으로 흠결 없는 여정을 남기고 싶다. 

맞은편 ‘희망약국’이름처럼 우리 가게도 ‘고운신’을 선물하는 옥천의 명소가 된들 부끄럽지 않다. 50년간 정직했고 게으르지 않았다. 

“고운신 김 사장, 참 성실한 사람이었어” 라고 기억되면 족하고 또 족하다. 추억 속의 명절처럼 새신으로 명절 단장을 하는 날이 사라지고 있다. 코로나로 추석에 가족이 모이는 것조차 두려운 이 시국이 빨리 기억 속의 한 장면이 되기를 바란다. 맞은편 ‘희망약국’의 이름이 오늘따라 더 크게 시야에 들어온다. ‘희망’ 이라는 마음속의 바람 때문일까!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 관련 기사  :  http://www.okcheon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542

편집 : 김미경 부에디터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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