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충남 예산을 떠나 옥천에 터를 잡고 52년을 보내기까지. 그 모든 시간은 건축사가 되기 위함이었다. 지금 그는 건축물의 설계와 공사감리를 한다. 중학생 시절 그의 손재주를 알아본 은사님의 추천으로 입학한 대전공업고등학교의 건축과. 그곳에서 건축학도의 기반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군 제대 후 사회경험을 쌓고 옥천읍에 강계식건축사무소와 가족의 터를 잡기까지 돌아보니 80년이 훌쩍 지나있다. “이건 고등학교 때부터 쓰던 제도판이야. 오래되었지만 아직까지 쓰고있지.” 그의 건축사무소에서 강계식(81,읍 문정리)소장을 만났다.

■ 어린 시절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에서 태어났지. 바로 아랫동네인 덕산면 사동리에 우리 할아버지가 무너져가는 집을 샀어. 4살 때 그 동네로 이사 가고 5살 땐 그 집을 허물고 새로 지었지. 거기 사는 동안 6·25전쟁이 나고 9살 때 덕산국민학교에 입학했어.”

가야산 줄기 밑에 자리 잡은 고향 집. 산 밑자락 동네에 50명이 모여 살았다. “덕산온천이 유명하고 옆에 윤봉길의사 생가가 있었어. 그 당시 인민군들의 지시에 따라 학교 갈 때 여럿이 모여서 걸어갔어. 인민군들이 학교에 와서 감독도 했지.”

1942년 2월 20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강계식씨가 여덟살이 되었을 때 6.25를 맞았다. 국민학교 2학년 때였다. 

“인민군들이 장악하고, 대구까지 감시를 넓히던 때였지. 부모님은 대구로 피난가고, 할머니랑 나는 이 집을 지키려 살았어. 국민학교 5학년 때 6.25가 끝났어. 인천상륙작전하면서 휴전됐거든. 그래서 이 동네에서 초등학교 졸업하고 덕산중학교에 입학했지.”

동네에서 야간전투도 일어났다. 집 앞마당에 굴러다니던 실탄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다. “할머니랑 사는데 하루는 거기서 전쟁이 났지. 위험하니까 내려와야한다고 다들 그러더라고. 그래서 면 소재지로 밤 중에 내려왔어. 이틀간 피신해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땐 우리 동네가 쑥대밭이 되어있었지.”

초등학교 졸업 후 고덕면 구만리로 이사 갔다. 입학한 덕산중학교는 집에서 4km 떨어져있었다. 4km가 그의 등굣길이었다. “새벽 6시께 일어나 밥먹고 학교까지 걸어갔지. 전에 살던 집은 학교에서 가까웠지만 농토가 없었어. 농사를 지어야 먹고사는데 이사 간 곳은 평야지대라 논도 많고 예당저수지도 있으니 훨씬 좋은 곳이었지. 그곳에서 아버지가 쌀농사를 지으셨어. 그전엔 진남포에 있는 철제공장에서 일본사람들이랑 같이 일하셨었지.”

당시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많이 없었단다. 중학교 졸업 후 집안일을 돕거나 농사 일손을 거들었다. 워낙 시골이라 공장도 없었던 그의 동네. “시골이라 아무것도 없었어. 우리 아버지(강동옥)께서 고등학교는 꼭 나오라고 말씀하셨지. 그래서 선생님한테 물어봤어. 내 실력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냐. 그때 고등학교는 시험보고 합격해야 들어갈 수 있었거든.”

그가 살던 지역 근처에도 고등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농업에 꿈이 없었기에 지역을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고등학교가 예산과 당진에 각각 하나씩 있었는데 가고 싶지 않았어. 농업기술학교였거든. 당진엔 인문고가 있었는데 거긴 졸업해도 나중에 먹고살 걱정이 더 컸지. 그땐 대학교라는 건 꿈도 못 꿀 때였어. 교육비와 하숙비를 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학교를 가는데 다들 어려운 때였으니까. 그래서 덕산중에서 4명이 선생님 추천으로 대전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지.” 

대전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다니던 강계식씨

대전공업고등학교에는 총 6개의 학과가 있었다. 기계과, 전기과, 건축과, 토목과, 방직과, 광산과. 그 중 강계식씨는 건축과를 지망했다. 

어린나이에 건축학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그의 속내는 어땠을까. “공부만 잘하면 먹고살 걱정 없는 과라고 생각했어. 여기서 부유한 사람은 대학교까지 가는 거지. 중학생 때 은사님이 날 보더니 건축에 소질이 있다고 하셨어. 공작하는 걸 보기도 했고 미술은 항상 100점 받았으니 날 추천하셨던 거야. 운이 좋게도 같은 반에 있는 친구랑 건축과에 같이 합격했어. 석동혁이라고 초중고를 같이 나온 친구였는데 서로 엄청 좋아했지. 지금은 연락이 안 되지만 그 친구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공무원이 됐지.”

당시 인기가 많았던 건축과, 기계과. 전기과. 토목과 중 건축과를 희망했던 강계식씨.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까 걱정이 크던 그때, 은사님은 네 실력이면 될 거라며 아낌없는 격려의 말을 전했다. 덕분에 그는 3.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하지만 기쁜 합격 소식도 잠시, 고향 떠나 타지살이하려니 현실적인 부분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충남 예산을 떠나 대전에 살려니 하숙집을 구해야했어. 근데 운이 좋게도 고향 사람 중에 대전공업고등학교에 근무하는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 집에 세들어 살았지. 그분은 우리 아버지와 친구였어. 공업학교의 기계를 관리하셨지. 그분 덕에 하숙비로 달마다 쌀 한포대를 내며 학교를 다닐 수 있었지”

■ 건축학도의 길에 들어서다

건축에 열망을 갖고 공부하던 어린 시절. 40일가량 되는 짧은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은 현장실습으로 바빴다. 실습지에서 현장을 몸소 느끼기 전 고등학교에 막 입학한 그는 기초부터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가구를 짜기 위한 목공부터 배웠어. 교실에 기계가 엄청 많았어. 미국에서 협조해 가져다준 기계부터 나무 표면을 매끄럽게 깎는 대패, 자르는 기계, 구멍 뚫는 기계까지. 2학년 때부터 설계를 배웠어. 건축설계도면 그리는 데 쓰던 제도판을 여기 사무실에서 아직도 쓰고 있어. 제도판 위에 종이를 깔아두고 건축설계하는  데 사용하거든. 이런 걸 3학년 때까지 배웠어.”

교내에서 배운 지식이 쌓여 지금의 그를 만들었지만 고등학생 당시 기억에 남는 일은 학교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4·19혁명 당시 대전에서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동참했던 게 기억이 남아. 고등학교 2학년 그땐 학교에서 학생들이 쏟아져나와 독재에 항거했지. 서산교육청 근무할 적에도 군대식으로 근무했어. 그땐 재건복이라고해서 국가에서 일률적으로 지정한 복장을 입어야  했지. 바깥에 나가서 식사도 못해 도시락을 꼭 싸 다녀야했어.”

고등학교를 다니며 배운 지식을 실전에 응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여름방학에는 충남당진교육청, 겨울방학은 충남서산교육청에서 실습했다. 그는 많은 걸 배우고 얻었다. “공업고에서 교육청의 영선과와 연계해 방학동안 실습할 수 있게 해줬어. 그곳에서 건축설계도면 그리는 일을 했지. 교육청이니 주로 학교설계를 하거든. 특히 충남서산교육청에서 영선과 서대석 계장님으로부터 설계를 많이 배웠어.” 겨울방학이 끝나가던 때 서대식 계장의 제안이 들어왔다. 

“대학교 갈 생각이 없으면 같이 공부하자고 먼저 말씀해주셨지. 그래서 방학이 끝나고도 교육청에서 계속 근무할 수 있었어. 고등학교 졸업도 졸업장만 받았지. 근데 정규직이 아니라 임시직이었어. 그때가 20살, 1961년 5.16 군사정변 때였지. 군대를 꼭 다녀와서 시험에 합격해야 공무원이 될 수 있었어. 2년 뒤인 1963년 입영통지서를 받고 퇴직했어.”

꿈꾸던 사무소를 차리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대구 영천에 있는 헌병학교에 발령받았다. “공업학교를 나와서 공병이나 운전병, 취사병이 될 줄 알았어. 공부 잘했거나 대학교 나온 애들은 행정병으로 많이 가더라고. 난 헌병학교에서 범죄, 수사, 교통, 경호 공부를 했지. 헌병은 사회에서 경찰이나 마찬가지야. 행사할 때 교통정리도 했어.”

헌병학교에서 두 달을 보내고 졸업한 뒤 춘천 전방부대에 발령받았다. “키, 몸무게 같은 신체 요건 등을 보고서 선발하는데 거기서 추천받아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1헌병대대 5중대에서 근무했어. 2년6개월을 거기서 근무했어. 부대 안에 죄수들 관리하는 감옥이 있어서 죄수 지키는 일하는 사람도 있었어. 거기서 자기 소질에 맞는 걸 하는거야” 그는 1군사령관 숙소에서 경비 일을 했다, 2년6개월이 지나 육군제대를 하며 표창장까지 받은 게 1965년 11월. 24살 때의 일이었다.

제대 후 찾아간 공업학교. 그곳에서 은사님은 그에게 물었다. “공무원 시험 볼지 아니면 사회로 나가서 근무할지 물어보셨어. 그때가 군사정권이라 공무원 된다면 힘들 거라고 조언해주셨지. 사회로 나와 취직해보라며 명함 하나 써주셨어.”

추천받은 곳은 충북 영동 박오균건축설계사무소. 낯선 타지로 넘어가 홀로서기 해야 했던 입사일 1965년 12월1일. 강계식씨는 출근지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나랑 같이 공업학교 다녔던 동창이 있더라고. 내가 제대하면 연결해달라고 선생님께 부탁했대. 그 친구 형이 소장이어서 하숙집도 구해주셨어. 거기서 6년을 근무했지.”

한 반에서 같이 수업을 들었던 60명 중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 친구였던 박오균씨. 학창시절, 주말엔 함께 극장도 놀러도 다니고 여름방학엔 계룡산으로 절 구경하러 다녔단다.

“나중엔 사무소가 설계뿐 아니라 건설회사까지 설립했어. 난 설계사무소에서 일하며 건설회사에 나가 공사감리(공사가 설계도대로 실시되는지 확인하는 행위)도 했지.”

강계식씨는 영동사무소에서 일하며 보은, 영동, 옥천까지 3개 군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영동에 건축설계사무소가 딱 2개 있었거든. 박오균건축설계사무소 이름으로 내가 다 설계하고 주문받았었지. 의뢰인들이 집 지을 때 이렇게 허가 내달라고 주문하면 접수하고 설계하고. 그렇게 3군의 건축허가설계감리 일을 하느라 바쁘게 보냈지.”

입사 후 퇴사를 결심하기까지 6년이 지났고 그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건축설계사무소를 개업했다. “1965년 10월 대한건축사협회가 설립되면서 건축사제도가 생겼거든. 건축사면허를 따면 자기가 사무소를 개설할 수 있게 된 거야.” 

1급과 2급으로 나뉜 건축사면허. 대학을 나오지 않아 1급 건축사 시험 자격이 없던 그는 2급 건축사 시험에 도전했다. 1971년 8월6일 면허 취득하고 9월16일 옥천으로 올라와 금구리에 설계사무소를 개업했다.

■ 옥천에 터를 잡고 정을 붙이다

“지금 사무소 자리인 삼양리로 옮긴 건 3년 뒤의 일이지. 처음 개업했을 땐 기뻤지만 걱정이 컸어. 업무가 많이 들어와서 생활에 지장이 없어야 할 텐데하고 고민이 컸지. 당시만 해도 영동보다 옥천이 낙후지역이었어. 대전에서 더 가까웠음에도 시골동네였지. 건축업무를 통해 옥천이 충북 남부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발전시켜야겠다 싶어서 여기 온 거야. 대전이나 서울로 가도 되지만 가까이 있는 농촌지역 발전에 관심이 컸지.”

금구리 개업 후 번 돈으로 옛날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가족의 보금자리를 틀었다. “지금 사는 집도 직접 설계해서 지은 거야. 동네가 다 공동묘지였거든. 전부 산이었는데 다른 사람이 개발해둔 땅에 내가 설계하고 허가를 내서 지금 동네가 이루어졌어, 거기서 이제 나도 집 한 채 지어서 74년도부터 쭉 살아온 거지”

그렇게 옥천에서 보낸 세월만 50년. 옥천은 이제 그에게 고향이나 다름없다.

충남서산교육청에서 근무한지 1년8개월쯤 된 23살. 고향 예산에서 신금자(80)씨와 결혼했다. “같은 마을에서 살던 친구였어. 국민학교는 달라도 거기가 외할머니네 동네였기에 어렸을 때부터 자주 보던 친구였지. 중학생 때 숨바꼭질도 하고 놀았었어. 그 친구랑 결혼한 거야.” 결혼 후 10년 지난 33살 겨울에 득남했다.

“영동에 있을 때 2남이 더 태어났어. 강종수(61), 강병수(55), 강봉수(52)까지 삼형제가 태어났지. 같이 옥천으로 이사와 지금까지 살았어. 일단 옥천이 타향객지잖아. 살아본 적이 없어서 염려가 많았지.” 옥천 와서 각종 단체에도 가입했다.

“옥천청년회의소에 가입해서 선후배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어. 누가 집을 짓는다는 정보제공도 받았지. 40세가 되면서 JC특우회에 갔어. 거기서 회장도 했지. 특우회는 사회봉사단체야. 지역사회 행사 활동보조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도 했어. 우리 사무실에서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곤 했어. 부모 없는 아이들을 달마다 현금으로 보조해주고 연탄을 구입해서 파출소에 기부도 했지. ‘소도시가꾸기’라는 군에서 진행한 도시정비사업도 했어. 75년도에 우리 사무실에서 설계, 감리를 맡아 도시형성에 기여한 바가 있지.”

1990년에는 옥천선진질서추진위원장도 했다. “청소년 범죄를 관리하는 단체였어. 죄를 지은 사람이 가석방되어 나오면 다시 죄를 짓지 못하게 달마다 한번 만나 상담하고 괜찮은지 확인하는 활동이었지. 범죄를 더이상 저지르지 못하게 선도하는 거야”

다양한 활동을 하며 옥천 주민들과 안면을 트고 이곳에 정을 붙이기 시작했다.

“신금자씨랑 57살 때 해외관광도 갔어. 동남아, 태국, 호주, 중국 등 많이 갔지. 해외 건축물도 구경하고 배우고 왔어. 가장 인상깊었던 건 호주 시드니에서 본 건축물이었어”

고등학생 시절부터 좋아하던 운동. 그중에서도 육상과 축구를 유독 좋아했다. 

“학교행사 마라톤선수로 나가고 군대에서 육상선수로 나가기도 했지. 옥천 와서 조기축구회랑 등산클럽에 가입해 10년간 전국에 산이란 산은 다 다니곤 했지. 지금은 아침에 걷기 운동을 하고있어. 학교 운동장과 공설운동장, 마을 한 바퀴를 돌고 운동을 조금이라도 하고 있어.”

어느덧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강계식씨의 목표는 베풀며 사는 것과 건강을 지키는 것. 80살이 되던 해에 운전면허를 자진 반납했다. 몇 년 전엔 위 종양 제거 수술도 했다. “그걸 놔두면 암이나 큰 병이 될 수 있으니 제거했지. 2년 전부터 호흡기 종양 치료하고 있어. 이제 다 나아서 괜찮고 정기적인 검사를 받고있지. 건강에 있어서 큰 문제 없어. 주변에 타개한 사람들도 많아. 친구들이 많이 사라진 게 좀 서운해. 하지만 우리 어머니가 23년생으로 내년에 100세거든. 어머니 닮아 오래 살 것 같아.”

강계식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강계식(81)씨
강계식건축사무소를 운영하는 강계식(81)씨


* 이 기사는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 원본 보기 : http://www.okcheoni.com/news/articleView.html?idxno=11964

편집 : 김미경 편집장 

강지윤 옥천신문 인턴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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