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항리 출신 황찬임씨(1947년~)

집 안뜰에서 환하게 웃어보이고 있는 황찬임씨
집 안뜰에서 환하게 웃어보이고 있는 황찬임씨


■ 뽕나무집 딸, 양잠학교 나와 양잠교사 되다

1947년 읍 마항리에서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옥천이 실을 생산하기로 한창 유명했을 때, 아버지는 뽕나무를 재배하셨다. 가족들이 일하러 가면 동생들을 돌보는 건 내 몫이었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고모와 번갈아가면서 하루는 동생들을 돌보고, 하루는 학교에 갔다. 그러느라 졸업이 조금 늦었나 보다.

9살에 들어간 학교를 16살에 졸업했다. 어렵사리 삼양국민학교(15회)를 졸업했는데, 그땐 월사금을 안 내면 졸업장을 안 주는 시대였다. 고모랑 나랑 아버지를 붙잡고 ‘아이고 아버지’하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는데도 결국 못 받고야 말았다. 여하튼 그때 나는 한문도 잘하고, 서예도 잘하고, 공부도 좀 더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작은 여자를 들이는 바람에 제대로 공부도 못 했다.

대신 졸업한 뒤에 1년 정도 동생들을 돌보고, 뽕밭 매는 일을 도왔다. 그러다 17살에 아버지 말씀 따라 청주 사직동에 있는 양잠(누에를 길러 비단실을 생산하는 농업)학교에 들어갔다. 누에 밥 주고, 깨끗하게 관리하느라 잠도 못 자면서 1년을 꼬박 공부한 끝에 우수로 졸업했다.

양잠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옥천에 돌아와서는 군청 산업계에서 양잠교사로 일했다. 누에는 평생 다섯 잠을 잔다. 네 잠까지는 유충으로 자고, 다섯 번째 마지막 잠을 자고 나면 실을 뽑아낼 수 있는 누에고치를 짓기 시작한다. 그런데 누에가 유충일 때는 개미만 해서 잘 보이지가 않는다.

내가(양잠교사) 젊어서 눈이 좋으니까 누에가 두 잠을 잘 때까지 키워서 좀 보일만 할 때 안남, 안내, 동이면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그 집에 가서 소독도 해주고 그랬다. 그때만 해도 공장 같은 게 없으니까 양잠하는 게 꽤 돈이 됐고, 당연히 내 일도 많았다.

여름이면 날이 더우니까 새벽 시간에 맞춰서 갖다 주고 그랬다. 말도 못 하게 바빴어도 일하면서 돈 벌어다 친정 먹여 살리고 애들 공부 가르치고 할 수 있었으니 보람이 컸다. 그때는 딱히 돈 벌 곳도 없었고, 고구마 농사 지으면 그걸로 죽 끓여먹고 살던 때였다. 

■ 갑작스레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결혼

23살에 결혼하면서 양잠교사 일을 그만뒀다. 그 해엔 큰일이 많았다. 10월 보름에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6월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옛날 일인데도 시간대별로 돌아가시던 날이 다 기억난다. 아버지가 작은 여자 들이고서 엄마가 화병에 걸리셨던 것 같다. 전날 저녁에 먹은 게 체하셨는지 배가 점점 불러오더라.

리어카에 실어서 장내과에 갔는데, 원장님이 엄마 배를 만져보더니 장이 안 움직인다는 거였다. 그 길로 저녁 6시쯤 택시를 타 가지고 대전 도립병원에 갔다. 신발 벗겨진 것도 모른 채로 8시쯤 도착해서 우리 엄마 좀 살려달라고, 수술해달라고 했다. 외국인 의사들이 처음에 장비를 턱, 턱 펼쳐 들었는데, 당장 돈이 없다고 하니 다시 장비를 척, 척 접어 닫더라.

그때는 카드가 있나, 뭐가 있나. 엄마는 몸부림치고 있고, 의사들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는데도 가 버렸다. 그날 새벽 넘어가는 때, 엄마가 마흔셋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다. 우리 5남매 중 내가 스물세 살, 막내 여동생이 여덟 살 먹었을 때였다.

나 시집 보내면서 이불 해준다고 광목천을 떼어다 놓은 채로 돌아가셨으니 정말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 5남매가 다들 잘 큰 게 위로가 된다. 엄마는 아직도 그립고,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지금 우리 엄마가 살아계시면 백수(白壽, 99세)를 맞으셨을 터이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호강도 시켜 드리고,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낌없이 많이 해 드리고 싶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결혼은 예정대로 해 동이면 청마리로 들어가게 됐다. 남편은 위로 누나 셋, 아래로 여동생 하나라 혼자만 아들이었는데, 중학교를 나왔던 데다 첫인상이 악해 보이진 않는 사람이었다. 시집간 시댁에서는 나를 너무 예뻐해주셨다. 나도 나 먹고 입는 그대로 다 해 드리면서 평생 시부모님 속 끓인 일 없었다.

시아버님이 술을 좋아하셨는데, 열심히 만들어놓으면 동네 사람들 다 부르셔서 한달음에 다 드실 때가 있었다. 속이 상하긴 했어도 한 번도 뭐라 말씀드린 적 없었다. 

시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4년, 시어머니는 2년 정도 대소변을 다 받았다. 23살에 결혼한 후 시어머니가 84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34년을 모시면서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다. 애들이 안남초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에서 효부상도 받았다.

그래도 나도 사람인지라, 정말 힘들었던 때가 있기는 했다. 시아버지가 대소변을 못 가리실 때는 시어머니와 같이 모셨다. 그때는 요양원이랄 게 따로 없었는데, 시아버지 기저귀는 다 손으로 빨아야 했다.

사실 그것까지도 괜찮았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바로 또 아프기 시작하셨을 때는 정말 막막했다. 어쩔 수 없이 일회용 기저귀를 쓰고, 고등학생이던 막내딸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은 간호사가 됐다. 3교대로 일하던 때라 일이 저녁에 끝날 때면 ‘친구 만나더라도 조금 빨리 와서 할머니 밥 차려 드려라’했는데, 그러면 막내딸이 늘 ‘엄마, 걱정하지마’라면서 힘이 돼 주었다. 


■ “저 믿고 따라오세요”…여덟 식구 이끌고 읍 이주

시댁은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이렇게 벌어서는 몸은 몸대로 병들고, 4남매 공부도 제대로 못 시키겠다 싶어서 읍으로 나와 1987년도부터 국제기계에 다녔다. 애들 중학교 보낸다고 수몰 토지 보상 받은 걸로 85년도부터 읍에다 집을 구해 두었던 터라 가능한 일이었다.

드릴로 구멍을 뚫으며 센방(선반) 깎는 일을 하다가 시어머니가 편찮으셔서 하는 수 없이 내가 다시 청마리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시어머니가 읍에 나오셔서 아이들을 돌봐주시게 됐다. 그런데 누에든, 고추든 농사는 지을수록 빚만 늘어나는 형세였다. 그래서 아예 다 같이 읍으로 나와서 살자고 가족들을 설득했다.

아버님이 ‘(농사를 안 지으니)너 나 굶어 죽이려고 그러냐’라고 반대하시길래 ‘아버님 어머님 안 굶길 테니까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고 꼭 필요한 것만 갖고 오시라’라고 하면서 용달차에 대충 쓸만한 것들만 갖고 읍으로 나왔다.

동참섬유 다닐 적 동료들과 함께
동참섬유 다닐 적 동료들과 함께


결단하고 여덟 식구를 다 데리고 나온 후엔 동창섬유에서 20년 정도 일했다. 실을 빼서 장갑도 짜고, 옷도 만들고. 3교대라 오전 6시에 나가면 2시에 들어오고, 오후 2시에 나가면 저녁 10시에 들어오고, 저녁 10시에 나가면 새벽 6시에 들어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힘들긴 했어도 죽어라 일을 하고, 남편도 사료 배달하는 일을 하면서 같이 버니 돈이 좀 덜 필요해지더라.

열심히 번 돈으로 아이들 장가보내고 시집보낼 때가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다. 방 얻을 돈이 없어 서울 의정부 이모네서 지내며 대학교를 다니던 큰아들이 졸업도 하기 전에 취직이 됐다. 군인일 때 연애하던 지금 큰며느리랑도 졸업 전에 결혼을 했는데, 그때 애들이 돈이 어디 있었겠나.

소 팔아다가 전세이긴 해도 집 얻어주고, 결혼식도 다 치러줬다. 그렇게 내가 낳은 새끼들 잘 키우고, 짝도 잘 맞춰줬다. 잘 커 준 애들에게 고맙고, 열심이었던 나도 참 장했다.

큰딸의 결혼식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큰딸의 결혼식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늘 최선을 다했음에도 못내 미안함이 남는 건, 큰 딸애다. 딸애가 고등학교 진학할 무렵에 큰아들이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셋째 남동생이 바투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랬더니 딸애가 고등학교에 못 가겠다고 하더라.

엄마가 밤잠 못 자며 3교대로 회사 다니는데 비싼 월사금을 어떻게 감당하겠냐고. ‘엄마, 나 산업체로 갈래요’ 그랬다. 논산에 있는 방직공장에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 가슴이 너무 아파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벌어서 나온 돈을 저 시집갈 때 쓸 돈으로 모으지는 못하고 엄마한테 다 갖다 줬다.

월급이 나오는 날이면 딸애가 삐삐를 쳤다. 그럼 그때 전화하고 읍에 나가서 돈을 빼서 오는 거다. 그래서 큰딸 결혼할 때는 집터를 팔아서 농협 예식장도 다 빌리고, 시댁에서 ‘해도 너무 많이 해 온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잘 갖춰서 보냈다. 그러고 나니 미안함이 조금은 가시더라. 아이들에겐 늘 고맙다.

지난 2009년 받은 모범노인 표창장. 안방에 걸어두었다.


■ 사람 돌보는 사람으로 사는 낙

가만히 있으면 누구한테 뭐라도 갖다 주고 싶고, 돌봐주고 싶은 게 내 성정이다. 내 가족은 물론, 동창섬유 다닐 때는 아는 사람들을 알음알음 회사에 소개해주고, 필요한 기술들도 다 가르쳐줬다. 고맙다는 인사도 듣고, 퇴직할 때는 금 4돈이랑 감사패를 따로 받기도 했다. 일은 62살에 위암에 걸려서 그만뒀다. 5년 동안 쉬면서 예후를 지켜보다가, 다시 다문화가정 아이들 돌봐주는 일과 경로당 밥 해주는 일을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는 매일 아침10시부터 오후1시까지 마암리 경로당에서 15명분의 밥을 해 주는 일을 하면서 지냈다. 밥 해주고, 내일 뭐 할지 상의하고 준비하다 보면 하루가 꽉 찬다. 누가 혹여라도 안 오면 전화해서 안부를 확인한다. 언제는 두 사람이 안 왔길래 물어보니 한 사람은 허리가 아프다고 하고, 한 사람은 교회에서 어딜 갔다고 하더라.

코로나 때문에 지난 2년 반을 밥을 못 해 먹고 사니 사람들이 우울해서 어쩌지 싶었고, 나도 잠이 안 와서 약을 먹을 정도였다. 그런데 올해 코로나 거리두기가 풀리고 경로당을 나가면서부터는 약을 안 먹어도 잠이 잘 왔다.

낮에 사람들하고 얘기하고 사랑하며 어울리는 게 내 취미이자 일인 셈이다. 요즘 다시 경로당에서 밥을 같이 못 먹게 돼서 걱정이 많다. 상추며 호박이며 심어서 같이 뜯어 먹곤 했는데, 개인적으로 반찬 만들어다 주는 것도 혹시 모르니 하지 말라고 하더라. 경로당에서 같이 만날 수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얼른 코로나가 사라지면 좋겠다.

지금 바라는 꿈은 요양원 안 가고 자다가 세상 떠나는 것, 남편 먼저 보내고 바로 따르는 것, 그거 하나다. 자녀들, 손주들에게는 맘 편하게, 행복하게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성공은 그저 내가 벌어서 먹고 살고, 남한테 손 안 내밀고 도둑질 안 하면 그게 성공이다.

인간 대 인간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살아라, 가정 잘 지켜라, 돈이 100만 원이 생기면 딱 100만 원어치만 쓰고 누리며 살아라. 인생은 물같이 흘러가는 것이니, 얘들아 욕심을 부리지 말아라. 그저 행복하게 감사하며 살아라.

멋진 남편과 함께 한 컷.
<막내딸 신중순씨 편지>

엄마, 막내딸 중순이에요. 우리 4남매를 지금껏 잘 키워줘서 고마워요. 모든 일에 항상 열심히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엄마의 모습이 존경스럽다고 늘 생각해왔어요. 문득 어렸을 때가 기억나요.

엄마가 월급날 노란 봉투를 받아 와서 돈을 셀 때, 옆에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애교를 부렸죠. 그래도 뭐 하나 떨어지는 게 없어서 혼자 슬퍼하고, 조금은 엄마를 미워하기도 했어요. 어렸을 땐 엄마의 그런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내가 엄마가 되고, 돈도 벌다 보니, 그 돈이 어딘가로 다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 돈으로 우리 여덟 식구를 다 먹여 살려야 했던 거죠. 그걸 아니까, 이제는 이해가 가요.

엄마, 항상 보고 싶고, 제가 세상에서 엄마를 제일 사랑하는 거 알죠? 나도 엄마처럼 우리 아이들 잘 키워서 존경받는 엄마가 될게요. 엄마, 나는 다시 태어나도 사랑하는 우리 엄마 막내딸이고 싶어요.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해요♥ 
 

 

* 이 기사는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 원본 보기 : http://www.okcheoni.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56

편집 : 김미경 편집장
 

양유경 옥천신문 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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