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재단 뉴스레터에 미쳐 싣지 못한 이야기들)

아내의 발을 닦던 노신사

2005년 초여름이던가. 노부부와 나를 포함한 중장년의 여성 등 십여 명은 1박으로 강화도로 여행을 갔다. 저녁에 숙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들이 채근하여 노인은 대야에 담긴 아내의 발을 씻기고 마사지했다. 노인은 결혼 50년 만에 아내의 발을 이렇게 자세히 본 것은 처음이라며 ‘존경한다’는 아내의 발을 오래도록 어루만졌다. 화창한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모두 숙소를 나와 바닷가로 가는 동안 노인, 노인의 아내, 일행 중 젊은 여성과 나 이렇게 넷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걷게 되었는데 노인과 젊은 여성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서로를 마주 보고 반가운 표정으로 쏼라 쏼라 중국어로 유창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게 아닌가. 노인의 아내와 나도 걸음을 멈추고 하릴없이 그들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싸모님, 우리는 지금 두 남녀의 불륜이 시작되는 장면인지도 모르고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제는 사모님 발을 그리 정성껏 마사지 하시더니...”

내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더니 노인을 비롯해 모두 허리를 꺾어가며 폭소를 터뜨렸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그 노인이 리영희샘이라는 걸 알아채셨을 것이다. 그 자리에 함께 했던 사람은 아내 윤영자여사, 중국말도 잘하는 한비야씨. 리샘은 일어, 영어 외에 중국어에도 능하신 팔방미인이셨다. 당시 호주제폐지 운동을 하며 가부장적 마초들과 가열차게 싸우고 있던 나는 한의사 선배 이유명호, 한겨레 신문의 김선주 조선희 서명숙 김미경, 유시춘 한비야 등 ‘십자매’와 어울리면서 에너지를 얻고는 했다. 우리는 언론 수호뿐 아니라 호주제폐지, 성평등 역시 열렬히 지지하신 리샘을 위해 가끔 이렇게 ‘리영희오빠부대’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간 힘든 삶을 사셨을 리영희샘 부부를 모시고 연극을 본 뒤 뒷동산에서 학예회(^^)를 하거나 출판 기념회에 여럿이 참석해 축하공연을 하는 등 특별한 시간을 마련하면 리샘은 살면서 이렇게 즐거웠던 때가 별로 없었다며 고맙다고 환하게 웃으셨다.

2006. 9. 18 프레스센터 <고난을 무릅쓴 선생의 역경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리영희샘 저작집 출간기념모임에서 부부에게 뽀뽀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오빠부대
2006. 9. 18 프레스센터 <고난을 무릅쓴 선생의 역경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리영희샘 저작집 출간기념모임에서 부부에게 뽀뽀할 것을 주문하고 있는 오빠부대
두 분은 마지못해, 그러나 즐겁게 뽀뽀를 하셨다.   아내 윤영자 님은 항상 해님처럼 환한 웃음을 띄고 계시다.
두 분은 마지못해, 그러나 즐겁게 뽀뽀를 하셨다. 아내 윤영자 님은 항상 해님처럼 환한 웃음을 띄고 계시다.

 

전화로 꼬치꼬치 캐 물으셨던 이유는?

2008년 추석에 리샘이 전화를 하셨다. 추석을 맞아 안부인사차 연락하셨다며 뭐 재미있는 일이 없느냐 물으셨다.

“제가 맏며느리인데요 지난 설에 다 내던지고 7박9일 인도 명상공동체 오로빌에 다녀왔어요.”

“혼자서 비행기 타고?”

“네. 오로빌은 인도 동남쪽에 있고 40년 전에 사막 위에 나무를 심어가며 만든 공동체인데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이 평화롭게 함께 잘 살자고 만들었대요. 종교를 가질 수는 있지만 종교기관을 세워 전파할 수는 없고, 중심에 있는 커다란 명상소 마트리 만디르는 오전에는 주민들이, 오후에는 세계 각지에서 오는 방문객들이 사전 신청을 해서 명상할 수 있어요. 건물 외부엔 금을 붙였는데 조금씩 조금씩 40년째 작업을 하고 있대요. 화폐는 없고 하루 6시간의 노동은 모두 기록이 되어 교환가치를 갖고, 태양열을 이용하며 주민총회에서 다수결이 아니라 만장일치로 의사결정을 하고, 경쟁하지 않으며 집을 사거나 팔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은 수준 높은 연주회가 열리고, 세계 각처에서 방문하는 사람들 때문에 게스트하우스는 1년 전에 예약을 해야 하고...”

리샘은 굉장히 집중해서 내 이야기를 듣고 계셨다.

“그런데요, 한국에 돌아오니 절망스러웠거든요. 대체 나는 어디서 누구랑 저런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보나... 그랬다가 8월에 나를 인터뷰했던 기자를 통해 명상 스승님을 만나게 되었지요. 알고 봤더니 11년 전에 이미 인연이 닿았던 분이더라고요.”

“선생님은 어떤 분이시고 어떤 말씀을 하시던가?”

“국어 교사였는데 전두환 때 가택수색도 당하고 하도 못살게 구니까 학교에 폐를 끼치지 말자고 사직서를 내고 퇴직금을 가지고 지리산으로 은둔할 곳을 찾으러 가다가 소매치기를 당하셨대요. 할 수 없이 학교에서 창문 열면 보이던 계룡산에 숙박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토굴이 있어 찾아 들어갔는데...”

“그래서?”

“봄에... 생명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세상 만물이 모두 귀한 것이라는 목소리를 듣고, 5.18무렵에는... 이런 목소리를 들었고, 여름에 모기가 덤벼들 때... 이런 목소리를 들었고 가뭄이 심해지자... 이런 목소리를 들었고...”

“그래서?”

“... 제가 그동안 영성이 높은 도사들 이야기를 들으면 친구들과 찾아다니며 그들의 과학 너머 세계를 캐고 다녔는데 이제 더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스승이 성자들로부터 받은 과제가 바로 세월이 흐른 뒤에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명상공동체마을을 세우라는 것이었대요. 제가 오로빌에 다녀와서 공동체가 어떻게 가능할지 절망하고 있을 때 바로 공동체를 중한 과제로 여기는 도반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랍던지요.”

내가 스승을 만나 들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봤지만 대부분 건성으로 듣거나 의심하며 믿으려 하지 않았는데 리샘의 과도한(?) 몰입은 다소 뜻밖이었다. 그래서 기나긴 이야기를 40분간이나 전화로 쏟아 내었는데 선생님은 “오늘 참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며 대단히 흡족해 하시고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꼭 다시 읽어보라고 수차례 당부하셨다.(자세한 내용은 리영희재단 뉴스레터 제10호를 보시라

https://rheeyeunghui.or.kr/?page_id=88&mod=document&pageid=1&uid=686

 

리영희 선생님의 마지막 강독회 , 고급진 사회 '유토피아'

나는 부랴부랴 다음 달 대학로 민들레영토에서 유토피아 강독회를 열었다. 나의 공동체 관련 이야기를 리샘이 그렇게 관심 있게 들으셨던 이유는 유토피아가 바로 54개의 공동체마을로 구성된 사회였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리샘이 전화 통화를 할 때 공동체 이야기에 급 관심을 보이시며 꼬치꼬치 물었던 이유는 당신의 최고 관심이 '고급진 유토피아' 공동체 사회에 있기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리샘이 전화 통화를 할 때 공동체 이야기에 급 관심을 보이시며 꼬치꼬치 물었던 이유는 당신의 최고 관심이 '고급진 유토피아' 공동체 사회에 있기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모어가 살았던 시대는 절대왕정의 시대. 백년전쟁(1337~1453), 장미전쟁(1455~1485)을 겪은 뒤라 농민의 삶은 곤궁했고 도적이 들끓었다. 소수의 귀족은 음악과 춤을 즐길 수 있었지만 절대다수는 절망과 한숨 속에 살아야 했다. 런던시 사법집행관이었던 모어는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보다 범죄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부는 라파엘 선장과 함께 당시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와 이에 대한 국가의 불완전한 대책의 어리석음을 논한 것이고, 2부는 그런 문제들을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고 있는 유토피아 사회에 대한 라파엘의 소개를 받아 적은 것이다.

유토피아의 지향점은 ‘귀한 너와 나, 함께 잘 살자’는 것이다. 남을 딛고 위에 올라서는 것도, 남에 의해 짓밟히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삶의 질에 상하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므로 온갖 부작용의 원인이 되는 사유재산을 허용하지 않는다. ‘화려한 껍데기’를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 금으로는 죄수의 족쇄를 만들고 온갖 보석은 어린아이들의 일시적인 장난감이 될 뿐이다. 옷은 작업하기 편하고 추위와 더위를 막을 수 있으면 되기 때문에 모두 같은 재질과 스타일의 옷을 입는다. 전문 연구를 위한 소수를 제외하고 누구나 6시간 노동을 하면 공동의 창고가 넘쳐나 모두 풍족하게 살 수 있으니 미래를 염려할 이유도 없다. 외부의 지식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육체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지극한 쾌락으로 여긴다. 타인의 슬픔과 근심을 덜어주며 그런 미덕을 귀히 여겨 정신적 쾌락으로 삼는다. 자연에 감사하며 오직 선하고 바른 쾌락 속에 행복이 있다고 믿는 그들의 삶에 천박한 구석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참으로 고급지지 않은가?

 

지혜로운 대중은 새로운 길을 찾아갈 것이다

토머스 모어는 불평등, 빈곤, 강도 높은 노동, 차별, 탐욕, 거짓, 폭압, 위협, 경쟁이 판치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고 대안으로 기본소득, 공공주택, 6시간 노동, 경제적 평등, 협동, 이타적인 삶, 수준 높은 문화활동 등을 소개함으로써 후일 공상적 사회주의, 과학적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리영희샘은 모어의 선견지명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라고 찬탄하셨다. 리샘은 앞뒤 돌볼 여유도 없이 혼자만 잘살기에 바쁜 천박한 자본주의가 100년을 갈 수 있겠는가며 지혜로운 대중은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함께 잘 살기 위해 반드시 새로운 길을 찾아가게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2009년 6월 선생님의 건강이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빠부대는 연희동 아들집 정원에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이별 학예회를 열었다. 노부부의 머리에는 만들어간 화관을 씌워드리고 꽃도 가슴에 달아드렸다. 조선희의 능숙한 아코디언 연주 뒤에 나는 배운지 얼마 안 된 솜씨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을 해금 연주로 들려드렸다. 유시춘의 시낭송 그리고 돌아가며 춤과 노래가 이어졌다. 당시 복수 때문에 선생님의 배는 꽤 불룩해 있어 건강상 한 시간 정도만 하고 끝내려고 했지만 선생님이 너무 흥겨워하셔서 학예회는 예정보다 훨씬 길게 이어졌다. 마무리를 하며 우리는 각자 다양한 몸짓을 하며 떼창을 했다.

“꽃중의 꽃 리영희꽃 삼천만의 가슴에. 피었네 피었네 영원히 피었네. 백두산 상상봉에 한라산 언덕 위에 민족의 얼이 되어 아름답게 피었네”

선생님은 눈물을 닦으셨다.

“오래 병석에 누워있으면서 묻고 또 물었지요. 내가 과연 제대로 살아온 것인가. 해답을 쉽게 얻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여러분을 보고 비로소 내가 그다지 잘못 산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은 병석에서 '내가 과연 잘 살아온 것일까?' 하는 질문에 해답을 낼 수 없었다고 하셨다.
아무렴요. 선생님은 민족의 얼, 꽃중의 꽃이십니다. 

 

고급진 세계를 동경하고, 고급진 언론을 사수하려던 리영희 선생님은 다음 해 겨울에 돌아가셨다. 지금은 별중의 별이 되어 조국의 하늘 위에 높이 빛나고 계시리라.

언제부터인가 이 땅에는 ‘기레기’라는 말이 횡행하고 있다. 정의롭지 못한 검찰이 천박한 분위기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언론뿐인가. 날마다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백두산 상상봉에서 한라산 언덕에 이르기까지 금수강산이 바람 앞 등불이다. 과연 우리는 지혜롭게 돌파구를 뚫을 수 있을까? (2편에 이어집니다)

편집 : 고은광순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고은광순 객원편집위원  koeunks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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