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이순복 군북면 출생

 

이순복씨 
이순복씨 

서른여섯 살, 지금 우리 3남매들이 30대 중반이다. 36살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민다.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를 식장산 선산에 묻고 내려오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데 그 꼬마가 칠십을 넘어 이제는 꿈에서도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 

추소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처로 나와 보겠다고 대전으로 나와 목재소를 시작하면서 내실 있게 사업을 일구고 노년의 시간을 수시로 고향을 오고가며 그리움에 젖곤 한다.

어제도 부소담악에 다녀오면서 수몰되기 전 모래사장에서 친구들과 놀던 때를 그리워하고 차를 돌려 나왔다. 겨울의 쓸쓸함 속에 사라진 고향대신 아름다운 비경이 나를 반겨주어 서운한 마음을 달래주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경치가 금강산처럼 아름답다고 소금강이라고 불러주었다던 부소담악이 이제 옥천의 명소가 되었지만 우리에게는 아득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고향마을이다. 덕분에 고향 같은 어머니도 떠올리며 시름을 잊는 한 나절을 보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
외할머니와 어머니


■ 열다섯, 열일곱 살의 두 형제-서른여섯 살의 어머니를 잃다

복수가 차오를 대로 차오른 어머니는 간밤 내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셨다. 마침 방학이라 추소리 집에 와 있던 우리 형제는 급히 외할아버지를 불렀고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발걸음을 쫓아오지 못해 늦게 숨을 헉헉거리며 대문을 들어선 외할머니를 보자 손으로 당신의 어머니를 불렀다.“어머니 우리 순복이 순철이 잘 키워주시오” 외할머니 귀에 겨울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숨이 끊어져가며 한마디 남기고 돌아가셨다.

나는 하늘이 꺼지는 것 같았고 형님은 울음소리도 내지 못했다. 딸을 잃은 외할머니의 곡소리는 밤새 온 마을을 뒤덮었고 외할아버지는 뒷모습만 보였지만 움찔하는 어깨만으로도 흐느끼고 계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의 초상날, 집 앞에 채알을 치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분주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단 한 사람. 바로 아버지였다. 워낙 호색한이었던 아버지는 하루에 옷을 세 번씩이나 갈아입었는데 여자를 만나러 나갈 때마다 치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런 파렴치한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구판장을 하시며 우리를 돌봐주셨다. 

장례 이튿날 아버지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들어오셨다. 어디선가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숨을 곳도 제대로 찾지 못한 아버지는 죄인마냥 상복을 입고 손님을 맞았다. 상여가 나가는 날 요령소리에 묻힌 아버지의 흐느낌을 들었다. 속죄의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말의 양심으로 나는 착각을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묻고 다음날부터 다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둥 여전한 작태를 보였다. 어머니를 선산에 묻고 내려오는 길, 형님과 두 손을 꼭 잡고 우리는 반듯하게 잘 살아보자고 다짐을 했다.

우리는 다시 개학 후에 옥천읍으로 돌아가고 삼양리 외갓집으로 짐을 옮겼다.  외할머니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우리 형제는 사람구실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가정을 등한시한 아버지 슬하에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외할머니는 친손주 여섯과 같이 살고 계셨는데 외손주인 우리 둘을 받아주시고 학교 갔다 오면 매일 따뜻한 밥을 아랫목에 넣었다가 꺼내주셨다. 일찍 세상을 등진 가여운 딸에 대한 그리움을 우리들에게 베푸셨겠지만 우리는 외할머니 덕분에 성장통을 크게 앓지 않고 사람구실 하면서 살 수 있었다.

지금도 내 그리움의 원천은 딱 두 분이다. 어머니 그리고 외할머니….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지만 나이 들어가는 내 얼굴을 잊으셨는지 도무지 나타나지 않으신다. 

돌 사진
돌 사진


■ 대처에서의 고독을 치열하게 살면서 되갚다

옥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전에 나와 일가 어르신이 운영하는 목재소에 취업을 하고 형님은 교대에 들어가셔서 교장선생님으로 퇴직을 하셨다. 모두 외할머니 덕분이다.

목재소에서 일을 배우면서 나는 십여 명의 직원 중 제일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을 했다. 대패질 하나도 허투루 배우지 않았다. 나무에 대한 공부도 따로 하고 집 짓는 곳에는 수시로 따라다니면서 나무를 익혔다. 나무는 죽은 존재가 아니었다. 사람의 몸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

잘 다루어야 그 값을 하고 쓰임새를 다한다. 대패질을 할 때도 소중한 몸처럼 살살 다루어야 그 결을 살려 본연의 역할을 잘 해낸다. 나무 하나만으로도 집안의 분위기가 바뀌고 온기가 느껴지는 것을 우리는 다들 몸소 체험을 했다. 나무가 주는 향기 또한 마찬가지다.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나는 자연의 섭리를 지닌 존재라고 생각했다. 일할 때마다 함부로 다루지 않았고 내가 가진 무기는 정직과 성실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 나는 그저 하루하루 단 한순간도 허투루 살지 않았다. 

외할머니에게 효도하고 싶었다. 8만원의 월급을 받아서 7만원을 외할머니에게 드리고 나는 만원으로 한 달을 살았다. 외할머니는 곗돈을 부어주시고 몇 년 후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돈으로 불려놓으셨다. 그 돈으로 나는 스물여섯 살에 결혼을 하고 대전에 작은 집도 마련했다.

외할머니는 우리 형제에게 생명의 은인이며 인생의 귀인이다. 목재소를 운영하던 일가 어르신이 고령이 되고 누군가 일을 맡아야 해서 어르신이 내가 적임자라고 나에게 목재소를 맡기셨다. 물론 일가친척들이 일을 하고 있던 곳이라 가장 촌수가 먼 내가 목재소를 맡으면서 잡음도 있었지만 워낙 성실히 일했던 덕분에 그 잡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건설경기가 한창 좋았던 때라 우리도 덩 달아 그 물결을 타고 돈도 모았다.

40년간 목재소를 운영하면서 정직과 성실 하나만으로 승부를 걸어서 거래처도 많았고 치열하게 살아낸 덕분에 우리 3남매도 하고 싶은 공부 마음껏 하고 아직은 30대 중반이지만 모두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

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우리 자녀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 그리고 사업하는 남편 옆에서 마음 졸이고 자녀들 교육과 알뜰한 살림살이를 잘 챙겨준 아내 덕분에 나의 노년이 풍성하다. 아직도 젊은 나이라고 생각하다보니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자체가 쑥스럽지만 멀리도 왔다.

70년이 넘는 시간을 거슬러 보면 얼마나 많은 기억과 추억들이 알알이 맺혔는지. 고뇌에 찬 날들도 수두룩했지만 파안대소하면서 인생이 내 것 인양 자축하는 날도 있었고 우리 아이들이 입지를 키워가는 것을 보면서 ‘이 맛에 사는 구나’ 하면서 우리를 내박쳤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그리움으로 되갚기도 했다. 아버지, 당신도 당신 나름의 고뇌가 없었을까 집안을 등한시 하고 여자 품에서 해맨 이유가 있었겠지…. 그리 생각하니 안쓰러운 양반이다.

이웃들에게 해마다 설 명절이면 봉사의 마음으로 나누는 떡국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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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의 날들

치열하게 살면서 얻어내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르고 떠난 아버지가 오히려 안쓰러운 마음이다. 형님의 교장 정년 퇴임식 날 우리도 그 자리에서 축하해주었지만 형님과 나는 수십 년 전 어머니를 선산에 묻고 내려오던 그 날처럼 둘이 손을 꼭 잡았다.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읽었다. “아우야 우리 잘 살아왔구나. 앞으로 남은 인생 어머니와 외할머니한테 누가 되지 않게 그리움만 남기고 잘 살자” 형님이 전한 무언의 각오를 나도 알아차리고 그렇게 살고 있다. 이제 둘 다 시간 여유가 있어 형님과 같이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찾을 때는 예전 소년처럼 손을 꼭 잡고 산을 오른다.

지금의 청년들이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부모보다 소득이 적고 부모보다 더 먼저 늙는 세대라는 끔찍한 터널을 지나는 청년들.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는 기막힌 세대의 청년들이 좀 더 힘을 내기를 바란다. ‘우리처럼 어려운 세대도 살아왔는데 너희들은 배부른 소리 한다’ 라고는 말하지 않으련다. 하지만 우리 청년들이 희망은 잃지 않기를 바란다.

열심히 살면 답은 어디에든 있다. 내가 찾고자 하는 곳에서만 답을 구하려 하면 시간이 많이 걸려 지칠 수 있다. 인생은 준비하는 자에게는 항상 기회가 오기 마련이다. 때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준비하면서 때를 기다리라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을 만큼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나만 잘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 이웃 그리고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이 함께 잘 살 때 나의 안위도 같이 보장되는 것이다. 나도 사회의 어른으로 우리 청년들이 희망의 부재에 살고 있는 이때 작은 보탬이라도 될 수 있다면 내 인생이 그리 허허롭지는 않을 것이다.

크고 작은 후원을 수십 년 간 하고 숨은 봉사도 내내 해왔던 이유가 바로 나와 형님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 성장해야 하는 작은 손들에게 따뜻한 온기를 심어주고 싶었던 그 마음 하나다.

입춘이 내일 모레다. 자연은 소리 없이 그 때를 여지없이 알아차린다. 한파가 지나고 입춘이 찾아와 봄바람을 불어주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도 춘풍이 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몇 년째 배우고 있는 서예. 오늘은 먹을 진하게 갈아서 네 글자를 한 자 한 자 여느 때보다 정성껏 써보련다. 바로 입춘대길 (立春大吉)!!! 

* 이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류한 글입니다. 
* 원문 보기 : http://www.okcheoni.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67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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