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에서 만난 사람들(Ⅲ)

석아!
내가 좀 늘어진다 싶어. 오늘은 북악산 얘기 마저 할게.

접때 말한 만세동방 약수터 아래로 내려서니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육중한 방호 철책이 에둘러 서 있어. 그 위로는 둥그렇게 휘감은 가시철조망이 겹겹이 박혀 있는데 뱁새 말고 나다닐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되게 촘촘하더군. 누군가가 저게 다 김신조 땜에 생긴 거라고 말문을 트자, 저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한 마디씩 하더라구.

북악산을 남김없이 개방했다고는 하나, 곳곳에 흉물스런 철문과 가시 철조망이 위압감을 준다. Ⓒ이수엽(2023.1.6.)
북악산을 남김없이 개방했다고는 하나, 곳곳에 흉물스런 철문과 가시 철조망이 위압감을 준다. Ⓒ이수엽(2023.1.6.)


가시 철망 앞에서 1•21 추억담이 솔솔 


“걔들 때문에 외박도 못하고 뺑이 좀 쳤지요.”
“외박 같은 소리 하네. 우린 제대 얼마 앞두고….”
“맞아, 3개월인가 제대가 미뤄졌잖아?”
“3개월은 양반이지? 우라질, 우린 반년이나 연장됐어.”
“그 바람에 하사 달고 전역하지 않았어요?”
“하사가 밥 먹여 줘요? 웃기는 거지, 뭐.”
“그때 난 포대병이었는데, 처음으로 오피(observation post)에도 올라가 보고 편하게 있다 왔는데.”
“고생했다고 만년에 예우해 준 거네요.”
“맞아, 관측소에 있으려니 할 일이 있어야지. 온종일 앉아서 노닥거리다가 전역했어요.”
“어쨌든 복무 기간 연장도 다 경력으로 인정받은 거니 손해 본 건 없잖아요?”
“그게 뭐 첨부터 그랬나? 한참 뒤에 그런 건데 뭐?”

나도 슬며시 끼어들었어.

“저는 그때 중학생이었는데 교회 친구들이랑 크리스마스 때 모금함 목에 걸고 밤새 시내를 누비고 다닌 기억이 납니다.”
“왜?”
“교회 형들이 월남 장병한테 무슨 김치 보내기운동을 한다고 했거든요.”

좌장 격인 대선배님이 잠자코 듣고 있다가 한 말씀 하셨다.

“난 65년 2월에 제대했는데 그놈들 때문에 없던 예비군이 생겼잖아? 꼼짝없이 훈련 또 받았지 뭐. 그리고 그 당시 난 6학년 담임할 때였거든. 월남 장병한테 위문편지 쓰고 위문품 보내고 막 그랬거든. 한번은 나한테 편지가 왔는데 찾아오겠다는 거야. 미친놈이 내 이름(김석희) 보고 날 여자로 안 거지.”


귀에 박힌 행진곡, 성조기여 영원하라
 

석아, 선배들의 1•21 추억담을 들으며 그때를 회상했어.
학교에서는 안보 강사라고 했던가? 건뜻하면 그들을 초대해서 강연을 듣게 했어. 지금 생각하면 거의 쓰잘데없는 소리지만, 우린 너나없이 그 시간을 기다렸어. 그러니까 청주에서 전국소년체전이 열리는데, 하필 우리가 매스 게임(mass game)을 하게 된 거야. 얄짤없이 곤봉체조만 하다가 중학교를 졸업한 셈이지. 키 작은 것도 서러운데 땅꼬마라고 맨 뒷줄에 서다 보니, 더 그랬을 거야. 마이크는 웅웅대지, 구령대는 잘 안 보이지…. 우왕좌왕 헤매는 건 기본이고, 정말 따분했어.

근데 석아, 3년 동안 귀에 박힌 행진곡이 뭔지 아니? 미국 해병대 군악단이 연주했다는 ‘성조기여 영원하라(Stars & Stripes Forever)’였거든. 지금도 그 소리만 들리면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리본 달린 곤봉을 겨드랑이에 낀 채 줄 맞춰 행진하던 때가 삼삼하거든.
여담이지만 그렇게 넌덜머리가 난 곤봉체조를, 내가 교단에서 연출할 줄 누가 알았겠니? 아무튼 생경한 북한 얘기가 그때는 정말 재밌었거든.
 

안보 강사의 동무팔이에 한눈팔고
 

“아침은 굶고 점심은 건너뛰고 저녁엔 그냥 잤습네다.”

그때 들은 말이야. 아마도 허기진 북한의 실상을 말하려고 했던 것 같아.
그리고 내무서원이 길 가던 할아버지를 불러세워서

“할아버지 동무, 어드메 가십네까?”
하고 묻자, 하도 아니꼬운 나머지 이렇게 되쏘았다지.
“며느리 동무가 손자 동무를 낳아 미역 동무를 들고 가는 길입네다.”
그때마다 우린 깔깔대고 박수하며 숫제 데굴거렸어.
 

시리고 저린 어린 가슴 켜켜이 적개심이 폴폴
 

석아!
국민학교 입학하자마자 받은 교과서 있잖아? 누렇게 바래다 못해 곰삭아서 곰팡내 풍기던 교과서! 맨 뒷장에는 그 책을 거쳐간 주인들 이력이 나와 있어. 내가 물려받은 이 책은, 몇 년도에 누가 쓰다가 몇 년도에 누구에게 물려준 것이라는 게 낱낱이 드러나 있었어. 근데 국어책, 산수책 할 것 없이 맨 앞장에 떡 박혀 있던 게 뭔지 기억나지?

“반공(反共)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앵무새처럼 달달 외우던 ‘혁명 공약’ 1번이야.
하도하도 무지해서 아프고 쑤신다. 하도하도 없이 살아 시리고 저린다.
아, 어쩌다가 학교 ‘아저씨’가 펴 주는 강냉이죽 한 국자를,
곱은 손 호호 불며 감지덕지 받아 먹던 어린 시절!
생각만해도 아뜩아뜩하다.

그런가 하면, 운동회 때마다 우린 기마전을 했잖아?
이마엔 청백 머리띨 두르고 4열 종대로 서서
군인들 흉내를 내면서 목청껏 부르던 숭리의 노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한국전쟁 당시 부르던 군가였다지?
내가 살기 위해 죽여야 했고,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하는 전쟁 노래!

“무찌르자 오랑캐 몇천만이냐 / 대한 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
(후렴)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오랑캐’가 뭔지, ‘초개’가 뭔지 무얼 알 나이가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너나 나나 우린 알게 모르게
작은 가슴속 켜켜이 무지무지한 적개심을 키우면서 자랐어.
어쩌면 상대를 죽이는 스릴을 즐기도록 길들여진 건지도 몰라.

출처 : 국가기록원, '가을운동회' 관련 영상 기록물(2012. 10. 15.)
출처 : 국가기록원, '가을운동회' 관련 영상 기록물(2012. 10. 15.)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있는데 ‘청와대 전망대’가 드러났어.
청와대에서 남산타워에 이르도록 경복궁은 물론 서울의 중심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야. 그 옛날 눈만 뜨면 북향재배했을 충신열사를 떠올리며 ‘무엄하게도’ 청와대와 경복궁을 내려다보려니 야릇하더군.

청와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서울시가지


길손의 쉼터로 전락한 백악정엔 낙엽만 쌓이고
 

잘 다듬어진 산책로를 따라 몇 굽이 돌아가니, 두 갈래의 일방통행 길이 합쳐진 곳이 나와. 이른바 청와대 담장에 붙은 성곽로 끝에 있는 자그마한 정자야. 사실, 정자라고 하기엔 옹색하기까지 한데 전형적인 정자와 사뭇 달라. 그저 오가다 잠시 들러 비를 피하기 위한 나무로 만든 네모진 단이라고 할까? 사방이 훤히 뚫려 있는데 천장만 들씌운 비가림막이라고 보면 돼.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대통령경호실, 124쪽)에 따르면 백악정 쉼터는 2004년 4월 6일부터 4월 10일에 걸쳐 지었대. 주변에 조선시대 기와가 산재한 것으로 보아, 정상에 있던 백악신사가 이전한 곳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야.

조선 태조는 이조에 명하여 백악을 진국백(鎭國伯)으로 삼고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경대부(卿大夫 : 높은 관직에 있는 벼슬아치)와 사서인(士庶人 : 사대부와 서인)은 제사를 올릴 수 없게 하였어(태조실록, 1395.12.29.).

아울러 도성(都城)의 터를 닦기 시작하면서 산신과 지신에게 제문을 올리도록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어(양촌선생문집 제23권, 제문류).

“신(神)은 오직 이를 도와 우양(雨陽 : 날이 갬과 비가 옴)을 순조로이 하고 역질(疫疾)이 일어나지 않게 하여, 이 큰일을 이루어 영원히 만세의 견고한 성지(城池 : 성과 그 주위에 파 놓은 못)가 되게 하면, 신 또한 영원히 흠향할 바 있으리라.”

결론적으로 백악정은 나라에서 지은 신사(神祠)로 산신에게 제사지내던 사당을 염두에 두고 지은 거지. 세상만사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천지신명을 향해 나라의 안위를 빌고 읍소하던 제단이요 기도터를 본뜬 거라고 봐도 되겠지.

백악정  한 면에 결린 액자글이다. '용사', '무적'이란 용어가 무얼 뜻할까? 백악정을 세운 때는 고건 국무총리가 권한대행(2004년 3월 12일~2004년 5월 14일)을 하던 때이다.  5월 14일 탄핵 소추가 기각되고 노무현 대통령은 복귀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곳에서는 관악산과 아차산도 보여.
광화문과 세종로의 촛불 함성이야 오죽이나 잘 들리겠니?
노무현 대통령이 시름없이 탄핵 반대 촛불 함성을 듣던 곳이요, 이명박 대통령은 6•10 쇠고기 수입 반대 100만 촛불 대행진을 바라보며 ‘애창하던’ ‘아침이슬’을 들었다고 한 곳이야. 그가 언제 어디에서 ‘아침이슬’을 애창했는진 모르지만, 노태우까지 ‘아침이슬’을 즐겨 불렀다고 한 걸 보면 석아, 저들의 구저분한 속내가 드러나지 않아?
 

나무 한 그루에도 종교색을 덧칠한 장로 대통령
 

백악정을 향했을 때 우측에는 2001년에 ‘김대중•이희호’가 심은 느티나무가, 좌측에는 2004년에 ‘노무현•권양숙’이 심은 서어나무가, 그 아래에는 2012년에 ‘이명박•김윤옥’이 심은 산딸나무가 자라고 있어.

석아, 산딸나무는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 나무로 알려져 있잖아? 어디까지나 기독교인들 사이에 전해오는 이야기일 뿐, 나로서 진위를 판단할 수는 없어. 다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뒤로 하느님이 다시는 십자가를 만들 수 없도록 키 작고 볼품없는 나무로 만들어 버렸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어. 그게 오늘날 산딸나무라는 거지.

아무튼 이명박 서울시장이 “서울시민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서울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며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천명한 걸 상기해 봐. 김영삼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 모두 기독교 장로잖아? 그래서 그들은 청와대 경내에 산딸나무를 심었을까? 아니길 바라지만 석아, 나무 한 그루에까지 종교적인 색채를 덧칠하고 있는 듯해 그저 씁쓸하다. 일국의 대통령이 말이다.

 서울시교육청 교육자원봉사지원센터 그린에듀교육지원단 단원들과 함께한 새해맞이 기념 산행. Ⓒ구제철(2023.1.6.)

석아, 백악정에서 내려서면 두 갈래 길이 나와.
좌측은 삼청동 가는 길인데, 우리는 우측 효자동 칠궁 쪽으로 내려갔어. 왜, 왕을 낳았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곳 말이야. 영조의 생모를 비롯하여, 사도세자의 생모, 영친왕의 생모 등을 모신 사당인데, 천상 다음에 들르기로 하고 지나쳤어.
 

박정희 대통령이 말을 타고 달리던 기마로
 

그때였어.
“이 길이 바로 기마로와 이어지거든요. 관저 뒤쪽으로 나와 백악정 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마 말을 타고 만세동방 약수터까지 오르내렸을 겁니다.”

뒤돌아보니 한때 청와대 경비대인 101경비단에서 근무했다는 분이었어. 세 분을 모셨는데 말이 청와대지 막상 대통령을 본 적은 거의 없대. 어쩌다가 (운이 좋아) 경내에서 골프를 치는 전두환을 본 날, 대박이 났다면서 복권을 사기도 했대.

석아, 성곽로 안쪽 경내에는 기마로(騎馬路)가 있어. 온실 뒤에서 출발해 관저 뒤를 거쳐 본관 옆으로 내려오는 길인데, 청와대 내부순환로라고 불러. 박정희 대통령이 말을 타고 달리던 길이라는 뜻이야(안충기, 처음 만나는 청와대, 74쪽).

아래는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일본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인데, ‘시프겔’이 ‘보배드림’에 올린 걸 재인용했어. 사진 설명까지 그대로 옮길게.

「다음은 1973년 박정희의 특명을 받아 이른바 윤필용 사건의 수사를 담당했던 강창성(육사 8기) 전 보안사령관의 1991년 회고다.

“계엄선포(1971년 10월 17일) 한 달 전쯤인가. 박 대통령이 나를 불러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 장화에 점퍼 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류순열, <벚꽃의 비밀> 39쪽에서 재인용)」

박정희 청와대 일본 군복 승마 사진(시프겔, 2016.11.21.) 출처 : https://m.bobaedream.co.kr/board/bbs_view/best/95627
박정희 청와대 일본 군복 승마 사진(시프겔, 2016.11.21.) 출처 : https://m.bobaedream.co.kr/board/bbs_view/best/95627

1•21사태 당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의 순직터를 지나 곧장 경복궁역 쪽으로 내려가면 ‘무궁화동산’에 이르게 돼. 관광객이 타고 온 관광버스 수십 대가 한길가에 죽 서 있던데, 막상 ‘무궁화동산’은 한적해서 좋았어.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의 순직터 표석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의 순직터 표석

석아, 1993년 3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직후에 '군사정권의 잔재를 청산한다'면서 삼청동 안가(안전 가옥)를 제외하고 모든 안가를 철거했어. 서울에는 궁정동 말고도 한남동과 구기동, 청운동, 삼청동 등 대여섯 군데에 안가가 있었대. 이른바 ‘채홍사’ 구실을 한 중앙정보부의 박선호 과장은 ”지금도 수십 명이 일류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대통령의 여인들’을 언급하면서,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월 10회 정도로 만찬동을 찾았다고 했어(한겨레21, 박정희 X-파일, 2005.01.31.).

우선 상대 얼굴을 본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고
뛰어난 방중술에 혀를 내두르고
나올 때 집어 주는 뭉칫돈에 뒤로 자빠진다!

그 당시에 회자하던 말인데, 너도 한 번쯤은 들었을 거야.
그러고 보니, 법정에서 ‘박정희의 여인들’을 발설하려는 박선호를 향해, 이를 제지하던 김재규의 외마디가 무얼 의미하는지 이제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어. 석아, 아무래도 내가 늙은 거지?
 

박정희 대통령을 기리는 상석과 청음 선생의 시비
 

무궁화동산은 바로 궁정동 안가 자리에 조성한 시민 공원이야.
이때 조경 사업을 맡았던 이가 나름 10•26 사건 현장을 표시했는데, 30여 미터의 자연석 성곽이 툭 끊어진 곳에 묘실(墓室)만한 크기로 상석(床石)을 깔고, 돌 2개를 포개 놨어. 그래서 그런지 윗돌은 새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여. 박정희 대통령의 영혼을 형상화한 거라는데, 끊긴 성벽 돌 틈새에서 박새 두 마리가 잔망스럽게 숨바꼭질하더군.

그런데, 그 자리가 그랬던가?
바로 옆에 ‘김상헌’의 집터 표석과 '가노라 삼각산아~' 시비가 덩그러이 서 있어. 청음(淸陰) 선생이 청나라로 압송될 때 한양을 떠나면서 부른 시조잖아? 그냥 헛웃음만 나오더라. 속된 말로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대부, 김상헌이 왜 거기서 나오니? 강직한 기상과 절개로 어떤 타협도 거절함으로써, 청나라 사람들마저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라고 했다지 않아? 그런 김상헌이 살던 집터 바로 옆에서 박정희가 죽임을 당했으니, 이를 두고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밖에. 그날의 기개와 주접질을, 일편단심 무궁화는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적선골에서 만난 윤석열 대통령
 

근데 석아!
내가 윤석열 대통령을 어디서 본지 알아? 좀 들어 봐.

우리 셋은 경복궁역 쪽으로 가다가 적선골음식문화거리로 들어섰어. 세종음식문화거리 맞은편이 그곳이야. 마침 출출해서 한잔할 겸 이집 저집 기웃거리는데 ‘골목집’이 눈에 띄는 거야. 어쩐지 귀에 익다 싶어 생각해 보니, 익승이가 침이 마르도록 자랑질하던 집이었어. 간재미 무침 안 먹으면 죽을 때까지 후회한다고.

혼자서 밥을 드시다 말고 할머니가 우릴 맞는 거야. 테이블이 달랑 다섯 개뿐, 왠지 썰렁해. 춥다고 하자 전기난로를 켜면서 금세 따뜻해질 거니까 조금만 참으래. 친구들이 극찬해서 왔다는 말에 너부죽한 얼굴로 친구가 누구냐고 묻는 거야. 다짜고짜 사진을 보여줬더니 단박에 알아보는 거 있지? 광철이를 가리키며 며칠 전에도 혼자 다녀갔대. 그리고 익승이는 둘이 와서 세 시간이 넘도록 마시고 갔대. 확인차 전화했더니 다들 맞대.

80줄로 보이는 할머니야. 간판 메뉴로 ‘홍어삼합’을 내세운 게 야릇하긴 했어. 대구 ‘할매’가 전라도 ‘홍어’를 판다? 뭘 좀 물어보려는데 짬을 주질 않아. 들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거침없이 혼자 내뱉는 거야.

열에 아홉은 홍어삼합을 외면하고말고. 그래도 작년까진 하루에 열 접시 정도 나갔는데 요새 같으면 정말 죽을 맛이야. 맛 좋은 홍어애탕은 작년 가을에 벌써 접었지. 집값은 폭락하지, 물가는 오르지 무슨 재미로들 마시겠어? 하기사 이자 갚으려면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 여기도 한물간 지 오래됐어. 그나저나 가뜩이나 사람 없는데, 윤석열은 왜 지랄맞게 말짱한 집 두고 용산으로 갔는지 몰라. 그렇지 않아도 밤낮없이 바글바글한 집엔 또, 왜 찾아가? 그 바람에 우리집만 파리 날리고 있잖아.

군말 없이 간재미랑 육개장을 시켰지. 맛도 맛이지만 손이 크더군. 밑반찬은 바닥이 보일 틈 없이 집어 주고, 육개장은 국물이 보타진다 싶으면 한 국자씩 들고 오는 거야. 살갑기 그지없었어. 한 상 푸짐하게 차려놓고 정신없이 먹었어. 배가 차니 그제서야 40명이 먹을 집을 찾아 현지답사를 나온 선발대라는 걸 깨달았어. 사실 너무 좁아. 있는 테이블 몽땅 바투 붙여 봐야 20명 남짓 겨우 앉으려나?

우리 얘길 듣던 쥔장이 갑자기 뛰쳐나가더니 한참 만에 와서 맞은편 집을 소개하는 거야. ㄸㄴㅇ! 이름 한 번 걸판지게 생겼다 했더니,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에 들렀다 간 집이래.

거나하게 취한 우린 그 집을 찾아갔어. 50~60명이 앉아도 충분한 집이야. 문제는 돈이야. 막걸리를 포함해서 4명당 6만 원까지밖에 쓸 수 없거든. 요리조리 재다가 물었어.

“간재미무침 반 접시씩만 시키면 안 될까요?”

어렵게 꺼냈는데 힐끗 쳐다보더니 안 된대. 두말없이 그냥 나왔어. 벽에는 김치찌개를 먹는 그의 사진이 걸려 있더군. 누군가는, 그가 앉았던 자릴 찾아 기를 받았다고 자랑스레 사진을 올리고, 밥맛이 좋아 몇 공기를 더 먹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더군.

“윤석열 당선자 식사하신 자리 。。。!”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께서 맛있게 식사하셨던 자리♥♥♥”

아서라, 윤석열이 앉아서 밥 먹다 간 자리까지 팔아서…. 하늘을 쓰고 도리질하는 격이다. 제발, 개나 소나 용상(龍牀)에 앉아 거드름 피우는 걸 조장하지 마라. 뻘짓도 유분수라, 차라리 그가 쓰던 수저 공기 물컵 냄비뚜껑까지 금박으로 명문 새겨 벽장 속 깊이 숨겨 두고 천년만년 세세손손 당신네만 우러르면 누가 뭐랄까? 이것참, 쪽팔려서 두 번 다시 적선골 갈 수 있으려나.

​편집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keun72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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