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에서 만난 사람들(Ⅰ)
석아, 별일 없지?
요즘 잇따라 ‘최강 한파’란 말이 들려. 급기야 ‘극한 한파’니 ‘북극 한파’니 하더니, 오늘은 무슨 영하 17도래. 내가 늙었나? 그게 해가 뜨기 직전 최전방 기온이라지만, 말만 들어도 어쩐지 으스스해진다. 어쩌다가 우리나라를 북극에 견주게 됐지?
다른 것 아니야.
내가 관여하는 봉사단 있잖아? 교정 가꾸기 활동을 하는 그린에듀!
나도 청와대 좀 내려다볼까
우리 단원들이 지난 6월, 곰배령을 시작으로 다달이 서울의 둘레길을 탐방하고 있어. 단원들 가운데 희망하는 이들끼리 산행 겸 친목을 꾀하는 행사인 셈이지. 하반기에 남산을 비롯하여 관악산•대모산•봉산 둘레길을 걸었는데, 내년 1월 6일 새해맞이 기념으로 한양도성 순성길 제1구간을 걷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제1구간 하면 보통 혜화문에서 창의문까지를 말하잖아? 근데 우린 54년 만에 완전히 개방됐다는 북악산 청와대 뒷산을 지나 경복궁역 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한 거야. 우리 산 우리 골짝도 다니지 못하도록 막아선 현실이 슬픈 탓일까? 얼마나 경관이 빼어난지는 모르지만, 너나없이 그날을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그 이면에는 차라리 ‘청와대를 내려다본다’는 희열이라고 할까? 어때, 너도 좀 설레지 않니?
오늘 사전 답사팀 3명이 다녀왔어. 마노라님이 어젯밤부터 구시렁거리더니만, 눈떠 보니 내복이랑 목에 두르는 워머까지 찾아놓고, 스틱이랑 사갈(아이젠)도 다 챙겨 두었더라구. 자네도 왜 우리 진이 맘 알잖아? 늙은이들이 얼어죽기 딱 좋은 날 산에 간다고 그렇게 퍼붓더니만, 막상 집을 나설 땐 보온병을 배낭 옆구리에 꽂아 주면서 카드랑 핸드폰까지 점검하는 것 있지? 그러면서 뭐라는 줄 알어? 제발 파고다 영감탱이처럼 티내고 다니질 말래. 예나 지금이나 날 어린애 취급하는 건 여전하다니까.
아닌 게 아니라 찬 바람이 거칠게 몰아치더군. 무엇보다도 안경에 서린 김이 참 성가시게 굴었어. 길 가다 말고 엉거주춤히 선 채로 장갑 벗고 안경 닦이로 문질러 보지만, 소용없어. 결국 안경을 손에 들고 가다가 하마터면 마주 오는 사람과 부딪칠 뻔했어. 이내 다시 안경을 썼는데 금세 부옇게 흐려져서 마스크랑 안경 다 벗고 땅만 보고 걸었어. 때마침 기차가 들어오는지 사람들이 냅다 뛰더라구. 덩달아 뛰었지, 뭐. 역시 계단은 참 불편해. 영락없는 밭장다리 모양새로 어기적거렸으니, 지금 생각해도 한숨이 나와. 그냥 웃어야겠지? 마스크를 다시 여미고 풍산역 역사로 들어서서 보니 석아, 그게 문산행이더라니까. 하릴없이 안경을 한참이나 닦고 있었어.
07시 30분에 집을 나섰는데 역시 경의선은 그런가 봐. 자네가 말한 신도림역에 견줄 수는 없겠지만, 여기도 만만치 않아. 배낭을 앞쪽으로 돌리고 왼발 먼저 들이미는 게 습관이 됐어. 손잡이가 뭔가? 보여야 잡지. 아니, 손이 닿질 않아. 그렇게 앞 사람 등에 코를 박고 숨만 쉬고 서 있는 거야. 용산역에서 6호선으로 갈아타고, 삼각지역에서 다시 4호선을 타고, 한성대입구역까지 갔거든. 근데, 6호선과 4호선은 경의선과 달리 제법 빈 자리가 있더라구. 나란 놈도 참, 웃기지도 않아. 자리가 없을 땐 빈자리가 간절하더니만, 자리가 널널허니 딴청을 부리더라니까. 게다가 10분쯤 더디 간 주제에, 경의선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낑겨 온 걸 무슨 무용담처럼 떠벌리고 있었으니 말일세.
영판 앳돼 뵈는 혜화문
성곽을 바라보며 우측으로 오르는데 인도가 따로 없는 길이었어. 수시로 차들이 올라오는데 좀 그렇더군. 부실한 탓에 처음부터 헉헉거리는데 갑자기 혜화문이 고개 마루턱에서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더군. 그래 봬도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5년 뒤인 1397년(태조 5)에 세웠다니 내력이든 역사성이든 사대문에 뒤지지 않아. 한양을 둘러싼 사소문(四小門) 가운데 하나인 동소문(東小門)이라는데, 임진왜란 때 문루가 불태워지고, 다시 일제강점기 때 완전히 허문 것을 1992년에 복원했대. 그래서 그런지 늙음의 미학이라고 할까? 묵직하고 듬직스러운 맛은 없고 영판 앳된 티만 나더라니까.
멀찍이 만해 선생의 유택, ‘심우장’ 쪽을 바라보며 잠시 쉬었어. 만해 선생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는 집이 싫어 반대편 산비탈에 북향집을 지었다는구먼. 결국 집까지 일제와 등지고 앉은 셈이지. 그나저나 국립묘지가 차고 넘친 걸까? 아니면.... 그런 분이 왜 망우리 공동묘지에 잠들어 계신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일세그려.
왕권을 상징하는 나부랭이에게까지 납작 엎드려 지내는 건 아니겠지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어. ‘와룡정’이 보이더군, 별다를 게 없는 조그만 정자인데 눈길을 끈 건 그 이름이야.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고을 이름 하나에도 일제의 잔꾀가 숨어 있더구먼. ‘와룡동(臥龍洞)’은 말 그대로 용이 누워 있는 형상이라는 거지. 그러니까 조선인들의 반감을 줄인답시고 창덕궁에 기거하는 임금을 용에 비유해서 원래의 지명과 전혀 관계없는 이름을 붙인 거지.
석아, 우리가 아직도 왕권을 상징하는 나부랭이에게까지 납작 엎드려 지내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해방된 지 몇 해인데, 왜 일제가 붙인 마을 이름은 그대로 둘까? 이젠 창덕궁 북쪽 봉우리인 응봉(鷹峰)마저 와룡봉이나 와룡산으로 부른다고 하니 말해서 뭘 하랴. 언덕받이에 세워 놓은 큼지막한 ‘와룡공원’ 이름판을 감돌아 오르는데 제법 숨이 차더군. 드디어 말바위 안내소! 줄잡아 한 시간쯤 걸렸어. 산행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다리가 벌써 풀려 있었어. 잠시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지.
마침 내려오는 중년 여성 세 분을 만났어. 자하문에서 출발했대. 20여 년 전에 아이들과 함께 말바위에서 자하문 쪽으로 해서 윤동주 시인의 언덕까지 간 적이 있어. 족히 세 시간이 넘게 걸렸거든. 내가 만일 지금 자하문에서 출발한다면, 거의 반죽음을 면하기 어려웠을 거야. 그런데 저분들은 느지막이 출발해도 09시잖아. 끝없이 이어지는 눈 쌓인 계단길을 90분 만에 돌파한 셈이니 정말 체력이 대단하지?
우리 일행이 사갈을 벗고 다시 오르려는데, 사무실에서 누군가 나오더니 한마디 하더군.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딴은 심심하겠다 싶었어. 이것저것 참견하더니 깔아둔 야자매트가 이주 미끄러우니 조심하래.
태항아리보다 험지에 세운 숙정문
얼마 가지 않아 산자락에 숙정문이 드러났어. 내가 지하철을 두 번이나 갈아타고 삼선교 쪽에서부터 1시간 반 동안 헉헉대고 올라왔으니, 1396년(태조 5년) 당시엔 오죽했겠어? 무슨 태항아리가 묻혀 있는 곳도 이처럼 험지는 아닐 거야. 사대문치고는 접근성이 형편없는 거지.
그렇다면 '북대문(北大門)'이라고도 불리는 이 문이 산속에 세워진 이유가 뭘까? 그것은 북쪽 문을 열어두면 여자들의 음기가 세진다는 거야. 그래서 북쪽에는 문을 세우지 않거나, 세우더라도 보잘것없이 왜소하게 지어놓고 닫아두는 경우가 많았대. 깊은 산속에 지어 놓고 갖은 풍설 끌어들여 문까지 걸어 잠글 요량이라면 차라리 짓지나 말지. 아직도 군사보호지역으로 묶여 있어 통행이 자유롭지 못하니, 애초부터 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문이었다고 해도 부잡한 말은 아닐 거야.
박원순은 숙청문 앞에서 단테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나저나 친구야!
박원순 전 시장은 하필이면 왜 예까지 와서 생을 마감했을까? 명색이 대문인데 사람이 다니지 않는 버려진 길 아닌가? 숙청(肅淸)이란 곧 어지러운 상태를 바로잡음이잖아. 이 문의 원명은 개혁과 정화를 표방한 숙청문(肅淸門)이었구. 그렇다면 그의 죽음 속 함의가 달라지지 않을까? 아마도 그는 ‘죽음의 희망조차 지니지 못한 이’가 되기 전에, 아래와 같은 글귀를 되새기며 하늘의 별을 바라봤겠지....
나보다 먼저 창조된 것은 영원밖에 없으니
나는 여기에 영원토록 서 있으리라.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출처 : 단테, 신곡 지옥 편(제3곡), 7-9행
이승만의 18만 년 무병장수를 빌던 만세동방 약수터
우리는 서로 차 한 잔씩 나누고, 이내 촛대바위 쉼터를 지나 서진했어. 그늘진 빙판길이 이어지니 둘러볼 여유가 있어야지.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서두르다가 그만 엉덩방아까지 찧고 말았어. 서너 걸음 내딛고 엉거주춤하는데 웬걸, 돌팍에 주욱 미끄러진 거지. 놀란 둘이 되돌아 올라오는데 참, 그렇더구먼.
이윽고 다다른 곳이 만세동방 약수터!
샘까지 가려면 서너 번 엉덩방아를 찧어야 할 정도로 가파른 바위를 서너 걸음은 기어올라야 하거든. 우선 ‘만세동방 성수남극(萬世東方 聖壽南極)’이라는 구절이 보여. 누가 언제 새겼는지 모른다고 하나, 이승만 전 대통령이 이 물을 즐겨 마셨다고 하잖아? 필시 그즈음에 어떤 맹목적 충성파들이 복채 듬뿍 들고 무슨 법사 찾아가서 받아온 구절 새겨놓고, 만백성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닦달하고 잡도리하기에 여념이 없었을걸. 그러면서 물 한 방울 새지 않게 24시간 지켜 서서 떠다 바쳤을 거야.
석아!‘
동방’은 삼천갑자를 산다는 전설 속의 동방삭, 성수는 곧 임금의 수명, 그리고 남극은 수명을 관장하는 남극의 별로 무병장수를 뜻한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어. 그러니까, ‘대한민국의 국부이신 이승만 대통령 각하님이시여, 동방삭과 같이 삼천갑자, 즉 육십갑자의 삼천 배인 18만 년 동안 무병장수하시옵소서!’라고 비손하는 구절인 게 틀림없어.
한편, 북한에서는 전국의 암벽에 새겨놓은 정치성 선전 구호를 ‘구호바위’라고 한다지? ‘조선의 영광, 민족의 자랑 김정일’이나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구호를 두고, “너무도 눈에 거슬리는 광경”이니, “자연이 빚은 천의무봉(天衣無縫)에 볼썽사나운 인위(人爲)를 가함으로써 경관을 해치는 이런 모습(NK조선, 2001.03.28.)”이라고 질타한 이들을 다시 볼 수는 없을까?
아무튼 “손 세척•세면 등의 용도로만 사용해 주세요. 음용수는 위험해요”라는 경고문을 가린 채 우리는 그 물을 마셨어. 아무려면 54년 동안 감추어 둔 샘까지 ‘위험’하다면, 오염되지 않은 대한민국 영토는 없을 거라는 우격다짐이 발동한 거지. 납작 엎드려 두 모금을 마셨는데 맑은 물빛 그대로 맛만 좋더구먼.
편집 : 박춘근 객원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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