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면 박성수(1952년 생)

동이면 박성수(1952년 생)
동이면 박성수(1952년 생)

“음….”
추억에 잠기시며 먼 산 바라보시는 박 선생님
일흔이 훌쩍 넘었는데도 어머니 생각만하면 눈물이 앞을 가려서 참을 수가 없다는 선생님  말씀에 마음으로 같이 울었다.
공무원 첫 직장이 이원면사무소, 아내와는 같은 사무실에서 앞뒤로 앉아 매일 보면서 정이 들어 결혼까지 하시고 사모님도 10여 년 전에 퇴직을 하셨다.
병원 가까운 곳에 있어야 돼서 평일에는 대전 집, 주말에는 옥천 집을 다니시는 두 분이 시작하는 노년도 아름다웠다. 겨울을 더 아름답게 그려주는 눈처럼 살고 계신 박 선생님.


■ 열다섯 살,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동이면 평산리에서 태어난 나는 외할머니께서 고향을 잊지 말라고 아명을 평산으로 지어주셨다. “평산아 평산아” 불러주셔서 나는 지금도 뿌리를 잊지 않고 있다.공무원으로 근무하다 사업할 기회가 생겨서 대전으로 나왔지만 내 고향 평산리는 내 마음의 안식처이며 어머니 품이다.

어머니께서는 몸이 너무 허약하셔서 3남매밖에 낳지 못하셨다. 내 유년의 기억 속에 담긴 어머니의 모습은 내내 기침하시던 상기된 얼굴이다. 어머니, 아픈 기억만 남고 그리운 추억은 떠올리기 어려워서 간간이 꿈에서라도 보고 싶지만 나타나주시지 않으니 마음만 간절하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인가 어머니께서 “평산아 용각산 사다다오” 하시며 구겨진 종이돈 300원을 주셨는데 철이 없던 나는 그 300원으로 기억도 안 나는 과자를 몇 봉지 사들고 와서 누님과 형과 같이 먹었다. 새우깡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중에 그 300원이 어머니의 생명줄이었음을 알게 되고 통곡을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어머니는 폐암 말기셨는데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 없는 단계라 그저 집에서 용각산으로 버티고 계셨다. 기침이 쏟아질 때는 용각산을 큰 숟가락으로 떠서 입안에 넣으시고 오히려 숨을 제대로 못 쉬셨다. 기침이 잦아들기는 했지만 숨을 못 쉬는 형국이니 그 고통을 감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중학교 1학년,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마루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보고 대문 앞에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먼발치에서 보아도 어머니의 죽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꼼짝없이 그 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누님이 와서 어머니를 안은 채 통곡을 하고 밭일 나갔다 돌아오신 아버님의 절규가 이어졌다. 나는 털썩 주저앉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밤마다 경기를 하면서 앓았다.


용각산…. 그 용각산으로 과자를 사 먹었던 철없는 나에 대한 채찍질!

밥도 먹지 않았고 내내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밖으로만 돌던 아버님 대신에 외할머니께서 나를 돌봐주셔서 다시 뿌리를 잊어버리지 않는 평산이로 돌려주셨다. 아버지는 몇 년에 한 번씩 집으로 오시고 이복동생들이 태어났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을 귀동냥으로 들어야 했다. 결국 외할머니의 고군분투가 우리 3남매를 키웠다.

누님은 일찌감치 방직공장에 가서 일을 하시고 야간고등학교까지 마치셨다. 철도공무원을 만나 결혼하시고 지금은 영동에서 잘 살고 계신다. 형님은 교대를 가셔서 학교 교장으로 퇴직하셨다. 나도 대학진학은 형님 몫으로 돌리고 공무원이 돼서 밥벌이를 하겠다는 생각이 나의 스무 살 때 결정이었다. 면 서기로 근무하면서 아내를 만나고 고마운 아내 덕분에 40대에 퇴직하고 작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게 되었다.

우리 3남매는 부모님의 부재 속에서 성장했지만 외할머니께서 고향마을의 든든한 느티나무처럼 건재해주셔서 우리는 성장통을 크게 앓지 않고 각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진정 ‘어른’ 이셨던 우리 외할머니, 김순임 어른. 생각만 해도 사무치는 그리움을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 이름 안에는 오숙자라는 나의 어머니의 이름까지 덧입혀져 눈물을 참아낼 수가 없다.

 

■ 새 삶으로 도약, 공무원에서 사업가로 

잘 살고 싶다는 성취욕구가 커서 한창 박봉이던 시절의 공무원 생활이 감옥 같았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사업을 시작했다. 대전에서 조명기기 사업을 하는 작은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면서 관급공사를 하던 작은아버지의 사업수완을 터득해나갔다. 친아들보다 나를 더 성실하게 보았던 작은 아버지께서 사업을 물려주셨다.

작은아버지의 친아들인 사촌형님과의 갈등이 없었을 리 만무하다. 나도 고민의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촌 형님은, 조카인 나에게 사업을 물려주시는 작은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고 작은아버지는 그 파열음을 단 한마디로 일축하셨다.

“성수는 가게에서 손을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첫날부터 출근하면 가만히 놓인 조명들부터 하나하나 닦기 시작했다. 돈만 세는 일은 누구나 한다.” 

나의 성실함을 인정해주시면서 형님과의 불협화음도 풀어주셨다. 우리 인생은 한 고비 한 고비 넘길 때마다 거친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일을 벌이고 크게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리하고 유지하는 일은 더 중요하다.  우리 4남매한테 늘 강조하는 덕목이다. 욕심을 부린 만큼 감당해 낼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인생이 그리 만만치 않으니 작은 일부터 세심하게 진행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우리 4남매도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열심히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자기 몫을 잘 해내고 있다. 부모가 열심히 살아온 뒷모습을 우리 아이들이 존중해주고 저들의 삶에 좌표로 삼아주니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 추억속의 은인 ‘노벨 평화상’ 반장님

조명사업은 건설현장과 불가분의 관계다. 건축현장에도 당연히 우리 직원들이 투입 돼서 전체적인 그림을 같이 그리게 된다. 30년 전 인연을 맺고 그 때부터 우리 공사 현장에서 일했던 반장님이 한 분 계신다. 나보다 세 살 위인 누님뻘 되시는 분이다.

현장에서 아침 6시에 집합이면 5시30분에 그 분이 소집한 분들 다섯 명을 데리고 가장 먼저 와 계신다. 겨울이면 따뜻한 차, 과일 등을 꼭 준비해오시고 함바집에서 부족한 간식들은 꼭 챙겨 오신다. 성실하게 일하는 건 당연하고 사이가 서먹한 사람들은 반드시 화해를 시켜서 일하는 현장의 평화주의자였다. 그래서 농담으로 자주하던 말이 “우리 반장님 노벨 평화상 줘야 한다”고 하면 형님같이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맞다. 여장부시라 누님보다 형님 같은 분이었다.

지금은 조명과 건축 일을 우리 큰아들이 하고 있는데 큰아들 사업의 현장까지 아직도 건재하게 다니신다. 여든이 가까운 분의 열정과 성실함은 존경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 겨울의 백미는 ‘하얀 눈’

아직은 70대라 할아버지도 아니고 아저씨도 아닌 애매한 나이다. 지금 음악도 듣고, 읽고 싶던 책도 마음껏 읽고 마라톤도 살살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열심히 살았던 50년의 결실이 달콤하고 튼튼하다. 아흔 넘은 대선배님들이 보시기엔 나도 아들 같지만 그래도 6.25전쟁 후 천막교실에서 코 질질 흘리며 공부도 해보고 고속도로 위를 달리며 청춘을 바쳤다. 열심히 일한 우리세대다. 후배들에게도 “너희들에게 물려준 이 나라를 잘 지키고 바로 세워나가야 한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고 싶다. 

평일에 살고 있는 대전의 아파트에도 갈수록 아이들이 줄고 주말에 오는 옥천의 동네에서는 눈을 어디에 둬도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지 어두운 짐작을 할 수밖에 없어서 안타깝지만 나부터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련다. 사회의 선배로 굳건하게 나를 지키는 것이 우리 후배들, 우리 자녀들을 지키는 길이다.

나도 곧 인생의 겨울을 맞겠지만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설경은 너무나 아름답다. 그 눈이 없다면 겨울의 아름다움은 어디서 찾을까. 찬바람만 불어 살을 시리게 한다면 겨울은 그저 앙상할 뿐이다. 

그래, 나이 든 우리가 존재해야 세상이 굴러가고 균형을 잡는 것이다. 한겨울의 눈 같은 존재로 남은 여생 살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다. 윗대 어른들의 전유물 인줄 알았던 ‘여한이 없겠다’ 라는 이 말을 나도 쓰는 것을 보니 나도 나이가 든 것은 어쩔 수 없구나. 그렇다면 또 나이든 값을 하면 되지.

이러면 이래서 좋고 저러면 저래서 좋은 자유로운 때라고 위로하련다. 가장 좋은 때는 언제나 ‘지금’이다. 주어진 날들을 값지게 쓰는 하루하루가 우리 인생을 윤기 나게 할 것은 자명하다. ‘내일’보다 ‘오늘’을 더 아껴주는 날들이 모여지기를! 우리 집 소나무에 내려앉은 눈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설경이 이리 어여쁜지 왜 이제야 알았을까. 한겨울의 눈처럼 인생의 백미 같은 날인 ‘오늘’을 온전히 품는 하루를 시작해본다. 

아들 편지 

아버님께 !!
아버님의 손때 묻은 사업현장을 맡아서 직접 일을 해보니 아버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는지 더 깊이 알게 됐습니다. 만나시는 분들마다 아버님과의 추억을 귀하게 말씀해주셔서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아버님이 제 아버님인 것이요. 

 

은퇴하셔도 여전히 건강하시고 마라톤까지...  아버님은 정말 남자가 봐도 멋있는 남자입니다. 제가 그 절반이라도 따를 수 있을까요.

제 인생의 롤모델이신 아버님.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사업장에서나 가정에서나 큰 아들로 손색이 없도록 정진하겠습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건강 꼭 지켜주시고  봄날에 아버님과 마라톤 같이 동행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큰 아들 유석올림.

* 이 글은  옥천닷컴(http://www.okcheoni.com)과 제휴한 기사입니다.

* 기사 원문 보기 :  http://www.okcheoni.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55

편집 : 김미경 편집위원 

김경희 옥천신문 시민기자  minho@o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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