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세상 연구소>(준) 발전을 기원하며
내가 김동춘 교수를 처음 만난 때는 1984년 3월이다. 그해 대학 또는 대학원을 졸업한 20대 중반 새내기 교사들 8명이 동시에 구로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김동춘 교수는 <4‧19 발생 배경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이란 논문으로 대학원을 졸업한 상태였고 당시 지리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 시절 전두환 군부 정권은 석사장교제도를 두어 6개월만 지나면 제대할 수 있었는데도 그는 현역 사병으로 꼬박 2년을 다해 군 복무를 마쳤다. 군 복무 중간 휴가를 나왔을 때 그는 변혁 이론에 뒤처지는 것을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80년대 중후반, 한국 사회는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치열하게 이론투쟁이 전개되던 시절이었다.
글쓴이 역시 2년 2개월 군 복무를 마치고 87년 3월 복직했을 때 어느 날 김동춘 선생이 님웨일즈의 『아리랑』을 권했다. “전기체 인물사로는 상당히 감동을 준다”는 말과 함께...
님웨일즈의 『아리랑』은 80년대 변혁을 꿈꾸던 청년들에게 영혼 깊숙이 다가온 책이다. 서른 세 살! 짧은 생을 치열하게 살다간 혁명가의 순결한 영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살아오면서 님웨일즈의 『아리랑』을 네 번 정독해서 읽었다. 무명의 조선인 혁명가가 걸어갔던 삶과 투쟁의 흔적이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고결함과 함께 치열함을 더해 깊은 감동을 안겨다 주었기 때문이다.
또 어느 날은 학교 근처 옥탑방인 김동춘 선생의 자취방을 우연히 방문한 적이 있다. 세평 남짓한 조그만 방 안쪽, 벽 책장엔 책들로 가득했다. 글쓴이는 책장에 꽂힌 책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김동춘 선생은 일본어 서적 복사본이 두 권이라며 한 권을 글쓴이에게 건넸다. 글쓴이는 더듬거리며 몇 달에 걸쳐 그 책을 읽어본 기억이 난다. 해방 공간 백색테러 속에 가족이 해체돼 비극을 맞았던 어느 코뮤니스트 항일혁명가를 다룬 책이다.
87년은 1월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군의 원통한 죽음과 함께 우리 사회 전체에 거대한 민주화의 바람이 불던 시대였다. 87년 6월 항쟁 이전 '직선제 개헌 투쟁 국면'에서 서울지역 YMCA 중등교육자협의회 소속 교사들을 필두로 구로고 교사들 또한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전두환의 4・13호헌조치 철회를 촉구하며 직선제 개헌을 촉구했다. 이른바 「조속한 정치민주화를 촉구한다」는 서울교사 105인 선언에 구로고등학교 교사 김동춘, 하헌종, 하성환 3명이 동참했다.
서울교사 105인 선언이 언론에 보도되자 교육당국은 잔뜩 긴장했다. 학교장은 이튿날 바로 서명 교사 3명을 교장실로 불러 은근히 압박하는 투로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서명교사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1987년 7월 3일 성균관대학교 금잔디 광장에서 열린 '민주교육법 쟁취와 보충자율학습 폐지를 위한 전국교사대회'에 적극 결합하며 참가했다.
김동춘 선생은 구로고 20대 청년 교사들 모임에도 종종 참여했는데 방과 후엔 주로 학술 운동에 깊이 관여한 듯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의 열망은 소장학자들이 주도한 학술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런 와중에 87년 9월 전국교사협의회(약칭 전교협)가 창립되고 지부와 지회, 그리고 전국적으로 단위 학교 평교사협의회(또는 평교사회)가 속속 결성되었다. 이에 발맞춰 구로고에서도 20대 청년 교사들이 주도하여 88년 11월 <구로고 평교사회>를 결성했다. 1988년 봄부터 20대 청년교사들을 중심으로 평교사회 필요성을 공유하고 전체교사들을 대상으로 인식을 확산해 나갔다. 그리고 2학기 들어서 전체교사를 대상으로 평교사회 발기인 서명 활동을 전개한 결과, 구로고 교사 85명 가운데 41명이 발기인으로 서명에 동참하였다.
물론 88년 11월 <구로고 평교사회> 창립 당시엔 1명이 탈퇴하여 40명이 평교사회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 활동의 중심에 김동춘 선생이 있었다. 그는 초대 평교사회 총무를 맡았다. <구로고 평교사회>는 당시 전교협이 추진하던 교육악법 철폐 투쟁에 호응하여 12월 교육법 토론회를 국민정신교육관에서 개최했다. “교사는 교장의 명을 받아 학생을 지도한다”는 황당한 교육악법 조항에 분노하며 구로고 교사 24명이 교육법 토론회에 참여했다. 그러한 활동의 결과, 교육악법 철폐 투쟁에 교사 대중의 상당한 공분과 지지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평교사회 활동은 오래가질 못했다. 89년 2월 봄방학 기간 동안 전교협 대의원대회가 열렸는데 89년 상반기에 교사노동조합을 건설한다는 방침을 전격 결정했기 때문이다. 전교협 대의원대회 결정으로 교육운동의 방향은 급선회했다. 교사가 노동자로서 자주적인 교사노동조합을 세우겠다고 천명한 때문이다. 89년 3월 새학기를 맞아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던 시기였지만 전교협이 노동조합으로 조직 전환을 선언한 만큼, 구로고 20대 청년 교사들 또한 하루하루가 분주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김동춘 선생은 88년 초대 평교사회 총무로서 평교사회 창간회보 「매듭」을 발간했다. 「매듭」은 김동춘 선생과 연수홍보부장 하헌종 선생이 주도하여 발간했는데 교사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교사 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활동의 일환으로 발간했다. 그러다 외부 학술운동의 요구가 절실했던지 김동춘 선생은 89년 3월 홀연히 학교를 떠났다. 역사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89년 3월에 떠나지 않았다면 그해 5월 전교조 창립과정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을 것이고 강제 해직당했을 것이다.
그는 어떤 사회학자보다 한국 사회에 깊이 천착해 세밀히 연구해 온 인물이다. 친일파 역사청산 문제와 한국 전쟁, 그리고 민간인 학살과 반공자유주의, 가족주의, 기업국가, 시험능력주의 등 한국 사회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열쇳말을 일찌감치 제시한 연구자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연구자로서 신념을 간직한 학자다. 평소 그는 우리 사회가 역사사회적으로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 정확하게 진단하고 알아야 우리사회를 건강한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연유로 김동춘 교수는 우리 사회를 역사사회학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연구하는 ‘사회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나아가 대한민국 사회를 역사사회학적 관점에서 공부하려는 사회학도를 길러내는 데 교육자로서 혼신을 다했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이고 그 문제의 역사 사회 속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다면 미래 한국 사회가 발전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활동의 결과, 2004년 김동춘 교수는 한겨레신문사가 선정한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100인'으로 뽑히는 영광을 입었다. 한겨레신문은 대한민국 사회 유일한 국민 주주 신문이다. 그리고 2006년에는 ‘단재 학술상’을 수상했고 2016년에는 한겨레신문사에서 주는 ‘송건호 언론상’을 수상했다. 한국 사회에 깊이 천착해 과학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규명한 비판 사회학자로서 김동춘 교수가 한국 사회에 남긴 연구의 지평은 매우 넓고 깊다.
특히 2000년에 출간된 『전쟁과 사회』는 ‘한국 전쟁’을 깊이 있게 논구한 전무후무한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학자들과 사회학자들에게 연구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본보기를 보여준 뛰어난 결과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전쟁의 원인과 성격, 그리고 전쟁의 와중에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실상을 그토록 깊이 있게 다룬 연구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당시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 초청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저작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몇 년 뒤 『전쟁과 사회』는 ‘동아시아 100권의 인문 도서’로 선정되어 영어, 일본어, 독일어로까지 번역, 출판되었다. 뿐만 아니라 20년도 더 지난 오늘날 여전히 스테디셀러로서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그는 90년대 이후 참여연대 정책위원장과 학술단체 기관지인 『역사비평』 편집위원, 『경제와 사회』 편집장을 역임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역할을 수행했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 2005년 1기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약칭 진화위) 상임위원으로 활동한 사실이다. 민간인 학살 관련 현대사 영역에서 김동춘 교수는 당시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가 활동한 이 시기에 이승만 정권 이후 50년 넘게 은폐되고 파묻힌 숱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이 하나둘 세상 밖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1기 진화위에 압박이 가해지고 해체되자 그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와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로, NGO대학원장으로, 그리고 성공회대 민주주의 연구소 소장으로 줄기차게 우리 사회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서 동시에 후학을 길러내는 데 열정을 바치고 있다.
이제 정년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미래세대를 위해 ⁌좋은 세상 연구소⁍를 준비 중이다. 역사 정의가 짓밟혀 진실과 거짓이 뒤집히고 사회 정의가 혼탁한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 사회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지식을 공유, 선순환하며 운동의 재생산을 위한 ‘기초 놓기’이다.
미국 어느 독지가가 김동춘 교수에게 전한 2,000만원을 기금으로 내놓아 ‘연구소’ 창립을 준비 중이다. 시민의식을 고양시켜 시민운동을 살려내고 한국 사회 노동 현실과 교육 현실에 대한 이해를 높여 노동운동과 교육운동의 재생산을 지향한다. ⁌좋은 세상 연구소⁍(준) 산하 <아카데미>와 정기적인 <포럼> 개최가 바로 그러하다. 뜻있는 시민들의 관심과 지지가 튼튼한 초석이 되리라 확신한다.
<좋은 세상 연구소>(준) https://funding.do/pZ8T
편집 : 하성환 객원편집위원, 심창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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